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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준란 Mar 06. 2021

7년의 만남 70년의 사랑 <이중섭의 아내>

Two Homelands, One Love




영화 이야기에 인문학을 얹었다! 한중일 횡단 토크쇼 <차이나는무비 플러스>입니다. 

<차이나는무비 플러스>는 '길 위의 인문학' 시리즈로 한중일 영화 속 우리의 근현대사를 돌아봅니다. 오늘은 이중섭 작가를 통해 예술의 길을 보다 넓혀보고자 합니다.  2016년 국내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이중섭의 아내>입니다.


영화 <이중섭의 아내>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


사카이 아츠코 (ATSUKO SAKAI) 감독이 연출한 <이중섭의 아내>는 2014년에 제작되었고 2016년에 국내 개봉되었습니다. 2016년은 이중섭 작가의 출생 100주년이기도 하였죠.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Two Homelands, One Love - Lee Joong-seup's wife>입니다. 이중섭의 아내는 부제이고 ‘Two Homelands, One Love’가 제목인 것이죠. 일본어 제목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 ‘ふたつの祖国、ひとつの愛’, 다시말해 ‘두 개의 조국, 하나의 사랑’입니다. 70년을 이어온 ‘단 하나의 사랑’은 영화 속에서 이중섭의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 여사의 인터뷰를 통해 느낄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그녀의 인터뷰를 통해 우리는 이중섭을 다시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를 볼 때 두 가지 초점으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이중섭의 아내를 통해 이중섭을 보거나 혹은 이중섭의 아내 자체만을 보는 것이죠. 누구를 주인공으로 보느냐에 따라 여러 감상이 가능하니 영화를 보실 때 이 점을 생각하며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영화  <이중섭의 아내>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투비오어낫투비(TO BE OR NOT TO BE)'

<차이나는무비 플러스>의 킬러 콘텐츠! '투비오어낫투비(TO BE OR NOT TO BE)’, 말그대로 ‘살릴 것인가 죽일 것인가’, 영화 속에서 살리고 싶은 캐릭터와 이야기, 장면들(TO BE)은 살리고, 그렇지 않은 부분(NOT TO BE)은 다시 자신만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코너입니다. 영화에 새로운 스토리텔링을 더해 색다르게 상상해보는 ‘리(Re)스토리텔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중섭의 아내의 생애를 이야기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이중섭의 아내>에서 어떤 장면과 이야기에 주목해볼 수 있을까요?


책을 사랑하는 책사는 마사코 여사가 2013년 서울미술관을 방문해 이중섭 작가의 <황소>(1953)를 처음 보게 된 장면을 TO BE로 뽑았습니다. 작품을 마주하고 남편의 싸인을 먼저 확인한 뒤 한참을 바라보는 마사코 여사의 뒷모습에서 남편을 그리워하며 아이들과 버텨온 그 오랜 시간의 무게가 느껴져 만감이 교차하는 장면입니다. 이중섭 작가의 작품 세계를 대표하는 이 그림을 실물로는 처음 접한다는 사실 역시 안타까움을 더하죠.


영화 <이중섭의 아내>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자막달린 중국 영화는 필요 없는 자영업은 마사코 여사의 부모님을 TO BE로 뽑아 그들의 넓은 마음과 행동에 주목했습니다. 이중섭과 그의 아내 마사코가 문화학원에서 만나 사랑을 쌓고 결혼에 이르기까지 마사코의 부모님의 역할이 컸습니다. 부모님은 가난한 예술가이면서 심지어 일제강점기에 조선인인 이중섭과 사랑에 빠진 마사코를 이해할 뿐 아니라 응원하고 격려해주었습니다. 마사코는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부모님은 결혼을 한번도 반대한 적이 없습니다. 부모님도 저도 기독교인이었습니다. ‘화가로 먹고 살 수 있겠나’ 걱정은 하셨지만 조선인이라고 차별한 적도 없습니다. 아버지는 딸바보였어요. 저를 믿어주고 전폭적으로 밀어주셨어요. 먹고살기 힘들면 다시 돌아오라는 말씀도 하셨어요.”

 이러한 마사코 여사의 증언처럼 그의 부모님은 이중섭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결혼하게 됩니다. 1953년 7월 이중섭이 선원증을 얻게 되어 단기체류로 일주일 동안 일본으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을 때, 마사코의 어머니는 이중섭이 항구에서 벗어나 가족들과 함께 있을 수 있도록 신원보증서까지 구해줬죠. 또 이중섭은 가족들과 헤어지기 싫어 일본에 계속 머물러 있으려고 하자 훗날 훌륭한 화가가 될 텐데 불법체류자라는 신분 때문에 앞길을 막아서는 안 된다며 설득해 다시 한국으로 돌려보낸 것 역시 어머니였죠. 당시 이중섭과 마사코, 그리고 두 아들 네 식구는 1주일 동안 히로시마의 여관방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 시간이 가족이 함께한 마지막 시간이 되고 말았죠. 그래서인지 이중섭의 작품에는 가족과 아이들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이루고 싶은 꿈이 많아 잠도 많은 '꿈꾸미'는 바로 이중섭의 그 모든 작품을 TO BE로 뽑았습니다. 가족과 아이들 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에는 반복되는 여러 소재들이 있습니다. 바닷가 풍경을 그리기도 하였고, 개나 닭과 같은 동물들을 그리기도 하였고 특히 소를 많이 그렸습니다. 또한 그는  캔버스 뿐만 아니라 엽서에도 그림을 자주 그렸기에 그에게 있어 그림은 미술 작품이면서 동시에 삶 깊숙히 자리 잡은 일상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그의 독특한 기법인 ‘은지화’입니다. 은지화는 양담배를 싸는 종이에 입혀진 은박 위에 드로잉을 하여 긁힌 부분에 미세한 음각을 남기고 그 위에 다시 물감을 바르고 닦는 그가 창안한 새로운 기법입니다. 마치 고려청자의 상감기법처럼 물감이 파인 부분에 새겨지며 독특한 느낌을 만들어내는 것이죠. 안타까운 현실 상황 속에서 다양한 소재와 기법을 만들어냈던 그의 작품 세계가 TO BE 되어 영원히 기억되길 바랍니다.


길 위의 인문학 드레싱’

이번에는 <차이나는무비 플러스>의 두번째 코너. 영화를 보고 떠오른 역사, 문학, 음악, 철학 등 인문학적 감성을 더하여 조선의 근대를 들여다보는 시간, 길 위의 ‘인문학 드레싱’입니다. 암울한 시기에 등장한 천재 화가 이중섭과 그의 아내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이중섭의 아내>에는 어떤 드레싱을 더해볼까요?


먼저 꿈꾸미는 제주도 서귀포시에 위치한 ‘이중섭 미술관’을 다녀왔습니다. 이중섭은 1951년 1월부터 12월까지 한국 전쟁을 피해 제주도 서귀포로 내려와 살았습니다. 이때 역시 많은 작품들을 남겼는데 대표적으로 <서귀포의 환상>(1951)과 <섶섬이 보이는 풍경>(1951)이 있죠. 서귀포시는 이중섭이 서귀포에서 잠시 머물렀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 1995년 이중섭이 당시 살았던 집 터에 기념 표석을 세우고, 1997년 집을 복원, 마침내 2002년에 이중섭 미술관을 개관하였습니다. 복원된 초가집은 네 가족이 들어가기에는 너무도 좁디좁은 한 평 남짓한 방 한 칸입니다. 이 작은 공간에서 살았던 당시 이중섭과 그의 아내를 생각해보며, 바로 옆에 위치한 미술관에서는 그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죠.



이중섭 미술관 옆 복원된 초가집과 이중섭의 <황소> (출처: 이중섭 미술관)



이중섭 미술관은 2008년 이중섭미술관 창작 스튜디오를 신설해 젊은 작가들이 작업을 하고 또 전시를 할 수 있는 공간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미술관 주변 전체가 이중섭 문화의 거리로 지정되어 다양한 문화 공간들이 있으니 제주도를 방문하신다면 들려보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신여성은 두 개의 인문학 드레싱을 가져왔습니다. 이중섭이 아내에게 보낸 편지와 미술작가 강익준입니다. 

먼저 이중섭의 편지를 읽어보겠습니다.


“나의 귀엽고 소중한 남덕군, 새해 복 많이 받았소? 하루 바삐 건강해 주시오. 그 뒤 몸 컨디션은 어떤지요? 12월 8일자 편지는 12월 11일에 받고 당신의 곤란한 입장 잘 알았소. (...) 올해도 또 혼자 쓸쓸하게 새해를 맞아 매일같이 어둡고 공허한 기분이오. 여러 사정도 있지만 이 이상 연기해 본들 해결이 될 리는 없고 차츰 복잡해질 뿐이오. (...) 내가 가더라도 좁은 방 한 칸에 두어달 먹을 식비만 있으면 내 힘과 노력으로 하루 한끼나 두 끼 먹고도 생활을 시작할 수 있소. 어떤 노동이라도 할거니 염려하지 말고 내가 가는 길에 찬성해 주시오. 세상은 언제나 뜻대로만 되는 것은 아니라오. 조건이 좋아질 때까지 기다려 본들 결코 우리 생각대로 조건이 좋아지는 건 아닐거요. 또 무슨 다른 사정이 생기기 마련이지요. 마음이 정해지거든 용감하게 행동하는 것이 살아가는 유일한 태도요. 발레리의 시의 한 구절처럼 지금이야말로 굳세게 강하게 살아가지 않으면 안될 때요.”

                                            - 1951년 1월 7일 편지 중에서 –


 이중섭은 아내과 두 아들을 일본으로 떠나보내고 서귀포에서 혼자 지내게 되었습니다. 이때 특히 아내에게 많은 편지를 보냈는데 이 편지 속에는 많은 그림과 시가 담겨 있습니다. 편지는 앞서 꿈꾸미가 소개한 이중섭 미술관에 전시가 되어있으니 편지가 궁금하신 분들은 이중섭 미술관에서 직접 보실 수 있습니다. 위에 소개한 편지는 신년 초에 쓴 글인데 2021년, 지금의 우리에게도 큰 울림을 줍니다. 세상사가 뜻대로 되지 않고 늘 불안하고 어둡고 공허하지만 그래도 지금이야말로 ‘굳세게 강하게 살아가지 않으면 안될 때’라는 것이 마치 언제 끝날지 모르는 안타까운 상황에 처한 우리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전해주는 것 같습니다.


 또 다른 인문학 드레싱은 이중섭과 마찬가지로 가난으로 어려운 시절을 보낸 미술 작가, 강익준입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미디어 아티스트 백남준이 생전 유일하게 제자라고 인정하기도 했던 강익준은 미국 유학 당시 너무도 가난했고 출퇴근 길에 겨우 아주 작은 캔버스에 그리는 작업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마치 이중섭이 은박지에 그림을 그린 것처럼 말이죠. 그리고 이후에 그 작은 캔버스들을 모아서 벽면을 이루는 미디어 설치 작업을 하였습니다. 백남준을 통해 알려지기도 하였지만 지금은 동양적인 느낌을 가진 미디어 아티스트로 국내외에서 활발히 활동 중입니다. 이중섭과 강익준 모두 어려운 시절이 있었지만 결국 그것으로 인해 우리가 두 작가를 알게된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멀티플 다이얼로그(1994, 비디오 설치)/ 백남준과 강익준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책사가 가져온 인문학 드레싱은 『돌아오지 않는 강』이라는 책입니다. 저자는 정치부 특파원으로 2013년부터 2018년까지 한국에서 서울 특파원을 지낸 일본인 기자 오누키 도모코(大貫智子)입니다. 그녀는 우연히 신문에서 이중섭이라는 화가가 부인이 일본인이라는 구절을 읽곤 호기심이 생겨 이중섭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전까지는 미술에 문외한이었지만 그 호기심으로 2016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린 ‘이중섭 탄생 100주년 기념전’을 취재하고 그때 이중섭에 빠져 그를 알리는 작업을 시작한 것이죠. 그리고 이 책을 통해 일본에서 권위 있는 저술상 중 하나로 꼽히는 ‘쇼가쿠칸(小學館) 논픽션 대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이중섭은 사실 일본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화가일 뿐더러 ‘쇼가쿠칸’이라는 출판사의 대상에 1993년부터 이제까지 한국 관련 책이 없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매우 으레적인 일이죠. 아직 번역 소식은 없지만 곧 번역이 될 것이라 기대하고 또 일본에서도 이중섭의 작업이 많이 알려지기를 기대해봅니다.

 

자영업은 인문학 드레싱으로 한낙연 화백 이야기를 가져왔습니다. 1898년 중국 지린성(길림성, 吉林省) 룽징(용정, 龍井)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활동한 조선인 화가 한낙연 화백은 우리나라에서는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중국 내에서는 ‘실크로드 문화의 수호자’, ‘중국의 피카소’라고 불릴 만큼 20세기 전반 중국을 대표하는 화가입니다. 1914년 즈음에 미술 공부를 시작해 1919년에는 상하이[上海]로 가서 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하였는데, 당시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중국 내 조선인들 사이에서 이른바 ‘용정 3・13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한낙연은 이때부터 독립운동에 참여하면서 태극기를 그리는 등의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이로 인해 이후 블라디보스토크로 피신을 가게 되었고, 다시 상하이로 돌아와서는 고려공산당 창단에 참여하기도 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호위위원직을 맡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창단 초기였던 임시정부는 독립 운동에 있어서 큰 성과를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약간의 파벌 싸움도 잦았습니다. 이에 젊은 조선인들은 다른 길을 찾게 되었는데 그것이 러시아 혁명과 사회주의, 공산주의였습니다. 한낙연 역시 이러한 절차를 밟으며 1923년에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였는데, 이것은 조선인 입당 1호이자 한(漢)족들을 포함한 중국 미술계 내에서도 최초의 공산당 입당이었습니다. 1924년에는 선양에서 만주지역 공산당 조직을 개척하고 총책임을 맡으면서 공산당 내에서 입지를 다졌습니다.

한낙연 화백(1898 ~ 1947) (출처 : 바이두백과)

 

그러나 1931년 일제가 ‘만주사변’을 통해 만주국을 세우면서 한낙연은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스위스, 영국, 이탈리아를 전전하며 여러 화풍을 익히게 됩니다. 1940년대에 다시 귀국하여서는 서북지역 해방이라는 공산당 내 비밀임무를 부여받고 간쑤성(감숙성, 甘肅省)으로 떠나게 됩니다. 이때 간쑤성은 실크로드에 위치한 지역으로 중국 서부의 교통 중심지입니다. 즉 이곳은 동서문명의 교류의 장으로서 다채로운 문화가 남겨져 있었죠. 한낙연은 특히 동굴 벽화와 석구 벽화에 매료되어 중국 내 최초로 석굴 문화를 연구하고 조사하였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키질 석굴 내에는 한낙연 전시관이 있을 정도로 중국 내에서는 큰 위상을 지닌 인물입니다. 

 그런데 앞서 잠시 이야기하였듯 우리는 지금까지 한낙연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그에 대해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기를 하자면, 일제가 패망한 후 한국 전쟁이라는 거대한 비극을 겪으며 남북이 대립하고 또 권력의 이해관계에 따라 한낙연과 같은 사회주의 활동 전략이 있었거나 친공산당적 이력이 있는 인물들은 역사 속에서 거세된 것은 아닐까 자문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독립운동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아직도 너무 좁은 시야에 갇혀있는 것은 아닐까 고민해보는 것이죠. 그렇기에 <차이나는무비 플러스>는 ‘길 위의 인문학 드레싱’을 통해 앞으로 더 많은 조선 근대 속 인물들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며 아직 드러나지 못했던 이야기를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제 마지막으로 ‘길 위에 인문학’답게 ‘이중섭 로드’를 그려보며 마무리하겠습니다. 원산에서 출발해 도쿄에서 미술을 배우고 다시 원산으로 돌아와 마사코와 결혼하였지만 한국 전쟁으로 가족들과 함께 부산을 거쳐 제주도 서귀포로 피난을 오게됩니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마사코의 부친이 병환으로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남긴 유산의 상속 문제 등으로 마사코가 일본으로 떠날 수 밖에 없었고 이중섭은 서귀포에 혼자 남게 되었죠. 이후로는 부산, 통영, 서울, 진주, 대구 등을 떠돌며 작품 활동과 전시에 매진하였고, 1956년 영양실조와 간장염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렇게 오늘은 가난했지만 작품에 대한 열정으로 누구보다 많은 길들을 거쳐온 ‘이중섭 로드’를 정리해보았습니다. 이것으로 오늘의 <차이나는무비 플러스> 마무리 하고 다음에 다시 한국의 근대를 볼 수 있는 영화로 돌아오겠습니다.


영화 이야기에 인문학을 얹었다! 한중일 횡단 토크쇼 <차이나는무비 플러스>!!



ㅣ팟캐스트ㅣ
 더 자세한 내용을 들으시려면 다음의 링크를 클릭하세요! 
 http://www.podbbang.com/ch/13254        


또 있습니다. 팟티에서도 들을 수 있습니다. 

https://www.podty.me/cast/182234 


ㅣ네이버 오디오 클립ㅣ

오디오클립에서도 들을 수 있습니다. 

https://audioclip.naver.com/channels/28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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