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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기자의 긁적끄적 Mar 13. 2021

짧은생각들

비행이랑 판포랑 영원


■비행

비행기가 이륙하는 그 순간을 좋아한다. 떠오르기 위해 온몸으로 달려대는 거대한 기계의 힘에 압도된다. 스팀펑크가 취향인 점도 분명 작용하겠다. 여하간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모든 걸 쏟아붓는 기체의 육중한 힘에 마음이 끌린다. 이륙하는 순간 느끼는 설렘의 반쯤은 두려움이다. 반대로 말하면, 어느 정도의 두려움이 없다면 설렘도 아니다. 비행기는 산책하듯 천천히 활주로를 걷다가, 딱 맞는 자리를 발견하고, 우뚝 서있다가, 속도를 끌어올린다. 끓어올린다 제 속의 뭔가를. 그르르르 하면서 온몸으로 울며 달린다. 굉음과 진동, 속도, 부글대는 연료, 비명을 지르는 부품들, 제멋대로 날뛰는 엔진. 그리고 그 모든 떨림이 한순간에 적막을 맺는 고요한 이륙의 순간. 이 땅에서 발을 갓 떼는 그 장면. 죽지 않고도 하늘을 날고야 말겠다는 인간의 오랜 집념이 마침내 낳은 편안한 몇초. 무엇도 대신할 수 없는 그 공백.


■판포

제주도 판포항구는 원래 항구였는데, 모래가 들어와서 항구로서의 기능을 잃었어. 항구가 항구이려면 배가 곧바로 연안에  몸을   있어야 하잖아. 모래가 들어오고 바다가 얕아지면 그게 어려운 거지. 기상예보에나 나오는 ‘제주먼바다 직접 다녀온 어부들이 예전에는 이곳에서 몸을 기대곤 했어. 술을 퍼마시고 욕지거리하고 멱살잡고 싸우고 형편없이 KO당하고 아무데나 구토하고 날이 밝으면 다시 등이 푸른 고등어를 잡으러 떠났지. 모래가 들어온 판포항구는 항구로의 기능을 잃었어. 대신 매년 여름이면, 전국의 젊은이들이 모여들어서 스노쿨링을 한대. 꽤나 유명한 명소라더라. 쓸모없어지고 나서야 다른 쓸모가 활짝 피어난 . 버려졌기에 비로소 빛난 공간. 하필이면 제주의 서쪽에 있어서 완연한 노을을 매일 맘껏   있는 . 이런 공간이 위안을  주는  불가능하지.


■영원

굳이 따지자면 ‘현재주의자’다. 과거로는 어차피 갈 수 없는 거고, 미래는 영영 오지 않는 시간을 뜻하는 거니까, 영원한 건 현재뿐이라고 생각했다. 순간에 최선을 다하며 지금 여기의 재미를 찾으려 한다. 모든 우연에 마음을 여는 편이다. 그래도 언제나 영원을, 백년이고 천년이고 살아 숨쉬는 그런 어떤 것을 갈망하는 것 같다. 글이나 음악이나 영화나. 오래된 것들을 무턱대고 좋아하는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을까. 오늘은 제주 판포항구에서 노을을 봤다. 여기가 아닌 다른 세계로 이어지는 통로 같았다. 내세로 가는 길은 이런 풍경일까. 너무 예쁘고 아득해서 울컥했다. 사진기를 들고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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