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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멀리 가는 마음

아침숲의 거미같이

by 람기자의 긁적끄적


우리 머리는 온갖 것을 할 수 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그냥'을 넘어서진 못한다. 그냥은 말하자면 설명불가능한 어휘 아닐까.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일을 그냥 좋아서 밤새 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말 좋아하는 건 그냥 좋다. 충만한 순간은 그냥 충만하다. 그냥은 그냥 거기에 놓여 우리를 지배한다.


아주 멀리 훌쩍 떠나는 마음도 꼭 그렇다. 멀리 간다고 우리가 뭔가 특별한 걸 하는 건 아니다. 맛집은 우리 동네에도 있다. 산이나 바다 같은 것도 마음만 먹으면 금방 본다. 생경한 동네라도 오래 지내보면 사람 사는 거 거기서 거기라는 것만 알게 된다. 그래도 우리는 그냥 멀리 간다. 그냥, 비행기나 기차나 배 같은 걸 타야 직성이 풀릴 때가 있으니까.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 계획이 있느냐, 현실을 생각해라, 얼마나 모을 거냐, 10년 내로는, 구체적으로 객관적으로 이성적으로... 세상엔 이런 칙칙한 말들이 폭우 내린 날 맨홀 뚜껑처럼 넘쳐난다. 난 단지 좀 예쁜 신발을 신고 멀리 나가보려 했는데, 그런 광경을 마주치면 장화를 꺼내 신을 수밖에 없다. 아무래도 장화로는 멀리까지 걷기 힘들다.


그러니 멀어야 한다. 그건 그냥의 신이 시키는 일이다. 모든 신은 뭔가를 시킬 때 길게 말하는 법이 없고 우리는 티켓을 끊는다. 멀리 떠나는 건 기도할 때 손 모으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가능하면 아득할수록 좋겠다. 머리 따위가 여기 끼어들기엔 아직 한참 이르다. 생각이 복잡하고 명치가 무거워서 훌쩍 떠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해결되는 건 하나도 없겠지만, 돌아오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무언가 달라져 있다.


그냥이라는 말이 번역되고 정의되고 해설될 날이 올까. 가능하다 해도 그건 마치 아침숲을 실험실에서 재현하는 일이랑 비슷할 것 같다. 참 억지스러운 일이겠다. 진짜 아침숲의 거미는 동그랗고 자연스럽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거미줄로 도형을 그린다. 이슬은 그냥 거기 맺히고 그냥 떨어진다. 사람들이 그냥 멀리 가는 이유도 똑같지 않을까. 자연스러운 그 모든 일들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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