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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기자의 긁적끄적 Mar 24. 2021

그냥 멀리 가는 마음

아침숲의 거미같이


우리 머리는 온갖 것을 할 수 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그냥'을 넘어서진 못한다. 그냥은 말하자면 설명불가능한 어휘 아닐까.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일을 그냥 좋아서 밤새 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말 좋아하는 건 그냥 좋다. 충만한 순간은 그냥 충만하다. 그냥은 그냥 거기에 놓여 우리를 지배한다.


아주 멀리 훌쩍 떠나는 마음도 꼭 그렇다. 멀리 간다고 우리가 뭔가 특별한 걸 하는 건 아니다. 맛집은 우리 동네에도 있다. 산이나 바다 같은 것도 마음만 먹으면 금방 본다. 생경한 동네라도 오래 지내보면 사람 사는 거 거기서 거기라는 것만 알게 된다. 그래도 우리는 그냥 멀리 간다. 그냥, 비행기나 기차나 배 같은 걸 타야 직성이 풀릴 때가 있으니까.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 계획이 있느냐, 현실을 생각해라, 얼마나 모을 거냐, 10년 내로는, 구체적으로 객관적으로 이성적으로... 세상엔 이런 칙칙한 말들이 폭우 내린 날 맨홀 뚜껑처럼 넘쳐난다. 난 단지 좀 예쁜 신발을 신고 멀리 나가보려 했는데, 그런 광경을 마주치면 장화를 꺼내 신을 수밖에 없다. 아무래도 장화로는 멀리까지 걷기 힘들다.


그러니 멀어야 한다. 그건 그냥의 신이 시키는 일이다. 모든 신은 뭔가를 시킬 때 길게 말하는 법이 없고 우리는 티켓을 끊는다. 멀리 떠나는 건 기도할 때 손 모으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가능하면 아득할수록 좋겠다. 머리 따위가 여기 끼어들기엔 아직 한참 이르다. 생각이 복잡하고 명치가 무거워서 훌쩍 떠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해결되는 건 하나도 없겠지만, 돌아오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무언가 달라져 있다.


그냥이라는 말이 번역되고 정의되고 해설될 날이 올까. 가능하다 해도 그건 마치 아침숲을 실험실에서 재현하는 일이랑 비슷할  같다.  억지스러운 일이겠다. 진짜 아침숲의 거미는 동그랗고 자연스럽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거미줄로 도형을 그린다. 이슬은 그냥 거기 맺히고 그냥 떨어진다. 사람들이 그냥 멀리 가는 이유도 똑같지 않을까. 자연스러운  모든 일들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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