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람기자의 긁적끄적 Sep 28. 2022

나는 내 안전함이 어쩐지 미워져서

창 밖의 재난

그날 저녁 하늘은 먹색의 거대한 샤워기처럼 콸콸댔다. 퇴근길에 쏟아진 폭우를 간신히 온몸으로 헤치고, 집 앞 처마에서 우산을 털며 생각했다. ‘오늘도 누군가 죽을 것 같네.’ 한줄 문장을 읽는 머릿속 음성이 높낮이 없이 덤덤해서 섬찟했다.


지난 8월 10일 집중호우로 산사태가 발생한 경기 광주 남한산성면 검복리 마을의 한 피해 주택에 고양이가 앉아 있다. 경향신문 문재원 기자

흠칫한 문장이 평서체로 예고도 없이 떠오르게 된 건, 고용노동부를 출입하면서 매일 일어나는 중대재해 사망 소식에 익숙해졌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며칠 치 폭우가 한꺼번에 쏟아진 그날. 전날 가로수 점검 작업을 하다 감전돼 숨진 노동자와 공사현장에서 역시 감전돼 사망한 노동자, 한주 전 비 오는 날 유명가수의 무대장치를 철거하다 숨진 노동자의 소식도 한꺼번에 머릿속에 쏟아져 내렸다.


퇴근길 내내 생각했다. 왜 폭우가 퍼붓는데 전기 흐르는 곳에 사람을 보내지? 젖어서 미끄럽고 높은 철골에 왜 올려보내지? ‘왜’를 계속하다가 그만두었다. 우리는 이미 답을 알면서 자꾸 왜라고 말한다. 믿기 싫어서일까. 그 모든 비참이 엄연한 사실이라고 인정하면 스스로를 혐오할 수밖에 없게 되리란 생각에서일까. 그런 생각을 하던 중, 차가 물에 잠긴 배송기사에게 “되는 곳부터 배달하라”고 지시한 중간관리자의 메시지를 하필이면 보고 말았다.


일하다 죽게 하지 말자며, 그게 말이나 되냐며 사람들은 장마처럼 울었다. 한철의 슬픔이 아니었다. 오래됐고, 반복됐다. 비극은 그때마다 빗물처럼 낮은 곳으로 흘러 고였다. 마치 자연법칙이라도 되는 듯이. 한가족의 반지하 집을 집어삼킨 그 흙탕물처럼.


빗물만이 아니다. 이 글을 쓰기 전에 나는 맑은 하늘 땡볕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기사를 썼다. 올해 7월 중대재해법을 적용받는 일터에서 23명이 숨졌고, 절반 정도는 건설현장이었다. 노동부도 폭염을 원인의 하나로 지목했다. 뜨겁게 맑은 날이나 궂은 폭풍의 날이나, 나는 하늘을 보며 ‘오늘도 누군가 죽을 것 같다’는 문장을 되뇌게 됐다.


동화 속의 해와 구름은 나그네의 외투를 먼저 벗기겠다며 경쟁했다. 현실에서 해와 구름은 사람을 죽이고 있다. 다시 쓴다. 태양과 비구름이 으르렁대는 아래로 사람을 자꾸 내보내고 밀어넣는 건 늘 다른 사람들이었다. 폭염이나 물폭탄이나 땅에 닿기 직전까진 모든 곳에 공평하지만, 사람들은 지상에 가파른 경사를 만들었다. 비현실 같은 죽음의 반복 앞에서, 기자답지 않게 문장이 자꾸 관념적으로만 적힌다.


누군가는 뾰로통하게 묻는다. “그래서 해결책이 뭔데,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대안이 뭔데?” 이렇게 답할 수밖에 없다. 우리 세상에 그런 게 부족했냐고. 차고 넘치지 않았냐고. 결정적으로 부족한 건 언제나 하나였고, 그 이야기를 하면 당신들은 완고한 입술로 ‘법과 원칙’이나 ‘공정’ 같은 것들을 이야기하지 않았냐고.


그런 생각을 하며 우산을 털고 비가 새지 않는 안전한 집에 들어왔다. 컨테이너 숙소를 덮친 폭우에 누군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창밖의 재난은 그칠 줄 몰랐고, 나는 나를 안전하게 만든 것들을 조금 미워하게 됐다.


이 글은 <주간경향> 1491호(2022.08.22)에도 실렸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뭐라고, 맡겨둔 듯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