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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기자의 긁적끄적 Jun 21. 2022

내가 뭐라고, 맡겨둔 듯이

무슨 취재영장이라도 받았냐구

취재라는 게 참 못 할 짓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비극을 겪은 사람의 이야기를 어떻게든 들어야 할 때 주로 그렇다. 고통을 미처 씻지도 못한 A씨를 수차례 설득해 만난다. 어렵사리 카페에 나온 그는 밝은 음악과 예쁜 커피잔을 견디는 것조차 힘겨워 보인다. 그런 그의 상처를 헤집고 어떻게든 아픈 기억을 끄집어내야 한다. “힘드시겠지만….” 제일 힘든 사람 앞에서 나는 입을 뗀다. 최대한 예의를 갖추려 해도 질문 자체가 이미 실례인 듯하다. 어렵게 답변이 나오면 질문이 다시 꼬리에 꼬리를 문다.


울산에 정착한 아프가니스탄 특별기여자 하피즈씨 자녀의 한국 학교 교복. 한수빈 기자


참 익숙해지지 않는 일인데, 슬프게도 일이라 천천히 적응해가고 있음을 느낀다. 기자도 결국 직장인이니 당연한 걸까. 반복할수록 덤덤해진다. 그렇게 ‘업무’가 돼간다. 슬픈 일을 들려줄 취재원이 간혹 취재에 응하지 않기도 한다. 이해는 하지만 어딘가 아쉽다는 생각이 고개를 든다. 눌러뒀던 갑갑함도 뾰족 솟아오른다. 슬픔을 다시 마주해야 하는 고통이 버거워 머뭇거리는 사람을 앞에 두고 나는 기사가 엎어질까를 염려한다. 마감까지 시간은 충분할까 이기적인 속셈을 시작한다. ‘말을 안 해주니 야속하다’는 못된 생각도 불쑥 끼어든다. 내가 뭐라고, 맡겨둔 듯이. 뭐라도 된 것처럼 꼬치꼬치 캐묻고 있다.


기자가 무슨 벼슬도 아니고 명함이 무슨 자격증일 리도 없다. ‘취재영장’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인이나 관청의 공보담당들이야 취재에 응해야겠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기자의 질문에 답해야 할 의무가 없다. 내밀하고 아픈 기억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너무 자주 취재영장을 발부받은 양 굴지는 않았나 생각하니 부끄러워진다.


부끄러움이 찾아들 때면 그간 썼던 기사를 천천히 되돌아보곤 한다. 그 기사들을 쓸 수 있도록 해준 이들이 한명씩 떠오른다. 당신의 이름과 얼굴과 이야기를 온 세상 사람들 앞에 꺼내달라는 제안에 어려운 결심을 해줬던 이들이다. 아픈 기억을 다시 마주보고 들려준 그 용기가 얼마나 높고 귀한지 새삼 깨닫는다. 최근 울산에 정착한 아프가니스탄 특별기여자들을 만났을 때 그랬다. 아이들은 행복하게 웃고 있었지만, 아직도 그들의 귀엔 AK-47의 총소리가 이명처럼 남아 있으리라. 무슬림을 향한 일부 한국인의 따가운 시선도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하피즈씨는 처음 보는 기자에게 집을 열어주고 카메라에 자신의 얼굴을 드러냈다. 탈레반의 공포와 살얼음판 같은 탈출, 한국에서 겪은 일들을 자세히 들려줬다. 쉬웠다고는 할 수 없는 섭외 과정에서 느낀 초조함과 얕은 ‘속셈’들이 순간 무색해지고 말았다.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그런 용기를 냈을지 짐작만 할 뿐 감히 속속들이 알 수는 없다. 단지 그들에 앞서 만난 다른 이들, ‘홈리스 보호종료아동’들이나 여러 피해자, 유족들의 얼굴을 함께 떠올려볼 뿐이다.


독자분들께도 이 지면을 빌려 말하고 싶다. 오늘 당신이 본 기사는 평범한 사람들이 용기를 내준 덕분에 탄생한 결과물에 가까울지 모른다고. 특히 서럽고 아픈 이들의 말을 담은 이야기라면 한 번 더 찬찬히 읽어봐 주면 좋겠다고. ‘기꺼이’보다는 ‘망설이다가’가, ‘선뜻’보다는 ‘어렵게’가 더 많이 붙는 이야기들이야말로 가장 높은 용기와 무거운 진실을 품고 있으며, 어쩌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이야기라고 믿어서다.


이 글은 <주간경향> 1479호(2022.5.30)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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