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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기자의 긁적끄적 Jun 11. 2022

오락실 3층엔 '고인물'들이 있지

삐융삐융

지난 주말에는 오랜만에 오락실에 놀러갔다. 게임에 영 젬병이라 자주 찾지는 않지만, 무작정 신나고 싶은 날엔 그래도 오락실만 한 곳이 없다. 번화가 한복판 3층짜리 대형 오락실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쿵작쿵작 신나는 음악을 배경으로 오락기들이 ‘삐융삐융’ 소리를 얹고, 여기저기서 ‘타다다다’ 버튼 갈기는 소리가 흥을 돋우었다. 질세라 열심히 농구공을 던지고 카레이싱을 했다. 점수는 썩 높지 않았지만 뭐 어떠랴. 즐거웠으면 된 것 아닐까.


Gettyimages


이 오락실은 게임만큼이나 각 층의 구성도 재미있었다. 3층 건물의 1층은 인형뽑기와 농구 등 비교적 가벼운 게임코너였다. 2층엔 카레이싱, 숨은그림찾기 등 조금 실력과 집중력을 요하는 게임들이 있었다. 여기까지는 그나마 ‘인간계’에 있는 느낌이었는데, 리듬게임 위주인 3층에 올라가자마자 공기가 달라졌다. 한눈에도 초고수로 보이는 이들이 빛의 속도로 버튼을 연타하고 있었다. 그들의 플레이는 오락이라기보다는 전투, 아니 ‘학살’이었다. 리듬 막대들은 그들의 속사에 맥없이 스러져갔고, 화면 속에는 연속으로 리듬을 맞췄을 때 뜨는 ‘콤보’가 빼곡했다.


3층의 그들처럼 한 분야에 오래 천착한 마니아들을 인터넷 유행어로 ‘고인물’이라 부른다. 주로 게임 고수들을 일컫는데, 특히 리듬게임은 고인물이 많기로 유명하다. 여러 게임에 두루두루 재능을 보이는 이들은 꽤 있다. 하지만 리듬게임 마니아들은 유독 그 분야에 구도자적 자세로 천착하는 것 같다. 리듬게임이 그만큼 좋아서 푹 빠진 것일지 모른다.


게임과 현실은 다른 걸까. 고인물이라는 단어를 보면 종종 대학 시절이 떠오른다. ‘융합’ 바람이 전국 대학가를 휩쓸던 때였다. 4차 산업혁명 담론과 맞물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 우물만 파다간 도태된다는 이유로 인문학과 공학, 예술과 경영학… 무엇과 무엇을 자꾸 합쳤다. 국문과와 전자전파공학과를 합쳐 ‘웹툰창작학과’를 만들자는 한 대학 부총장의 황당한 발언도 돌았다. 고집 있는 장인이 몰락하는 내용의 자기계발서 광고들을 본 것도 이때쯤이었다. 요즘은 더 심해진 것 같다. 코딩과 인공지능 과목이 필수 교양이 됐고, 심지어 초등학생들도 이를 의무적으로 배운다니 말이다.


‘코딩 잘하는 인문학도’나 ‘인문학 좀 아는 프로그래머’도 물론 중요하다. 다만 꼭 모두에게 융합을 강요하며 겁을 줄 필요가 있을까. ‘코딩 고인물’, ‘문학 고인물’, ‘로봇공학 고인물’도 역사를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은 왜 하지 않을까. 교육에서의 융합 담론은 대개 산업적 필요와 밀접하게 닿아 있다. 그 필요를 위해 모든 것을 융합하는 사이, ‘쓸모’와 관계없이 자기 분야를 파려는 고인물들은 뒷전으로 밀려나는 것 같아 씁쓸하다.


“호모 컨버전스(융합형 인간)만이 살아남는다”는 무서운 말보다는 “호모 컨버전스도, 호모 고인물도 각자 장점이 있다”는 말이 더 많은 세상에 살고 싶다. 그런 세상은 말하자면 3층짜리 오락실 같은 곳이다. 만능 게이머도 리듬게임 고인물도 똑같이 재밌는, 그런 곳에선 나처럼 게임을 못 하는 ‘뉴비’조차 즐겁다. 쏟아지는 리듬 막대에 긴장해서 헛버튼만 누르다 왔지만 뭐 어떠랴. 사는 것도 오락도, 재미있으면 되는 것 아닐까.


이 글은 <주간경향> 1472호(2022.04.11)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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