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봉투법 싸움을 보며
얇고 노란 봉투 한 장에는 무엇이 담길 수 있을까.
2013년 12월, 시사주간지 <시사in> 편집국에 노란 봉투 한 장이 도착했다. 서른여덟살의 배춘환씨가 보낸 편지였다. 대량해고에 반발하며 절벽 끝에 서는 마음으로 파업을 벌인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에게 법원이 47억원의 손해배상을 선고한 즈음이었다.
“해고노동자에게 47억원을 손해배상하라는 이 나라에서 셋째를 낳을 생각을 하니 갑갑해서 작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하고 싶어서입니다.”
배씨의 노란 봉투에는 편지와 함께 47,000원이 들어 있었다. 손해배상에 내몰린 노동자들의 자녀들이 걱정된다고, 그러니 10만명이 같은 마음으로 편지를 보내자고 배씨는 제안했다. 배씨의 마음에 수많은시민들이 호응하며 2014년 ‘노란봉투 캠페인’이 시작됐다.
만원짜리 지폐 4장과 천원짜리 지폐 7장. 배씨의 얇고 노란 봉투 한 장에 담긴 건 그게 전부였다고 누구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뭐였을까. 무엇이 들어있었길래 노란봉투는 9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세상에 소환되는 걸까.
명쾌하게 말할 수가 없다. 다만 생각할 뿐이다. 그 봉투안에는 무엇이 있었길래 수많은 이들이 그렇게 울고, 거리에서 굶고, 쓰러지고, 가슴을 찢고, 좌절하고, 절망의 끄트머리까지 갔다가 다시 일어서고, 또 모이고, 믿고, 꿈꾸고, 목소리를 내었나. 9년이라는 시간은 온 몸을 할퀴고 부러뜨렸을 텐데, 끝내 얇은 봉투 한 장을 대통령 앞까지 들이밀 수 있게한 그 힘의 이름은 무엇일까.
얇고 노란 그 봉투를 사람들은 왜 버리지 못했을까. 2003년 배달호의 죽음부터 김주익을 거쳐 쌍용차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까지, 그 많은 목숨이 연달아 사라지고 남겨진 이들까지 매일 짓밟혔으면서도. 그 얇은 봉투 안에 도대체 무엇이 있길래. 대기업 빌딩에서 내려다보면 그저 티끌 같을 하청노동자들이, 노동자로 대우받지도 못한 특수고용노동자들이, 밀리고 밀리다 파업을 선택한 저 작은 노동자들이, 무엇의 힘으로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살자’고 외칠 수 있었을까.
무엇이 있었길래 그 많은 이들이, 두려움에 다리를 떨면서도 기어코 조금씩이나마 앞으로 걸을 수 있었을까. 생산이 잠시 멈췄다는 이유로 눈먼 칼춤을 추며 사방에 피를 흩뿌리는 저 거대한 괴물들 앞에, 폭력집회 불법파업 귀족노조 빨갱이라며 두들겨대는 언론과 정치인들의 독 바른 비수 같을 말들 앞에, 도망친다고 누구도 탓하지 않을 텐데도.
권력의 꼭대기에 앉은 대통령은 노란봉투법을 거부했다. 그는 아마 평생 모를 것이다. 얇고 노란 봉투 안에는 결코 거부되지 않는 그 무엇이 있다는 걸. 포악한 세계가 꺾고 무너뜨리기 위해 수없이 시도했어도 단 한 번도 굴복시키지 못한 것이 있다는 걸. 법안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고들 말하지만, 원점의 위치는 조금씩 움직였다는 걸.
모르기로 하면 누구나 모를 것이다. 그래서 다시 애써 기억하려 한다. 사람의 뜻이라는 것이 어떻게 두꺼운 시간을 뚫고 앞으로 몸을 밀어나가는지를. 사람과 사람 아닌 것의 싸움에서 끝내 지지 않는 쪽은 어디일지를.
이 글은 한국노총 전국공공산업노동조합연맹 노보 <공공노동자> 14호(2023.12)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