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서로에게 건네야 할 한 줌의 온기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1학년. 그때의 저는 세상이 갑자기 넓어지는 듯한 설렘과, 발끝이 저릴 만큼의 긴장을 동시에 품고 있었습니다. 처음으로 ‘학교’라는 낯선 공간으로 들어가던 그날, 학교 운동장은 여태껏 본 적 없는 아이들로 꽉 차 있었습니다. 어디서 그렇게 몰려왔는지, 마치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그 작은 운동장으로 모여든 것만 같았죠. 반편성이 끝나자, 앞에 서 있던 친구의 옷자락을 꼭 잡고 줄을 따라 교실로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수업이라는 또 다른 세계가 조용히 열렸습니다.
그리고 난생처음 ‘짝지(짝궁)’가 된 내 친구. 원래 남녀 짝으로 편성되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여학생 수가 모자라 결국 우리 둘만 남자 짝으로 남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유독 금세 친해졌고, 서로에게 초등학교 시절 가장 소중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훌쩍 흐른 뒤, 그 친구와 다시 마주한 곳이 하필 부산 OO경찰서 유치장일 줄은 몰랐습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그는 소위 ‘일진’이 되었고, 친구들을 괴롭히고 돈을 빼앗다 결국 퇴학을 당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에서 대학 진학을 준비하고 있을 무렵, 그는 이미 지역의 불량배들과 어울려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패싸움에 휘말렸고, 폭력 혐의로 유치장에 들어가게 된 것이었죠.
친구의 어머니는 어떻게든 아들을 바른 길로 돌리고 싶어 애쓰셨지만, 상황은 이미 손쓸 수 없을 만큼 악화되어 있었습니다. 결국 여러 경로로 도움을 청하던 끝에 제게까지 연락이 닿았습니다. 소식을 들은 저는 망설임 없이 친구를 돕고 싶다는 마음뿐이었습니다.
저는 당시 부산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계셨던 아버지께 조심스레 부탁을 드렸습니다.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였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그를 어떻게 평가하든, 제게 그는 여전히 소중한 ‘친구’였습니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거칠고 사나운 아이였을지 몰라도, 제 앞에서는 한없이 속이 여린 친구였으니까요. 어떻게든 그에게 다시 한번 바른 길로 돌아올 기회를 주고 싶었습니다.
다행히 아버지의 도움으로 피해자와 원만한 합의가 이루어졌고, 그는 평생을 후회할 뻔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아버지의 고교 동창이 운영하던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고, 시장에서 채소를 파는 장애인 부모님과 동생들을 돕기 위해 새 삶을 이어갔습니다. 야학에 다니며 공부도 다시 시작했습니다.
한편 저는 서울에서 대학 생활을 이어가던 중 학생운동에 휘말리며 시국 사건에 연루되고 말았습니다. 권력의 방향이 바뀌면서 아버지의 도움도 아무런 힘을 쓰지 못했고, 결국 저는 강제 징집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입대하기 전날, 마지막으로 함께 소주 한 잔을 기울였습니다. 제 머리를 직접 밀어주며 눈물을 흘리던 친구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날이 우리 둘의 마지막 순간이었습니다.
제가 군 복무를 하는 동안, 친구는 여전히 잘못 붙은 꼬리표 때문에 대인관계와 일상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합니다. 결국 그는 외항선에 승선하면서 해외로 떠났습니다. 제대 후 부산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친구의 부모님도 어디론가 이사를 가셨고, 그 이후로 친구와 다시 만날 기회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믿습니다. 어딘가에서, 어쩌면 저처럼 대한민국 하늘이 아닌 어느 타국 땅에서, 그는 자기만의 올바른 방식으로 잘 살아가고 있으리라는 것을.
■ 절망 속에서 피어난 기이한 만남의 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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