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소나의 일기』 3부

강물처럼, 나는 흐른다

by Itz토퍼

은퇴 후의 어느 봄날, 나를 돌아보며



퇴직 후 첫 봄이었다.


손자 녀석이 수채화 물감을 가지고 놀다 엎질러 놓은 것처럼, 마당의 꽃들이 제멋대로 피어 있었다. 나는 오전 내내 할 일이 없다.


38년 동안 매일 아침 여섯 시에 울리던 알람 소리가 없는 아침은, 처음에는 낯설다 못해 두려웠다. 눈을 떠도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와이셔츠를 꺼내 입을 필요도, 넥타이를 고를 필요도 없었다. 그 자유가 해방감이 아니라 공허감으로 먼저 찾아왔다는 것을, 퇴직 전의 나는 미처 몰랐다.


그날 오래된 앨범을 꺼내 넘기다가 문득 멈췄다.


빛바랜 사진 속의 아이. 다섯 살쯤 되었을까, 까무잡잡한 얼굴에 무릎이 까진 채로 해맑게 웃고 있는 그 아이가 정말 나였을까. 그 아이는 지금의 나와 같은 사람인가. 이제 무릎이 시큰거리고,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하고, 손가락 마디마다 세월의 흔적이 새겨진 이 노인이, 정말 저 아이와 같은 '나'인가.


한참을 멍하니 그 사진을 들고 앉아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눈이 이리도 시릴까.


변한 것들, 변하지 않은 것들


몸은 확실히 변했다. 20대에는 밤새 술을 마셔도 이튿날 멀쩡했는데, 요즘은 커피 한 잔을 오후 늦게 마시면 밤에 잠을 못 이룬다. 무릎 연골이 닳았다고 했을 때, 나는 잠시 내 몸이 남의 것처럼 느껴졌다. 계단을 오를 때마다 삐걱이는 무릎 소리가 남의 집 문 여닫는 소리처럼 낯설었다.


생각도 변했다. 30대에는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았고, 40대에는 회사를 바꿀 수 있을 것 같았고, 50대에는 부서라도 바꿔 보려 했는데, 60대인 지금은 그냥 오늘 하루를 잘 살면 된다는 생각밖에 없다.


이것을 체념이라 불러야 할까, 아니면 성숙이라 불러야 할까.


젊은 날에는 그 질문조차 하지 않았다. 그냥 달렸으니까. 앞만 보고 달리면 뭔가 될 것 같았으니까. 새벽에 출근해서 밤늦게 퇴근하는 것이 성실함의 증거라 믿었고, 주말에 가족과 함께하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 여겼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Itz토퍼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삶의 향기를 나만의 색으로 물들이며, '나답게' 걸어가는 글무리 작가 Itz토퍼입니다. 오늘도 작은 위로와 사유의 빛을 담아, 나만의 이야기를 조용히 써 내려갑니다.

272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최근 30일간 36개의 멤버십 콘텐츠 발행
  • 총 244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
이전 12화『페르소나의 일기』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