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데이터로 읽는 직장인의 마음
AI가 내 업무를 대신하게 되면,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는 사람이 되는 걸까.
한국 직장인 절반이 이런 불안을 안고 출근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휴넷이 직장인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에서 49.5%가 고용 환경에 불안을 느낀다고 답했고, 그 핵심 요인으로 많은 이들이 'AI 및 자동화 기술 확산(34.1%)'을 지목했습니다 [7].
흥미로운 것은 이 불안이 '현재 자리를 지키겠다'가 아닌, '성장할 수 있는 곳으로 움직이겠다'는 방향으로 표출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리멤버컴퍼니가 직장인 1만여 명에게 이직 시 가장 중요한 기준을 물었더니, 연봉(20.7%)이 아닌 '커리어 성장 가능성'(43.8%)이 1위였습니다 [8].
'생존 이직'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할 만큼, 직장인들에게 이직은 더 나은 조건이 아닌 장기적 생존의 수단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왜 직장인들은 불안할수록 '성장'에 매달리는 걸까요? 이 질문에 답하려면, 우리가 회사와 맺는 보이지 않는 약속 하나를 들여다봐야 합니다.
글을 읽고 계신 지금, 처음 회사에 입사하던 때가 혹시 떠오르시나요? 신입이나 경력이나, 새로운 회사에 입사할 때 우리는 연봉, 복지, 직책 같은 조건으로 근로계약서를 작성합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문서화되지 않은 더 중요한 약속이 존재합니다.
"이곳에서 성장할 수 있을 거야", "회사는 나의 기여를 인정해 줄 거야."와 같은 약속 말입니다. 조직심리학에서는 이를 심리적 계약(Psychological Contract)이라 부릅니다 [1].
과거 이 계약의 핵심은 '고용 안정'이었습니다. 직원의 충성 대가로 조직이 안정적 고용과 승진을 약속하는 교환이었죠. 하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 이 약속은 '고용가능성(Employability)', 즉 어디서든 통용될 수 있는 기술과 경력 성장 기회를 제공하는 것으로 옮겨갔고 [9], 2020년대에 들어서는 자율성, 일의 의미, 조직의 사회적 가치까지 그 범위가 확장되었습니다 [10].
앞선 설문에서 직장인들이 연봉보다 성장을 택한 것 역시 이러한 심리적 계약의 변화를 반영합니다. 문제는 이 '새로운 약속'마저 현실에서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최근 갤럽에 따르면 전 세계 직장인의 23%만이 업무에 몰입하고 있으며, 62%는 '조용한 사직' 상태입니다 [2]. 가트너 역시 조직의 변화를 지지하는 직원의 비율이 74%에서 43%로 곤두박질쳤다고 보고합니다 [3].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HBR)가 사무실 복귀(RTO)를 둘러싼 노사 갈등을 심리적 계약 붕괴의 상징적 단면으로 지적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6].
특히 AI 기술의 확산은 이미 금이 간 심리적 계약에 치명타를 가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알고리즘 불안(Algorithmic Anxiety)'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공포입니다 [4].
내가 하던 업무가 AI로 대체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물론, 나의 성과를 알고리즘이 평가하게 될 것이라는 낯선 경험은 직원들의 정체성을 흔듭니다. 2026년 발표된 한 연구에 따르면, AI와 관련된 온라인 담론에서 '깨진 신뢰', '정체성 침식' 등 부정적 감정이 51%에 달했습니다 [4]. 직원들은 비인간적 존재에 의해 평가받고 대체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알고리즘에 의해 배신당했다"는 독특한 소외감을 느낍니다.
이렇게 심리적 계약이 위반되었다고 느끼면 직무 만족도와 조직 몰입도는 급감하고 이직 의도는 치솟습니다. 이는 2007년 자오(Zhao) 등의 메타분석 연구에서도 이미 명확히 입증된 사실입니다 [5].
과거에 통용되던 '보이지 않는 약속'은 수명을 다했습니다. AI 시대의 리더는 단순한 성과 관리자를 넘어, 무너진 신뢰를 복원하는 '계약의 설계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다음 세 가지 약속을 조직에 새롭게 이식해야 합니다.
평생직장이 사라진 시대, 직원들을 붙잡아 두는 힘은 역설적으로 '이곳을 떠나도 경쟁력 있는 인재로 만들어 주겠다'는 약속에서 나옵니다. 단순히 기존 업무를 가르치는 것을 넘어, AI와 협업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기술과 경험을 쌓도록 지원해야 합니다.
AI 기반의 성과 측정이 보편화될수록 직원들은 평가 기준에 의문을 품습니다. 어떤 데이터와 알고리즘으로 평가가 이루어지는지 '블랙박스'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AI가 인간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돕는 도구임을 명확히 하여 불안감을 해소해야 합니다 [4].
중요한 것은 단순히 근무 시간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일할 것인가'에 대한 통제권을 직원에게 돌려주는 것입니다. 명확한 목표를 제시하되, 달성 방식에 있어서는 최대한의 자기결정권을 부여하는 것이 새로운 신뢰의 출발점입니다.
심리적 계약은 한 번 깨지면 회복하기 어렵지만, 끊임없이 재협상되고 재정의될 수 있는 '살아있는 유기체'이기도 합니다.
지금, 당신의 조직에서 직원들이 믿고 있는 '보이지 않는 약속'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그 약속은 AI 시대인 지금도 여전히 유효할까요?
알고리즘 불안의 시대를 건너는 진정한 해법은, 어쩌면 기술 그 자체보다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새로운 신뢰를 구축해 나가는 리더의 노력에서 시작될지도 모릅니다.
[1] Rousseau, D. M. (1995). Psychological contracts in organizations: Understanding written and unwritten agreements. Sage Publications.
[2] Gallup. (2024). State of the Global Workplace 2024 Report.
[3] Zhexembayeva, N. (2024, June 25). Constant Change Is Rewriting the Psychological Contract with Employees. Harvard Business Review.
[4] Shekhar, A., & Saurombe, M. D. (2026, February 17). Algorithmic anxiety: AI, work, and the evolving psychological contract in digital discourse. Frontiers in Psychology, 17. https://doi.org/10.3389/fpsyg.2026.1745164
[5] Zhao, H., Wayne, S. J., Glibkowski, B. C., & Bravo, J. (2007). The impact of psychological contract breach on work-related outcomes: A meta-analysis. Personnel Psychology, 60(3), 647–680.
[6] Fayard, A., & Weeks, J. (2025, May 6). The Workplace Psychological Contract Is Broken. Here's How to Fix It. Harvard Business Review.
[7] 휴넷. (2025, 9월 22일). 직장인이 생각하는 2026 사업계획과 전망 설문조사. 서울경제. [8] 리멤버앤컴퍼니. (2025, 8월 14일). 경력 이직 인식 조사: 직장인 1만 618명 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