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만 하던 사람이 쓰기 시작한 이유

[시리즈] 개인 에세이

by 테오
image.png 출처: 나노바나나로 제작


남은 것은 130개의 하이라이트 뿐이었습니다


최근, 쇼펜하우어의 『독서에 대하여』를 읽으며 밑줄을 친 문장만 무려 130개였습니다. 읽는 내내 ‘이건 꼭 기억해야 해’라며 감탄했던 횟수입니다. 그런데 책을 덮고 2주 정도 지나자, 머릿속에 남은 문장은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이라이트는 남았지만, 저의 생각은 남지 않은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이 반복되면서, 그때 깨달았습니다. 나는 그동안 책을 '읽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단순히 활자를 '수집'하고 있었구나.




수집가의 착각: 아는 것은 많아졌지만, 생각은 멈췄다


저는 활자를 소비하는 것을 참 좋아합니다. 아티클, 논문, 뉴스레터부터 팟캐스트 요약본까지 흥미로운 정보를 발견하면 일단 저장부터 합니다. Readwise Reader로 하이라이트를 치고, 옵시디언(Obsidian)과 노션(Notion)에, AI를 활용하여 체계적으로 분류해 둡니다. 그렇게 모인 노트가 어느덧 아티클 하이라이트만 5천 개를 훌쩍 넘겼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역설이 벌어졌습니다. 아는 것은 분명 많아졌는데, 스스로 생각하는 힘은 오히려 줄어든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요즘 AI가 일자리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라고 물었을 때, 저는 제 언어로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대신 알고 있는 것을 하나 둘 떠올리며 열심히 설명했죠. "아, 그거 최근에 어디서 연구가 나왔는데..." 이렇게 '나의 생각'이 아니라 '남의 생각'을 앵무새처럼 전달하는 전달자에 가까웠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전달을 더 잘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새로운 정보들을 가리지 않고 읽고, 하이라이트 하기 바빴습니다.


그러던 중, 자녀들과 함께 방문했던 서점에서 우연히 쇼펜하우어의 『독서에 대하여』라는 책을 발견했고, "독서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타인에게 맡기는 셈이다."라는 문장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사색가와 수집가의 차이: 출발점이 '나'인가, '타인'인가


쇼펜하우어는 사람을 '사색형 인간''독서형 인간' 두 부류로 구분합니다. 독서형 인간은 여러 책에서 남의 소재를 빌려와 자신의 체계를 구성합니다. 남이 써둔 여행 안내서를 열심히 읽고 아는 척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반면 사색형 인간은 먼저 자신의 생각을 단단히 정립한 뒤, 타인의 글로 그 생각을 보강합니다. 실제로 그 낯선 도시에 발을 딛고 살아본 사람과 같습니다.


이 차이의 핵심은 단 하나, 생각의 출발점이 ‘나’인가, ‘타인’인가 하는 점입니다.


오늘날 이 구분은 더욱 날카롭고 서늘하게 다가옵니다. 생성형 AI에 질문을 던지면 3초 만에 세상의 모든 지식이 정제된 답으로 출력됩니다. 정보 수집의 한계 비용이 '0'에 수렴하는 시대, 그저 정보를 잘 모으고 요약하는 능력의 가치 역시 '0'에 수렴할 수밖에 없습니다.


AI 시대에 인간에게 남는 최후의 경쟁력은 단 하나입니다. 입력된 정보를 자기 안에서 치열하게 소화하고, 자신만의 언어로 재구성해 내는 힘. 책에 나온 영국의 시인 알렉산더 포프의 뼈아픈 일침이 가슴을 찌릅니다. "쓰는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래서 쓰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글을 쓰기로 결심한 것은 대단한 작가가 되거나, 개인 브랜딩을 통해 유명해지고자 함이 아닙니다. 수집이라는 안전한 울타리를 넘어, 한 발짝 더 나아가기 위한 시도입니다.


읽은 것을 내 언어로 다시 써 내려가는 순간, 비로소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어디를 이해하지 못했는지가 투명하게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꼭 기억해야지라고 생각하며 하이라이트 했던 내용 중에서 내 입으로 설명할 수 있는 진짜 지식은 몇 개나 되는지 민낯을 마주하게 됩니다. 글쓰기는 그 자체로 훌륭한 사색의 도구이며, 머릿속을 부유하는 흐릿한 상념들에 뚜렷한 윤곽을 부여하는 작업입니다.


쇼펜하우어는 글 쓰는 사람을 세 부류로 나누었습니다. '생각하지 않고 쓰는 사람', '쓰면서 생각하는 사람', 그리고 '쓰기 전부터 이미 생각해 온 사람'. 솔직히 저는 아직 두 번째에 가깝습니다. 빈 화면을 마주하고 타자를 치며 비로소 생각이 정리되곤 하니까요. 하지만 괜찮습니다. 직접 쓰지 않았다면 그 어설픈 정리조차 영영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요.




진짜 알맹이를 가진 사람이 되기 위하여


지금까지 직장이나 학계에서 뵈었던 분들 중, ‘이 사람 정말 알맹이가 단단하다’고 느꼈던 분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얕고 넓게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화두를 깊게 파고든 사람들이었습니다. 유행하는 키워드를 허겁지겁 쫓는 대신, 유행하는 키워드 가운데에도 자신만의 질문을 붙잡고 몇 년째 묵묵히 답을 찾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말에는 묵직한 힘이 있습니다. 책에서 읽은 그럴듯한 문장을 인용하는 대신, 오랜 시간 자신의 내면에서 발효된 진짜 문장을 꺼내놓기 때문입니다. "학자와 박식한 사람은 책을 많이 읽은 이들이다. 하지만 사상가, 세상에 빛을 가져오고 인류의 진보를 이끄는 사람은 '세계'라는 책을 직접 독파한 사람이다"라는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말입니다.


제가 세상을 바꿀 거창한 천재가 되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어디서 읽은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생각한 것'으로 대화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제가 이 브런치를 시작한 이유입니다.


AI가 3초 만에 완벽한 답을 내놓는 효율의 시대에, 일부러 느리게 사색하고 직접 문장을 짓는 일은 지독히 비효율적으로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200년 전 쇼펜하우어의 경고는 지금 이 순간 가장 유효한 것 같습니다. "용수철에 지속적으로 무거운 압력을 가하면 탄력성이 사라지듯이, 독서에만 치중하다 보면 정신의 유연함을 빼앗긴다."


저는 이제 안전한 저장을 멈추고, 사색한 결과물을 브런치를 통해 꾸준히 나누고자 합니다. 수집가에서, 사색가로 나아가기 위해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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