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서 우리는 '조용한 사직'이 AI 시대에 '조용한 균열'이라는 더 위험한 형태로 진화할 수 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AI 도입의 압박 속에서 번아웃을 느끼고, 일의 의미를 잃어버린 직원들은 소극적으로 저항하거나 마음의 문을 닫아버립니다. 그렇다면 이들을 다시 조직의 성장과 연결하고, 개인의 커리어를 발전시키는 '재참여(Re-engagement)'의 길은 없는 것일까요?
해답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AI를 위협이 아닌, 똑똑한 성장을 위한 '도구'로 활용하는 것입니다. 조직심리학의 잡 크래프팅(Job Crafting) 이론은 AI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일의 주도권을 되찾고, 조용한 사직을 '똑똑한 성장'으로 전환할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청사진을 제시합니다.
잡 크래프팅이란, 주어진 직무를 수동적으로 수행하는 것을 넘어, 직원 스스로 자신의 직무 내용, 역할, 관계를 재정의하고 일의 의미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이는 크게 세 가지 차원으로 이루어집니다.
· 과업 크래프팅(Task Crafting): 업무의 내용, 순서, 방식을 스스로 바꾸고 개선하는 것
· 관계 크래프팅(Relational Crafting):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을 변화시키는 것
· 인지 크래프팅(Cognitive Crafting): 자신의 일에 대한 인식과 의미를 재해석하는 것
생성형 AI는 이 세 가지 차원의 잡 크래프팅을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게 만들어주는 '촉매제'가 될 수 있습니다. AI를 활용해 반복 업무를 자동화하고(과업 크래프팅), 남는 시간에 다른 팀 동료와의 협업 프로젝트에 참여하며(관계 크래프팅), 자신의 일이 조직에 어떻게 기여하는지 데이터 기반으로 분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인지 크래프팅) 것이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가트너(Gartner) 연구진이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HBR)에 발표한 2026년 보고서는 AI 시대의 진정한 가치는 기술 천재가 아닌, 현장의 '프로세스 전문가'로부터 나온다고 강조합니다. [1]
즉, 자신의 업무를 가장 잘 아는 직원이 AI를 활용하여 기존의 업무 방식을 혁신할 때, 진정한 생산성 향상과 가치 창출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는 모든 직원이 AI 시대의 '잡 크래프터(Job Crafter)'가 될 수 있고, 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똑같이 잡 크래프팅을 한다고 해서 모두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까요? 최근 잡 크래프팅 연구에서 가장 주목받는 흐름은 조절초점 이론(Regulatory Focus Theory)과의 통합입니다. Lichtenthaler와 Fischbach(2019)의 메타분석 연구는 잡 크래프팅을 두 가지 조절초점으로 명확하게 구분했습니다. [2]
직무 자원을 늘리고 도전적인 요구를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방식.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동료와의 관계를 확장하며, 더 도전적인 업무를 자발적으로 맡는 것입니다.
방해가 되는 직무 요구를 줄이고 손실을 피하려는 방식. 스트레스가 큰 업무를 피하고, 업무 범위를 축소하며, 부담을 최소화하는 것입니다.
잡크래프팅에 대해 지금까지 발표된 모든 연구들을 검토하고 체계적으로 결과를 수집한 후 일정한 방식으로 통합한 메타분석 결과, 향상초점 잡 크래프팅은 직원의 건강, 동기, 성과 모두를 높이는 반면, 예방초점 잡 크래프팅은 오히려 이를 악화시키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2]
여기서 핵심적인 통찰이 나옵니다. AI 시대의 '조용한 사직'은 사실상 '예방초점 잡 크래프팅'과 맥을 같이 한다는 것입니다. 업무 범위를 줄이고, 도전을 회피하며, 소극적으로 일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구분은 AI 시대에 더욱 선명해집니다. 최신 연구에 따르면, AI에 대해 '도전적 평가(challenge appraisal)'를 하는 직원은 창의적 몰입을 통해 향상초점 잡 크래프팅으로 나아가는 반면, '위협적 평가(hindrance appraisal)'를 하는 직원은 직업 불안감을 매개로 예방초점 잡 크래프팅에 빠지게 됩니다. [3]
즉, 같은 AI라는 도구 앞에서 어떤 마음의 렌즈를 갖느냐에 따라 성장의 경로와 퇴행의 경로가 완전히 갈라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AI를 활용하여 나의 일을 '향상초점'으로 크래프팅할 수 있을까요?
아래와 같이 정리해보았습니다.
반면, 예방초점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AI를 단지 '일을 덜 하기 위한 도구'로만 사용하거나, AI가 대체할 수 없는 역량을 키우기보다 현재 상태를 유지하는 데만 급급하다면, 그것은 성장이 아닌 또 다른 형태의 '조용한 사직'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잡 크래프팅이 직원 개인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직원들이 안심하고 AI를 실험하며 자신의 일을 재창조할 수 있도록, 조직의 적극적인 지원과 문화 조성이 필수적입니다.
맥킨지(McKinsey)의 연구에 따르면, AI 시대의 진정한 변화관리는 소수의 전문가가 주도하는 하향식(Top-down) 접근이 아니라, 직원들을 'AI 실험자'에서 'AI 가속자'로 전환시키는 상향식(Bottom-up) 접근이 필요합니다. [4] 직원들이 워크플로우 재설계에 직접 참여하고, AI 도구를 활용한 업무 혁신을 공동으로 만들어갈 때, 비로소 실질적인 가치가 창출된다는 것입니다.
조직은 직원들에게 최고의 AI 도구를 제공하는 것을 넘어, 다음과 같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1. 심리적 안전감 보장: AI를 사용하다가 실수하더라도 비난받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주어야 합니다. 이는 직원들이 예방초점에서 벗어나 향상초점으로 전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2. 업스킬링 및 리스킬링 지원: 직원들이 AI를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체계적인 교육 기회를 제공해야 합니다. 맥킨지의 연구에 따르면,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직원은 AI 도구를 더 자주, 더 효과적으로 활용합니다. [4]
3. 성공 사례 공유 및 인정: AI를 활용한 향상초점 잡 크래프팅 성공 사례를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공유하며, 이를 시도한 직원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보상해야 합니다.
조용한 사직은 조직이 보내는 위험 신호이지만, 동시에 변화의 기회이기도 합니다. 직원들이 AI라는 새로운 도구를 활용하여 자신의 일을 재창조하고, 그 과정에서 성장과 의미를 되찾을 수 있도록 돕는 것. 그것이 바로 AI 시대, 조용한 사직을 똑똑한 성장으로 바꾸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조용한 사직이 결국 '실제 퇴직'으로 이어지는 과정에 대해, AI 시대의 새로운 해고 트렌드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References
[1] Aykens, P., Lowmaster, K., McRae, E. R., & Shepp, J. (2026, February 2). 9 Trends Shaping Work in 2026 and Beyond. Harvard Business Review.
[2] Lichtenthaler, P. W., & Fischbach, A. (2019). A meta-analysis on promotion- and prevention-focused job crafting. European Journal of Work and Organizational Psychology, 28(1), 30–50.
[3] Xu, F., Qin, J., & Zhang, D. (2026). Promoting or preventing? The influence of artificial intelligence awareness on employee job crafting. The Journal of Applied Behavioral Science, 62(1), 105-129.
[4] Roth, E. (2025, August 13). Reconfiguring work: Change management in the age of gen AI. McKinsey & Compan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