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으로 쓰는 마지막 이야기
짧은 해가 지고 깜깜한 밤이 되면,
너무나도 가지런히 정렬된 거대한 빌딩들 중 한 군데에서 나를 토해냈다. 회사 건물 앞에서 담배를 한 개비 태우며 주변을 돌아보면 인위적인 조경과 시멘트 바닥, 그리고 두터운 올리브색 패딩 위로 백팩을 한쪽 어깨로 맨 갈길 잃은 직장인 남자가 서 있었다.
"오늘은 퇴근하고 뭐하십니까?"
사무실에서 퇴근 즈음에 들리는 대화였다. 회사는 7시 퇴근이라 집에 가면 8시쯤 도착했고, 저녁을 먹고 씻고 하면 10시를 넘어 뭔가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하루가 끝나버리는 느낌이었다. 공기가 차가워지는 계절이 되면 짧은 낮 시간 때문인지 하루가 더욱 짧게 느껴졌다.
선셋 따윈 잊고 산지 너무 오래되었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어릴 적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면 선셋까지 종일 놀아야 했던 기억이 난다. 지칠 때까지 흙밭에서 뛰놀다가 301호 아줌마가 베란다에서 친구를 호출하고, 705호 아줌마가 친구 등짝을 때리며 데려가고, 왠지 배가 슬슬 고파지는 시간이 되면 선셋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광경을 항상 눈에 담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어쩌면 내가 너무 각박한 곳에 살고 있거나, 마음의 여유가 없거나, 해가져도 깡통 건물들에 가리어져 그 아름다운 모습이 보이질 않아 잊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퇴근하고 선셋을 본다거나, 해 질 녘에 회사 옥상에 올라가 본 적조차 없기 때문이다.
금요일 PM 7:00 양양으로 출발
선셋조차 구경하지 못하는 직장 생활의 낙은 한 주간의 업무가 끝나는 금요일 저녁 7시에 시작되었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와 차 트렁크를 열어 웻슈트 등 서핑에 필요한 장비들을 잘 챙겼는지 확인하고, 간단히 요기를 하기 위해 산 김밥을 한 손에 들고 차에 올라탄다. 3시간 남짓 걸리는 양양을 향해 떠나며 액셀을 밟는 것과 동시에 서핑 트립이 시작되었다.
매주 금요일 퇴근하고 3시간이 걸려 당도한 양양의 게스트하우스에서 밤을 보낸 뒤, 무거운 보드를 낑낑대며 들고 마주한 아침 해변에는 겨울 날씨가 무색하게 많은 서퍼들이 나와 있었다.
양양 기사문 해변의 라인업은 사진 우측의 시멘트 구조물 끝 지점이다. 파도가 거칠어지는 날에는 좌측에 보이지는 않지만 등대까지 나와야 하고, 태풍이 오는 시즌에는 등대에서 더욱더 바닷가 쪽으로 나가야 한다.
라인업이라 함은 깨지지 않는 파도를 잡을 수 있는 해수면 상의 위치인데 서핑 포인트마다, 시간에 따라 혹은 계절에 따라 시시각각 바뀐다.
부산에도 서핑이 가능하다 하여 여름에 방문한 송정 해수욕장은 해수욕객 전용 구역으로 쏟아지는 파도에 아쉬움의 눈길로만 바라봤다. 롱보드로 치자면 송정의 서퍼들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 타는 거 같다.
죽도에는 캠핑과 서핑을 함께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나라 동쪽에 위치한 서핑 스팟 들 중 가장 붐비지 않나 싶다. 하지만 그만큼 소위 말하는 잘 나가고 멋진 형, 누나들을 비롯해 연예인들도 찾는 해변으로 볼거리도 많은 곳이다.
생에 첫 보드를 갖게 되던 날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하지만 지금도 후회하지만 보드는 여러 가지를 타보며 나에게 맞는 것을 찾아야 하는데 성급하게 택했다는 생각이 든다.
기사문에 거주하는 떡순이. 흡사 너구리를 닮은 녀석인데 자주 보다 보니 이제 제법 아는 척까지 한다. 도시가 아닌 다른 지역이 나에게 익숙해지는 느낌은 나에게 안식처가 생기는 느낌이다.
회사 출장으로 방문한 제주에서 짬이 나서 중문에 방문해봤다. 마치 하와이의 와이키키 해변처럼, 여름에 남쪽에서 꽂히는 해류를 바로 맞이하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파도가 밀어주는 힘이 세서 정말 즐겁게 타고 왔다.
필리핀의 '샤르가오'라는 섬은 서핑만을 위해 방문한 서퍼들로 북적인다고 한다. 서핑을 즐기는 해변의 이름도 'cloud nine'으로 직접 눈으로 보지 않아도 얼마나 멋질지 짐작이 간다. 꼭 제주도가 아니라도 우리나라의 많은 섬들 중 한 군데가 그곳과 같이 서핑만을 위한 휴양지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더라.
그리고 이전에 썼던 하와이로의 서핑 트립까지.
하와이로의 서핑 트립 https://brunch.co.kr/@chrispyo/3
직장인으로 쓰는 마지막 이야기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다니면서 집이나 차, 그 외의 자산이라고 생각이 들만한 것들을 소유하기 위한, 돈이라는 수단을 얻기 위해 평생 주입식 교육을 받아왔다.
상대적으로 내 삶의 가치를 어떻게 찾아야 하며, 다른 사람들과 어떤 방식으로 공유하며 살지에 대한 생각이나 방법에 대한 배움이나 여유가 많이 부족했던 거 같다.
그러다 보니 열심히 미래에 대한 계획을 짜고, 자기 계발을 하고, 직장에서 뛰어난 인재가 되기 위해서 노력하다 보면 허무해지는 순간이 오게 된다. 프로페셔널한 어떤 업무든 척척해내는 멋진 직장인이 되는 게 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평생을 배워온 삶이 내가 찾는 답이 아니라면, 나의 답을 찾으러 가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마치 오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있었듯이 말이다.
어떻게 답을 찾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2년 정도 했다. 고민의 과정에서 든 생각은, 내가 하는 일이 누군가의 일상에 즐거움을 주거나, 혹은 누군가에게 삶의 가치를 찾는데 도움을 주는 일이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 생각이 무르익을 때쯤 퇴사를 하면 어떨지에 대해 생각해왔고, 마침내 그것을 찾는 여정을 더 자유로이 떠나기 위해 퇴사하게 되었다.
2014년 4월부터 시작된 직장인 서퍼의 여정이 이젠 끝나버렸다.
새로운 여정이 세계 여행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서핑을 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냥 직장을 다니지 않는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뿐이다.
최근에 본 글 귀가 기억에 남아, 새로운 출발을 꿈꾸는 사람들을 응원하며 적어본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 폴 발레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