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겨울 대자연으로의 일탈
보소~ 아저씨, 안 춥습니까?
반팔티 두어 장, 보드 쇼트 반바지 하나 그리고 쪼리와 고프로 정도. 잡다한 여행 장비들을 챙겨도 백팩 하나면 서핑을 하러 갈 준비가 완료된다. 달리 챙겨야 할 것이 떠오르지 않는다. 물론 여름 이야기다.
겨울에 서프 트립을 간다면 아침부터 부산스럽게 움직여야 한다. 챙겨야 할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BRUTE라고 영문 글씨가 새겨진 커다란 통에 각종 장비들을 던져 넣는다. 잘 말려둔 겨울용 두께의 슈트와 장갑, 신발, 그리고 후드까지 챙겨 넣는다. 겉은 검은 해녀복 같이 생겼지만 안쪽은 기모로 처리되어, 추운 겨울 슈트 하나에 의존해야 하는 서퍼들의 체온을 지켜준다.
겨울 장비들을 챙기면서 웃음이 난다. 지난겨울 해수욕장에서 관광객들이 정신 나간 사람 보듯 구경하던 것이 생각나서이다. 뭐하냐고 묻거나 안 춥냐고 묻는 것은 일상 다반사. 바닷가에 떠있으면 무장공비로 볼 기세다. 그들도 익숙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여름이나 해외로 서프 트립을 갈 때와는 달리 챙겨야 하는 장비가 많다. 한국의 겨울 바다는 엄청나게 춥기 때문이다.
여름에는 각종 방송 프로그램이나 매거진에서 서핑과 관련된 정보나 의류 등을 끊임없이 소개하며, 젊은 사람들의 동경과 충동구매를 이끌어낸다. 하지만 겨울이 되면 이런 미디어 생산은 뚝 끊겨버린다.
바닷가도 마찬가지다. 여름에는 누구나 체험 서핑으로 입문하지만 겨울이 되고서는 추운 날씨로 인해 발길이 끊겨버린다. 우리나라의 기후 탓도 있겠지만, 미디어들이 한 가지 주제에 대해 깊게 오래 다루기보다는 끊임없이 새로운 호기심 거리만을 찾아주기 때문이 아닐까. 물론, 사람들의 짧은 관심 주기에도 큰 영향을 받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런 겨울 바다가 더 좋다. 여름엔 목욕탕 같던 바다 위가, 겨울에는 사람들이 적어 혼자 여유롭게 타기 좋기 때문이다.
입수하고 바닷물에 적응이 될 때쯤이면 추위에 떨던 몸이 온탕에라도 들어온 듯이 차분해진다. 고개만 저 멀리 수평선으로 돌려 보드 위에 앉아 있다 보면 파도소리, 바람소리만 들린다. 여기저기서 꺅꺅 거리며 보드 위에 처음으로 서본 비키니 언니들이 이 겨울바다에는 없다. 그냥 차가운 대자연과 나만 남아 버렸다.
온몸에 장착한 장비들 때문에 몸을 움직이기 쉽지 않다. 한국의 서퍼들이 커뮤니티에서 하는 농담 중, 겨울 서핑을 한 시즌 거치고 나면 여름 시즌에는 바다 위에서 날아다닌다고 한다. 손오공이 모래주머니를 차고 연습한 후, 모래주머니를 던져버리고 날아다니듯. 그만큼 두꺼운 슈트 때문에 단련이 되는 것이다.
겨울에 서핑을 한다는 것. 정확히는 겨울에 한국에서 서핑을 한다는 것은 즐거운 경험들로 가득 차 있다.
겨울 서프 트립을 가기 전 각종 장비들을 챙기는 즐거움. 두꺼운 슈트를 낑낑대며 입고 문을 나서 바닷바람을 맞는 순간. 차가운 바닷물 안에서 적응이 되어 더 이상 춥지 않아지는 상태가 되는 순간. 무엇보다도 가장 좋은 순간은 바닷물을 잔뜩 머금은 슈트를 벗어던져 버리고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는 순간이다. 온 샤워실을 수증기로 가득 채워버리는 차디찬 겨울 공기를 피해, 뜨거운 물을 내뿜는 샤워기를 머리에 대고 오늘의 서핑을 되돌아보는 그 순간이 겨울 서핑의 하이라이트.
정사각형의 반듯한 회색 카펫이 깔린 바닥. 그 카펫을 밟고 서있는 수백 개의 책상 중 한 군데에 앉아 온갖 먼지를 들이마시고, 종일 모니터를 보며 "아 그래도 회사가 제일 따뜻하지" 하다가, 겨울 서핑을 마치고 샤워를 하는 순간 일종의 일탈 감이 든다. 스마트폰 게임이나 따뜻한 방에서 할 시간에, 원시적인 옷을 입고 차디찬 바닷물 속에서 참방 거리며 자연과 함께 노는 느낌이랄까.
스마트폰에 가까울 수록 지치게 된다. 생각하지 않는 시간, 자연과 가까운 시간일수록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