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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보고 무엇을 바라는가?

by Beholder Phinehas

-- 절기를 지키려 보내달라는 이스라엘에게 바로는 여호와를 모르니 거절하고 더 무거운 노역과 매질로 대응하자 백성은 다시 모세앞에 원망합니다.


탈출하는 구원계획이 선명하게 주어졌으나 살기는 더 팍팍해 집니다. 재료를 주지 않으면서 같은 양을 생산하라 하니 온 땅에 흩어져 곡초 그루터기를 거두어다가 짚을 대신해야 하는 추가 노동이 부가됩니다. 딱 긁어 부스럼을 만든 것만 같습니다. 그럴 때 손에 잡히지 않으나 분명한 약속을 붙잡고 나아가는 것은 맞닥뜨린 현실에 주저 않는 것보다 매우 어렵습니다. 나 아닌 모든 것은 내 성공을 바라지도 않고 돕지도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예 이뤄지지 않을 것이거나 이뤄질 것이긴 해도 여기서는 누리지 못하게 훼방하는 분명한 힘과 인격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죄 된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 예수님이 왕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로 가는 표상입니다. 그것은 말씀으로 분명히 약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 약속을 듣고 믿었다 해도 지금 여기의 삶이 재료도 주지 않으며 양도 줄여주지 않는 계속되는 고단함이 더해갈 뿐이라면 대 부분 약속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고 원망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나아가 그 약속의 대상에게 나아가 어찜 인지 따지고 항의하는 것을 당연시 할 것입니다.


그러나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는 경험이 약속을 위반하는 것처럼 분명히 보이는 상황에서도 그 약속을 넘어 그 약속을 주신 분에 대한 신뢰와 소망으로 그 어려움의 때를 묵묵히 견디어 지나갈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원과 영혼의 선택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분명한 약속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먼저 주어지는 말씀의 약속이 없는데도 그저 자신의 인간적 바람만을 가지고 무던히 참기만 하는 것은 죽은 자가 또 죽는 가장 어리석은 짓입니다. 이것은 약속을 주신 분을 분명히 만나고 바로 알 때만 할 수 있는 응답입니다. 그래서 그 분과 그 분의 보내신 분을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요17:3) 그 분이 주신 귀하고 좋은 것들 곧 천국의 보화들이 영생이 아니라 그 좋은 것들을 주신 분을 아는 것이 영생이라는 뜻이 바로 그것입니다.


바로는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그 목소리를 듣고,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않겠다 합니다. 그러면 당신은 그 목소리를 듣고 그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그래서 그가 당신 곧 이스라엘을 가나안 곧 하나님 나라로 보내라 하시면 보낼 것입니까? 바로가 이스라엘을 광야로 보내는 것이 내가 나를 하나님 나라로 보내는 것과 같은 것이라면 그렇게 하라시는 하나님을 당신은 알고 그의 목소리를 듣습니까? 아니면 알지 못하고 듣지 못한다며 나를 보내지 않습니까? 알고 듣는다면 왜 우리는 광야로 나가라는 말씀에는 순종하지 않으십니까? 모르면서 안다 하든가 알지만 듣지 않든가 들어도 나가지는 않든가 중에 속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알면 듣고 들리면 나가십시오. 거기가 극도로 열악한 광야이지만 거기가 하나님 만나는 곳이기에 그가 가라 하시는 곳으로 그 분만을 대책삼아 나가십시다. 거기서 참 예배할 분이 기다리십니다.


모세와 아론이 전해 준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이적을 본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고 경배했음에도 팍팍해진 노동의 고단함에 미움 받게 하고 칼에 죽게 되었다고 금방 돌아서 항의하고 따집니다. 약속과 약속을 주시는 하나님을 보기보다 눈앞의 상황에 쉽게 매몰되는 모습입니다. 그들이 왜 그랬지 당신과 분리하여 지적하지 마십시오. 내가 그 상황이면 나도 충분히 그럴 수 있음을 인정하고 나는 어떻게 그러지 않을지를 고심하고 그러지 않기를 기도하십시오. 그것은 그들의 모습 일뿐만 아니라 나의 모습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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