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일을 앞두고, 어제 따끈따끈한 이별을 했다. 요즘 네가 쫌 피곤한 줄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넌 이미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구나. 하지만 나도 사실은 알고 있었다. 우리 관계에 종이에 벤 상처같은 실금이 쌓이고 쌓여 곧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다는걸. 따끔따끔한걸 참고만 있었다. 혹시 너도 그랬을까. 나는 상처받기가 싫어 참았고, 너는 상처주기가 싫어 참아왔던걸까.
“갑작스러운 말이겠지만, 결혼에 대한 확신이 없어…”
넌 그렇게 말했지만, 난 그 말이 갑작스럽진 않았다. 요즘 난 일부러 결혼 얘기를 많이 꺼내 너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알고자 노력했으니까. 사귄 지 1년 반이 넘어가는 시점에 관계가 지속되려면 관계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어쩌면 넌 온몸으로 확신의 부재를 알리고 있었는데, 내가 애써 무시했던 걸지도 모른다.
“헤어지자는 말이지? 잘 지내. 난 그럴 거야. 건강해.”
왜 그렇게 바로 결론을 내렸는지는 모르겠다. 만약 그가 대화를 이어가고 싶었다면, 저 ‘확신 어쩌고’ 말만 던지진 않았을 테니까. 그렇다면 그는 이미 마음의 결론을 내렸던 거다. 그는 평소에 나를 신중하고 생각이 많은 사람으로 봤다. 하지만 이번 일에서는, 내가 너무 담담하게 반응해서, 마치 다른 사람 같다고 했다.
“알고 있었어? 네가 너무 담담해서, 마치 다른 사람 같아.”
그 말 속에서 그의 놀람과 혼란을 느꼈지만, 정작 나는 그의 혼란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그는 내게 나와의 모든 시간이 좋았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아니었다. 조마조마했고, 마음이 흔들렸고, 그는 내게 확신을 주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내가 바란건 확신이 아니라 그냥 같은 미래를, 같은꿈을,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는 믿음이었는데.
영화 500일이라는 썸머의 썸머가, 이 새끼였다니. 욕을 사용한 나를 용서해다오. 하지만 난 얘가 비포선라이즈의 제시인줄 알았기에 괜한 배신감을 느꼈다. 결혼을 당장 하자는 것도 아닌데, 도대체 ‘결혼 확신’이란 무엇일까. 확신이 없다고 하면서 단호하게 말하고, 눈물 흘리며 잘 모르겠다고 하는 건 또 무엇일까. 결론적으로, 내가 내 주장을 더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면 이 갈등의 계절을 그저 스쳐 지나가는 하나의 계절로 둘 수도 있었을 텐데, 그게 아쉬웠다.
자꾸만 궁금하다. 언제부터 확신과 사랑이 줄었을까. 아니, 그 줄어든 확신과 사랑을 그는 언제 알아차렸을까. 결혼할 확신이 없다고 해놓고, 왜 내 헤어지자는 담담함에는 놀라하는 걸까. 어쩌면 그는 내 깊은 생각 속에 어떤 다른 답이 있을까 기대했던걸까. 하지만 난 더이상 너의 기대에 맞춰 나를 깎아내리고 싶지 않았다. 그게 사랑인걸까? 아니면 이건 내가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인걸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여러 질문들이 자꾸만 생겨났다. 그리고 어떤 고민들은 그저 이 가을 바람에 날려 보내봐도 괜찮은 것들이었다.그래서 난 그냥 그러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