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밍아웃과 우밍아웃

by 틈새

엉덩이에 종기가 난 삶은 그 전과 다르다. 축구를 하다가 엉덩방아를 찍으면, 그냥 아픈 게 아니라 눈물이 핑 돌 만큼 아프다. 괜찮냐며 다가오는 위로의 손길에도 건드려져서 “으악, 만지지 마!”라고 소리칠 정도로, 정말 야물딱지게 아프다.


집에 돌아오면 공부와 함께 고민이 시작된다. ‘이게 정말 종기 맞아? 참을 만하지 않으면 병원 가서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데, 도대체 참을 만하다의 기준은 뭘까? 단 걸 너무 많이 먹어서 생긴 건가? 병원을 가야 할까, 말아야 할까? 그냥 두면 낫는 건데, 괜히 돈 쓰는 건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들이 꼬리를 문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지금 내 우울한 마음도 그렇다. 그냥 어쩌다 생겨났고, 작은 일에도 쉽게 흔들린다. ‘이걸 어떻게 하지?’라는 고민을 끝없이 이어간다. 다른 점이 있다면, 종기는 “그냥 났나 보다” 하고 넘길 수 있는데, 우울한 마음은 자꾸 나 자신을 자책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 나는 엉덩이 종기와 우울한 마음, 두 가지 이슈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 사실을 드러내는, 이른바 ‘엉밍아웃’과 ‘우밍아웃’을 한 사람은 현재 엄마, 아빠, 그리고 Y뿐이다. 처음엔 말해봤자 달라지는 게 없을 거라 생각했고, 오히려 상대까지 고민의 늪에 빠뜨릴까 걱정했다. 그런데 요즘은 차라리 말하는 편이 더 건강한 관계를 만든다는 걸 조금씩 깨닫는다.


글로는 내가 느끼는 어려움을 늘 많이 표현해왔지만, 말로 하는 건 또 달랐다. 실은 상대의 반응이 두려웠다. “그거 별거 아냐” 혹은 “이렇게 하면 돼”라는 식의 반응이 돌아올까 봐. 하지만 사실 내가 바란 건 그런 해결책이 아니었다. 그냥 “힘들었겠다” 하고, 그날 내 옆에 있어 주는 돌봄이었다.


왜냐하면 통찰이나 문제 해결은 내가 스스로도 해낼 수 있는 영역이지만, 연대와 돌봄은 혼자서는 만들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존심이 워낙 강해서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게 참 싫었는데, 이제는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나는 여전히 사랑을 느끼고 싶고, 돌봄을 받고 싶다. 나이를 먹어가도 그 욕구는 줄지 않는다. 오히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는다. 밑 빠진 독을 닮아있는 내 마음의 독장 밑을 채우는 건 내 몫이겠지만, 그 온전한 항아리를 가득 채우는 건 남의 몫도 있다는 걸. 돌봄을 주고받는 것이 삶의 일부라는 걸, 엉밍아웃과 우밍아웃을 동시에 하면서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그렇게 각자의 커밍아웃을 나누며 응원하면서 싹 트는 무언가가 삶의 어쩌면 전부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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