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싸매기(반창고 붙이기): 상처는 선물처럼 싸매는 게 아니야
어렸을 때, “울어도 된다”는 말이 절실했다. “울면 안돼, 산타 할아버지는 우는 아이에게 선물을 안 주신대요.”라는 노래 가사는 나에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기에.
물욕도 없었고, 그저 울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억지로 괜찮은 척하는 게 더 고역이었겠다.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한 이유는 서점에서 ‘청소년기에 해주면 좋은 말’이라는 제목의 책을 Y와 함께 보게 되면서 그 제목이 우리의 대화 주제가 되었기 때문이야. 내 말에 Y는 이렇게 반문했어.
“울어도 된다는 말이 위로가 될 수 있어? 슬픔 속에 머물기만 하면 나아지는 게 없잖아. 바쁘게 살면 다 나아지던데?”
Y는 마치 엄마가 하실 법한 말을 했어. 여기서 엄마가 하실법한 말들이란 내게는 감정을 배제하고 해결을 촉구하는 그런 말들이었어. 물론, 그런 말들이 적합한 상황들도 많지만, 문제는 그렇지 않은 상황들도 많다는 거야. “울어도 된다”는 말이 누군가에게는 우습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바쁘게 살면 된다”는 말 역시 누군가에게는 허무하게 느껴질 수 있잖아.
엄마는 내 우는 모습을 보고 ‘꼴 보기 싫다’는 표현을 하실 정도로 나의 슬픔을 싫어하셨어. 그러나 한편으로는 누구보다 나를 사랑해 주시는 분이셨지. 어렸을 때는 이 간극을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어. 왜 엄마는 내 슬픔까지 사랑해주지 않았을까? 밝은 나는 사랑받지만, 어두운 나는 사랑받지 못하는 듯한 느낌… 둘 다 결국 나인데 말이야.
나중에서야 엄마도 나의 슬픔에 슬퍼하셨다는 걸, 그리고 슬픔을 화로 표현하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 슬픔이 사랑처럼 참을수록 더 커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도 시간이 한참 흐른 뒤였지. 그 모든 것들은 그때 알았더라면좋았을거야. 표현 방식 차이에 대한 무지는, 대개 아픔으로 돌아오기 마련이니까.
마음이 나그네처럼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문신처럼 깊이 새겨지는 사람도 있다. 나그네는 문신을 이해하지 못한 채 왜 그것을 새기는지 묻고, 그 물음은 때로 문신보다 더 큰 아픔이 된다.
어렸을 때는 그 화살을 온전히 나 자신에게 돌리다가, 너무 아파서 타인에게 돌리기도 했지만, 아픔의 결이 달라질 뿐, 여전히 아프기는 마찬가지였어. 그러나 이제는 알아! 우리는 슬픔과 위로의 메커니즘을 잘 몰랐을 뿐이라는 것을!
특히 엄마는 슬픔을 빨리 잊어버려야 할 것으로만 보셨던 것 같아. 그러나 그것은 비단 엄마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보편적으로 우리는 슬픔을 빨리 잊고 나아지길 원하지만, 그 과정에서 *상처 싸매기(반창고 붙이기)와 같은 방법으로 문제를 덮어두려 할 때가 많기 때문이야. 나 또한 한때 이런 상처를 보기 좋은 선물처럼 곱게 싸매려고만 했어. “괜찮아, 다 잘될 거야” 같은 말로 얼버무리거나, 그저 시간이 지나면 잊히겠지 하며 외면했거든. 하지만 이와 같은 방법은 일시적으로는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상처를 감추는 것일 뿐 근본적인 치유로 이어지지 않아. (*상처 싸매기란, 타인의 고통을 직면하는 것이 불편하거나 감당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그 고통을 사전에 봉합하려는 시도를 말한다. 예를 들어, “괜찮아, 잘 될 거야”와 같은 위로의 말은 그 고통을 인정하거나 함께 견디기보다는 문제를 빠르게 해결하려는 의도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생각해 보니, 20대 초반, 엄마가 항암을 하고 계셨을 때, 가장 듣기 싫었던 말이 “괜찮아, 잘 될 거야”였다고 해. 그리고 엄마 또한 그 말이 제일 듣기 싫었다고 하셨어. 개인적으로는 무책임한 말이라고 느꼈어. 잘 되고 있지 않은데 잘 될 거라는 허무맹랑한 말은 그냥 내 슬픔에 전혀 무관심하다는 인상밖에 주지 않았거근. 그런데 무의식적으로 그런 말을 내가 내게 또 하고 있었다니. 오히려 위로는 “감히 그 슬픔의 깊이가 어느 정도 인지 가늠할 수 없지만…”과 같은 말들이나 말없이 귤 한 박스를 보내는 그런 행동에서 느껴졌건만.
아아 이제야 알겠다. 위로의 진정한 목적은 ‘나아짐’이 아니라 ‘함께함’이었구나.
그래서 때로는 그 어떤 화려한 말보다, 내 어깨 위에 올려진 따뜻한 손길 하나가 더 큰 위로가 되었던 것이구나. 위로는 마음을 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강하게만드는 힘이었구나. 아이러니야. 치유의 시작은 고통의 탐색과 표현인데, 우리의 위로는 보편적으로 고통의 회피를 자아냈으니 말이야.
엄마는 마음엔 서툴렀지만, 몸에는 늘 반창고를 느슨하게 붙여주셨어. 상처에 바람이 통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야. 곧 떨어질 것 같아 그게 그렇게 싫었었는데, 이제는 나도 그렇게 해. 특히 마음처럼 섬세한 부분에는 더더욱 그렇게 해야해. 그 속으로 위로의 바람이 들어올 수 있게, 진정한 치유가 시작될 수 있게
나아지기 보다 항상 함께하고 싶을 뿐인 나로부터,
P.S. 연말이야.
따뜻하고 화려한 것들로 모든 것을 포장하려는 분위기가가득한 이 시점, 나도 그 느낌이 나쁘지는 않아. 힘들었던 마음들이 잠시 포장되어 위로받는 것 같아서. 하지만 반짝이는 리본으로 감춘다고 해서 그 마음들이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야. 그래서 올해는 포장 대신, 선물을 풀어보듯 고생했던 마음들을 하나씩 열어보고, 그 속에 숨겨진 감정을 받아들이며 보내는 시간을 갖고 싶어.
유독 힘들었던 한 해였어. 특히 오늘은 내가 간절히 원했던 상담 임용 시험에 떨어진 날이야. 한 학교에 한 명의 상담 교사도 배치되지 않는 학교가 여전히 넘쳐나는 현실 속에서 상담 교사의 티오가 급감한 상황은 억울하기만 하지만, 삶이란 늘 예고 없이 뒤통수를 치는 법이고… 내 공부가 부족하기도 했던 것이겠지. 뒤통수가 얼얼하지만, 그래도 괜찮아. 상처는 혼자 싸매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풀어야 비로소 치유가 시작된다는 것을 알았으니. 사랑하는 사람들과 그런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그럼, 해피 연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