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30대 중반의 여성이 있다. 도시에 살고 있고 결혼을 했으며 아이가 하나 있고, 내년이나 후년쯤엔 둘째를 가질 예정이다. 함부로 일반화를 해서는 안 되겠지만, 아마도 이 여성은 한국에서 생각하는 전형적인 30대 중반의 여성일지도 모른다. 대학을 졸업한 후 열심히 직장 생활을 하다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며 엄마가 되어 현재의 삶에서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여성.
이 여성 중 하나가 바로 나다. 이 나이까지 나도 사회가 바라는 '각 시기에 해야 할 어느 과업' 같은 것을 착실히 이루며 열심히 살았다. 오늘은 이러한 인생의 과정 중 만난 새로운 세계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정말 신비하게도, 각각의 시기에 맞춰 삶을 따라가다 보니 이전 삶에서는 전혀 모르던 '낯선 세상'을 자꾸 만났다. 10대, 20대를 거쳐 30대가 되면서, 결혼, 출산을 거쳐 육아를 하면서 그렇게 조금은 이전보다 더 넓은 시야를 갖고 새로운 인생들을 받아들이고 알아간다.
10대에 나는 학교생활, 입시, 진로가 관심사의 전부였고, 때때로 친구와의 관계를 고민했다. 20대에는 성장, 발전, 도전, 경험이 가장 큰 관심사였기에 대부분의 에너지가 '여행'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으로 향했다. 넓은 세상에 관심이 있고 종종 타인을 살폈던 나는, 국제기구나 비영리 단체에서 여러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일하는 미래를 꿈꾸기도 했다. 굉장히 가치 있고 멋진 일이라 생각했다. 대학 시절 내내 이런저런 활동을 하느라 늘 바빴던 나지만, 다른 사람에게도 열정을 나누며 동기부여를 해주었다. 아마도 그때의 나는 '청춘'이라는 단어를 20대인 나의 온몸과 맘으로, 흠뻑 받아들이고 드러냈던 것 같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하면서 결국은 가장 현실적이고 편안하고 안전한 길을 택했다. 물론 꿈꾸었던 길로 가지 못한 건 그간 내가 더 많은 노력을 하지 않은 탓이 크다. 하지만 결국은 다수가 가는 길을 선택하는 게 나에게도 가장 쉽고 편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청춘의 에너지는 소진되었다. 더 이상 '이타적인 봉사와 실천'이 나의 가장 큰 관심사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새로운 세상과 경험'은 꾸준히 좋아했다. 그래서 직장 생활 2~3년 차인 20대 중후반에는, 월급의 거의 대부분을 여행이나 문화생활에 탕진했던 것 같다.
어떤 나이를 살고 있는 자에게 그보다 앞선 세대의 관심사, 그리고 그에게서 오는 조언은 전혀 와닿지 않을 수 있다. 내가 바로 그러했다. 한창 여행과 문화생활에 관심이 많던 나에게, 어느 날 30대 중반의 결혼한 직장 선배가 말한 '재형저축'이나 '주택청약' 같은 용어는 하나도 알아듣지 못할 외계어였다. 선배는 한참 어린 나에게, 그러나 곧 비슷한 인생을 살아갈 나에게 인생의 선배로서 조언을 해줬다. 평소 나는 월급을 아껴 쓰긴 했지만 그저 남은 돈을 저축하는 것이 재테크의 전부였다. 선배는 결혼하기 전에 이런저런 것들을 미리미리 알아놓고 준비하면 좋다고 '좋은 상품'과 관련 링크를 문자로 보내주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남자친구도 없었고 (언제 결혼이란 걸 할지 전혀 모를 시기)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자유로운 영혼일 뿐. "네~ 알아볼게요. 선생님. 신경 써주셔서 고마워요~"라고 (평소처럼) 대답은 잘했다. 하지만 전혀 알아보지 않았다. 솔직히 진심으로 고마워하기는 커녕 별로 친하지도 않은 선배인데 나에게 오지랖을 부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고 보니...! 결혼을 하고 가계수입에 늘 목말라하고 내 집 마련을 위해 아등바등하고 있는 지금의 나를 마주한다... 으으으... 그때 어른들의 말씀을 잘 들었어야 했다!! 나와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라고 전혀 관심 가지지 않았던 나에게, 이미 세상을 알만큼 안다고 자부하며 알아서 잘 살아갈 거라 생각했던 과거의 나에게 왕꿀밤을 담아 후회와 원망을 보낸다...
나이를 먹어가며 인생을 살아가며 이전에는 몰랐던 세상을 자꾸 만난다. 각 '시기'에 진심인 나는 그 단계 단계마다 놀라운 세상을 마주하며, 그만큼 새롭고 다양한 것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결혼이라는 허들을 넘을 때에도 참으로 멋진 신세계를 보았다. 웨딩 시장에 종속된 수많은 사람들과 내가 골라야 할 무수한 선택지를 바라보며, '세상에! 이런 세상도 있었구나.' 싶었다.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이것은 돈을 퍼부을 시간의 도래였다.) 선택의 과정이 어느 하나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중 식장, 스드메, 신행 준비는 사실 즐거운 공주놀이를 위한 별천지에 속했다. 앞으로 내가 또 언제 '이런 대접과 호사를 누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쁘게 반짝이는 동화 속 공주. 그러나 이것은 사실 한정된 시간만 예쁘게 반짝이는 신데렐라의 모습이었다. 결코 결혼의 전부가 아니었다.
'결혼식'이 아닌 진짜 '결혼 생활'을 위한, 12시가 지나 현실로 돌아오는 우리를 위한, 신혼집과 혼수를 준비하는 과정이 나에겐 더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거기서 나는 새로운 관심사를 만났다.
우리의 신혼집은 지은 지 20년이 된 복도식 아파트였다. 베란다가 넓고 거실은 좁은, 24평의 낡고 오래된 작은 전셋집이었지만 행복했다. 이 작고 소중한 공간을 가꾸는 데에 큰 애정이 솟았다. 우리가 살아갈 집의 분위기를 생각하며 혼수를 준비하며 다양한 가구와 그릇, 소품 등에 관심이 갔다. 처음엔 다소 막막하기도 했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 하나씩 집안을 채워가는 것이 참 흥미롭고 즐거웠다. 아무것도 없던 도화지에 밑그림을 그리고 선을 그리고 조금씩 색을 칠해갔다. DIY 가구를 조립하고 가구의 작은 문고리를 내 스타일로 바꾸고 그림액자를 벽에 달고 집안에 식물을 들여가며 따뜻하고 소소한 기쁨을 느꼈다.
이러한 과정과 결과를 기억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이 내용을 블로그에 기록했다. (블로그를 개설한 지 7년 만에 거의 처음으로 올렸던 글이다.) 그런데! 그 글이 '신혼집 인테리어'라는 제목으로 포털 메인에 올랐다! 갑자기 방문자가 10만 명이나 들어왔고 며칠간 그 인기가 계속되었다. 놀라운 마음을 추스르기도 전에, 한 유명 인테리어 애플리케이션의 에디터에게 연락이 왔다. '공간이 너무나 매력적이라 꼭 소개하고 싶다'며 나에게 '온라인 집들이'를 의뢰한 것이다. 만삭이었던 나는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제안을 승낙했고 정성을 들여 포스팅했다. 이 외에도 다른 플랫폼에서 몇 번 더 제안이 왔다. 하지만 이제는 아이가 곧 나올 것 같았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못했다. 셀프 인테리어! 나는 이쪽 분야에 확실히 관심과 재능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곧 아기가 태어났다. 아이의 공간을 예쁘게 꾸미는 sns 속 타인을 보며, 나도 어서 나의 멋들어진 감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 깨달았다. 이제 막 아기를 낳고 키우는 초보 엄마에게는, 아이의 공간을 꾸미기 위한 시간도 에너지도 그리고 공간도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막상 엄마가 되니 오히려 다른 것에 관심이 생기게 되었다. 밥 잘 먹는 아이로 키우기 위해 '아이주도 이유식'을 준비하면서는 요알못인 나조차 내가 이쪽 분야에 큰 흥미가 있다 착각했고, 아이를 잘 키우려 육아법을 공부할 때는 내가 '유아교육' 공부를 꽤 잘해서 고수 엄마로 거듭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열의가 가득해 온라인 대학교까지 입학하고 6개월이 된 아이와 함께 유아교육 수업시연에도 참여했다. 그렇게 1년을 공부하고 그 해 전액 장학금까지 받게 되었지만 나는 전혀 고수 엄마가 아니었다.
역시 육아는 현실인가. 결국은 sns 속 다른 엄마들에게 육아 꿀팁을 듣는 것이 더 현실적이고 실용적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매일을 온라인 바다에서 전전했다. 나는 아이의 책이나 교구를 사려 이리저리 기웃거리고 있었다. 그런 나를 느끼며 이렇게 또 내 관심사가 바뀌었음을 깨달았다. 가성비 좋은 아이 물건을 찾고 몬테소리 환경으로 집안을 꾸미고 발도르프 육아방식에 대해 고민하고 노력했다. 엄마표 영어도, 집콕 놀이도 놓칠 수 없었다. 이렇게 엄마가 되며 그 삶을 살아가며, 이전에는 모르던 완전히 새로운 세상과 시장 속으로 또 흠뻑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갑자기 나는 '내 인생 첫 번째 사업'을 시작했다.
'파티 플로리스트'의 삶.
파티 플로리스트가 되었다. '엄마의 탄생'보다는 덜 했지만, 이 또한 ‘완전히 새로운 곳’으로 향한 순간이동이었다. 이 일은 자격증을 따거나 어느 전문 플로리스트 과정을 수료하며 갖게 된 직업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나는 돌. 팔. 이. 였다. 심지어 그럴싸해 보이는 '파티 플로리스트'라는 이름마저 내가 스스로 지은 것이다. 낯설고도 생소한 분야. 나는 이 세계를 어떻게 알고 어떻게 이 일을 시작한 것인가?
이 또한 엄마라는 삶을 살아가며 자연스레 마주한, 나의 '새로운 관심사'로부터 시작된다. 살짝만 더 거슬러 올라가 보자. 때는 긴긴 7년의 시간을 버티고 이제 막 퇴사를 했을 당시. 나에겐 지친 맘을 달래줄 여유와 휴식이 필요했고 마침 뱃속에 아이도 있어 태교의 명목도 있었으니, 그때가 바로 새로운 취미를 만들기에 아주 적절한 시기였다. 그래서 나는 이 자유의 시간, 흠뻑 꽃을 만지고 그림을 그렸다.
퇴사 후의 자유 시간 동안 플라워 클래스에 참여하며 꽃을 좋아하게 됐을 뿐이다. 그러다 아이를 낳고 키우고, 아이가 첫돌을 맞이 했을 때 아이의 돌잔치를 직접 꽃으로 연출하며 '엄마가 셀프로 상차림'을 했다는 것에 만족했을 뿐이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 솜씨가 너무나 감각적이고 좋았다. 전에 '신혼집 셀프 인테리어' 사진을 온라인에 업로드했듯 이 '생화 파티 스타일링' 사진도 자랑하고 싶었다. 그래서 맘 카페에 올렸다. 그것이 사업의 시작이었다!
내가 했던 모든 경험이 언젠가는 쓸모 있다. 나는 늘 그렇게 생각해왔다. 그래서 물욕은 별로 없으면서도, 특별한 경험과 체험을 위한 여행에 그렇게도 관심이 많았을 테다. 그렇다고 늘 새롭고 즐거운 경험만 반기고 좇았던 것은 아니다. 삶에서 어떤 실패나 좌절을 겪더라도 '당장은 힘들지만 이것은 모두 나를 더 성장시키기 위한 인생의 과정'이라 생각하고 이 경험들을 받아들이려 노력했다. 아무래도 철이 일찍 들었던 나였다. 그런데 이렇게 크고 작은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던 나 조차, 그때 그렇게 '꽃을 만지던 경험'이 나를 '사장님'으로까지 만들어 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소박했던 경험이 이렇게까지 쓸 모 있을 줄이야?!
솔직히 얘기하자면, 맘 카페에 사진을 올리기 전부터 나는 뭔가 될 줄 알았다. 그러고 보니 스스로 미적 감각이 있다 생각해 무대 디자이너의 삶을 꿈꾼 때도, 이전에 호텔, 컨벤션에 대해 공부하며 이벤트 플래너의 삶을 꿈꾼 때도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의 돌잔치를 준비하는 엄마의 시간 속, 꽃과 파티는 아주 멋진 소재였다! '내가 좋아하는 아름다운 꽃으로 파티 스타일링을 하는 것'은 나에게 딱이란 생각이 들었다. 분명 수요도 있을 터였다. 나는 별 고민도 없이 사업자 등록을 신청했다. 그리고 역시, 나의 예상은 적중했다.
사진과 글을 올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생화 돌잔치를 원하는 가족의 의뢰를 받았다. 그리고 또 그 돌잔치를 스타일링한 사진으로 더 많은 홍보를 하고 새로운 의뢰를 받았다. 플라워 스타일링 자체도 괜찮았지만, 아무래도 나는 돌잔치를 준비하는 엄마의 입장을 잘 알았기에 친근하고 다정하며 세세한 상담이 가능했다. 그 덕에 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 5성급 유명 호텔의 돌잔치 플라워 스타일링도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돌팔이 주제에 정말이지 급격한 성장이었다.
이 일에는 많은 장점이 있었다. 우선은 내가 사장이기에 일의 스케줄을 내 맘대로 조절, 결정할 수 있었고, 보통의 돌잔치는 주말인지라 나는 일주일에 한 번, 주말에만 일을 하면 되는 거였다. 그리고 평일은 사랑스런 아이를 육아하며 엄마로서 충실히 살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일은 내가 좋아하는 꽃을 가지고 일하는 것이었다. 계절마다 다른 꽃은 참 아름다웠다. 내가 열심히 준비하고 세팅한 결과물을 주인공 가족들이 좋아해 주면 '중요한 날 그 자리를 함께 빛낼 수 있었다'는 마음에 커다란 뿌듯함이 느껴졌다. 좋은 일이었다. 나는 주말마다 예쁜 꽃을 한 아름 들고 파티가 열리는 멋진 공간으로 향했다. 향기롭고 아름다운 삶의 현장이었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그 화사하고 반짝이는 순간의 이면에도, 사실은 여러 가지 제약과 단점이 있었다. 우선은 평일엔 아이와 집에 함께 있으면서 주말에 단 하루 일하는 것으로 적당한 돈을 벌 수 있다 생각했지만, (신규 업체임에도 너무나 감사하게도) 쏟아지는 예약 문의와 상담에 몸만 아이와 함께 있을 뿐 일주일 내내 24시간 내내, 뭔가 일을 하는 것도 안 하는 것도 아닌 애매한 상태로 항상 일에 매여있었다. 아이에게 밥을 먹이거나 아이와 놀이를 하다가도, 자꾸 휴대폰을 들여다 보고 고객 응대를 하자니, 이것이 '내가 원하던 육아와 일의 병행'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나에게는 돌잔치뿐만 아니라 스몰웨딩의 문의 또한 자주 들어왔는데, 웨딩이 아니고서라도 '누군가에게 세상에 단 하루뿐인 굉장히 중요한 날'을 내가 준비하고 마련한다는 것에 점점 상당한 부담감이 밀려왔다. 파티를 채우는 꽃장식 하나하나가 나에겐 세상에 내놓는 하나의 작품이었다. 이런 작품 앞에서 나는 늘 나름의 완벽을 가했고 꽃 한 송이 한 송이에 최선을 다했지만, 때때로 꽃은 '살아있는 생물'이기에 파티 당일의 마지막 순간까지 아주 섬세한 손길과 보살핌을 요구하며 나를 긴장시켰다. 나는 점점 더 '제대로 꽃을 공부한 것도 아닌 내가 과연 이 기대와 부담을 앞으로도 계속 만족시킬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려운 점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파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는 카드나 포스터를 디자인한 후 인쇄를 의뢰하는 것도 있었는데, 업체의 사정에 의해 인쇄나 배송이 미뤄지는 날이면 나는 전화를 붙들고 사정사정을 했다. 업체와의 관계에서 가장 힘들었던 건 사실 영세 자영업자를 향한 호텔의 갑질(?)이었지만, 그 서글픈 경험들에 대해선 굳이 다루지 않겠다. 어쨌거나 이것이 기획, 제작, 주문, 마케팅, 홍보, 현장관리, CS 등 모든 것을 혼자 해야 하는 작은 1인 기업의 현실이었다.
그런데 참 웃프게도 나의 1인 기업은 온전한 1인 기업이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난 운전을 잘 못했다! 10년 전에 딴 내 운전 면허증은 신분증일 뿐인 장롱면허. 결국 파티를 장식할 꽃과 소품들을 옮기는 건 신랑의 몫이 되었고, 평일 내내 힘들게 일하고 온 신랑은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주말이면 나의 일에 동원됐다. 이것은 이미 1인 기업 아닌 1인 기업. 악덕 사장은 신랑에게 알바비도 주지 않았다.
나는 적절한 이윤을 내는 것에 미숙한 초보 사장이었다. 지금 와서 돌아보니 아마도 나의 에너지를 바쳐 퍼주는 식의 장사를 한 것 같다. (이 또한 나를 키우는 경험이라 생각해야 할까?) 그 소박한 돈을 벌기 위해 엄마, 아빠가 주말에 일을 나가니, 돌이 막 지난 2살 아기도 주말이면 어김없이 파티 장소로 따라나섰다. 때때로 아이를 돌봐주기 위해 친정엄마나 시누이까지 출동되는 날이 있었다. (맙소사!) 꽃들이 함께 하는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에서 결코 세 사람, 네 사람의 인건비는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그동안 나를 지켜주던 울타리가 얼마나 감사했던가.
나는 늘 '진짜 내 일'을 찾고 싶었다. 사회가 생각하는 전형적인 삶을 살아오면서 그 길을 단계 단계 착실히 밟아오면서, 평범한 삶에서 조금은 인정을 받았지만 늘 답답함을 느꼈다. 벗어나고 싶었다. 다른 길로 가보고 싶었다.
그래서 이렇게 '날 것'으로 도전했던 첫 번째 사업이었다. 익숙한 곳을 떠나 낯선 곳으로 발을 내딛으며 '주위의 기대에 맞춰 다다른 자리가 아니고서라도 충분히 멋진 일을 하는 내가 될 수 있다' 생각했다. 시키는 일을 하는 '톱니바퀴'가 아니라, '일의 주인'이고 사장이 되어 나의 시간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시간을 잘 활용하여 일과 육아를 모두 잘 해낼 것'이라. 나는 그렇게 믿었다.
안전한 울타리는 답답하다고 생각했다. 밖에서도 충분히 잘할 수 있다며 큰소리쳤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제대로 된 준비 없이 만났던 맨땅은, 차갑고 딱딱했고 아팠다. 나는 조금 예전의 온실이 그리워졌다. 그 안에선 온실 밖이 자유롭고 진취적이고 아름답게 보였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이제는 깨달았다. "직장이 전쟁터라고? 밖은 지옥이다."라는 '미생'의 대사가 조금 실감이 났다.
하지만, 이미 온실 밖의 공기를 마신 나에겐 '다시 온실로 들어가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이미 무언가를 하고 싶고 해야 한다는 마음이 부풀어있었다. 첫술에 배부르랴? 이번 판은 묻어두고, 어쨌거나 나는 다시 알맞은 일을 찾아야 했다. 그게 무엇인지 찾기 위해 헤맬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삽질은 이미 시작되었다. 나는 어딘가에 숨어있는 금을 찾아야 했다. 세상을 향한 탐방과 기웃기웃이 다시 이어졌다. 그리고 나는 곧,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