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량 보존의 법칙, 언젠가는 방황한다

by 맘약

지금 이 순간, 누군가는 취업을 꿈꾸고 누군가는 퇴사를 꿈꾼다. 나도 그 전혀 다른, 그러나 어쩌면 일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같은 정도의 간절함을 지닌, 두 가지 꿈의 과정을 모두 겪었다. (취업의 이야기를 시작하려니 벌써 10년이나 시간이 지났다는 것에 조금 충격을 받았..)


내 분야에서는 사실 '취업' 그 자체보다, 졸업을 하고 국가 고시를 치른 후 '면허를 따는 것'이 더 어렵고 중요한 일이었다. 면허를 따기 위해 국사 고시를 준비하던 당시, 나는 대학에서 배운 모든 것들을 머릿속에 욱여넣느라 참 많이 힘들어했다. 시험에 출제되는 과목은 12가지,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각 과목 모두가 유기적으로 맞물렸기에 결국은 '약학대학 학부과정의 모든 것'을 알아야 했다.


긴긴 수험 기간. 그동안 미리미리 성실하게 공부해놓지 않은 '과거의 나'를 생각하며, 나는 매일을 자책하고 후회했다. 외울 것은 산더미였는데, 느리게 시작했기에 하나하나 짚고 넘어가야 했고 그럼에도 계속 잊어 다시 공부를 했다. 나는 친구들의 일반적인 학습 진도를 한참 늦게 따라갔다. 답답하고 막막했다. 그러나 나를 가장 힘들 게 했던 건, 함께 공부하는 수많은 동기들 가운데 나만 시험에 똑 떨어질 것 같은 불안함과 초조함이었다. 책 위로 또르르 눈물이 흘렀다. 그러한 눈물을 매일 닦으며 그 계절, 참 치열하게 공부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꿈을 꾼다. 유급을 당하거나 졸업을 못하거나 시험에 떨어지는 꿈. 그런 꿈을 꾸다 화들짝 놀라 일어나면, 다행히 지금의 나는 '유급을 당하지도 않았고 무사히 졸업을 했으며 시험에 합격해서 이미 약사가 되었고 그 이후로도 한참 시간이 지나 무탈하게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안심한다. 그랬다. 그렇게나 힘들게 노력해서 얻은 약사의 길이었다.




그런데 7년 후, 나는 퇴사했다. 어쩌면 나에겐 그렇게 간절히 합격과 취업을 바랐던 시간보다 오히려 퇴사를 원하고 바랐던 시간이 더 길었던 듯싶다. 선물과 같은 아이가 내 뱃속에 찾아온 때에 나는 도비의 삶을 벗어나 자유를 얻었다! (물론 그건 잠깐의 자유였다.)


출산, 그리고 현실 육아! 새롭게 마주한 세계는 참으로 막막했다. 이제까지의 삶과는 완전히 다른 삶.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가 가장 편한 때'라는 격언은 진정 사실이었다. 배가 터질 듯 부풀어서 의자에 앉고 일어서는 것조차 내 맘대로 되지 않았던 만삭 때에도, 이 정도로 낯선 세계가 펼쳐질 줄은 몰랐다. 나는 흐물흐물 이상하게 축 늘어져 가슴이 벌어지는 수유복을 입었고, 도무지 들어갈 생각 없는 배와 시큰시큰한 손목, 여기저기 헐렁헐렁한 살덩어리를 보고 있었다. 그게 나였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 있을까? 이런 나를 바라보는 것은 꽤 충격적인 일이었는데 마음을 가다듬을 여유는 없었다. 내게서 기본적인 삶을 위한 밤낮의 시간을 앗아간 아이가 자꾸 울었기 때문이다.


뱃속의 아기는 울지 않고도 잘 자랐는데, 태어난 아기는 시시때때로 배고프다 안아달라 불편하다 울어댔고 심지어 똥도 쌌다. 갑자기 ‘성실히 공부하고 일하며 사람들과 어울리던 사회인의 나'가 미화되어 나타났다. 병원에서의 삶을 그토록 힘겨워했음에도, '인간은 현실의 고통 앞에서 과거의 기억을 쉽게 잊나 보다' 싶었다. 하지만 나는 역시 적응의 동물이었다. 새로운 존재와의 삶을 차츰차츰 받아들였고, 아이는 날로 날로 사랑스러워졌다.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나는 육아의 일상을 비교적 잘 살아갔다. 엄마의 신분에 만족하게 되었다.




이전 직장에서 함께 일하던 동료들. 이들은 대부분 나와 비슷한 인생을 살았다. 학창 시절부터 입사까지가 그래 왔듯, 직장 생활을 하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것도 거의 비슷한 길을 걸었다. 하루 종일 아이를 돌보며 보내던 하루하루, 아이의 낮잠 혹은 육퇴 후에 나는 sns를 통해 육아 중인 나의 동료와 그의 사랑스런 아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마도 당분간 우리들은 계속 비슷한 일상을 보낼 거라고.


하지만 우리의 아이들이 돌이 지날 무렵, 나의 친구들은 하나 둘 옛 직장으로 돌아갔다. 일하는 삶, 사회인의 삶, 원래의 삶으로. 아니 원래의 삶에다 이제는 육아까지 해야 하는 '워킹맘'의 신분으로 승격됐다. 친구들의 이러한 신분 상승(?)에 슬슬 나도 '일하는 나'를 다시 떠올렸다. 신랑은 아무 말 없었지만, 이제는 나도 '사회가 바라는 30대 여성의 두 가지 역할'을 모두 해야 할 때가 된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 이전의 자리는 내가 바라던 삶이 아니었다. 나는 핑계를 댔다. 지금의 나는 육아를 성실하게 하고 있으며 그것만으로도 나는 내 임무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이러한 핑계로, 살림에 도움이 될 만한 '가장 현실적인 맞벌이의 길'을 고사했다. 어쩌면 할 수 없어서 못하는 것보다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것이 더 얄미운 일일 테다. 속으론 때때로 ‘육아 말고 뭐라도!’를 외쳤지만, 겉으로 드러난 건 ‘육아를 오롯이 할테니 시간을 달라’는 말이었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결국, 30이 훌쩍 넘고 아이를 낳고 나서야 ‘내가 원하는 일을 제대로 찾고 싶다’는 뜻이었다. '엄마의 사춘기'가 시작된 것이다.




10대 시절. 나는 성실한 모범생이었다. 열심히 노력해서 성취를 이루고, 친구들에게는 부러움을 어른들에게는 칭찬받는 것을 좋아했다. 나에 대해 그다지 깊게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나를 수식하는 반장, 1등과 같은 몇 가지 단어들을, 나는 나의 정체성이라 여겼다. 그래서 인생의 목표를 정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받고 남들이 인정할 만한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때문에 사춘기도 방황도 따로 없었다. 그저 열심히 위를 향해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그러나 인생은 원래 그러할 테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 나는 수능에서 원하던 점수를 얻지 못했고 실패와 좌절의 시간을 겪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나이였지만 대견하게도 그러한 인생을 잘 받아들였고, 호흡을 고른 후 다시 정진했다. 그러나 또다시 실패와 좌절. 하지만 난 잘 참고 긴긴 감내의 시간을 보냈다. 그 결과 어느 정도는 사회와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괜찮은 길을 추천받았고 그렇게 나는 그 길로 향했다. 내 '미래의 직업'을 선택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나는 깊은 어려움과 그것을 딛고 일어나는 시간의 흐름에서도, 스스로의 길을 찾는 '온전한 방황'을 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리고 어느덧. 엄마가 되었다. 아이를 키우며 사회적인 교류가 없는 반인간적인 삶에서, 그리고 하루하루 성장하는 아이와 정체되어 사회에서 잊혀가는 나를 보는 삶에서, 그제야 나는 나 자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였다. 엄마라는 신분이, 어쩌면 나를 '내 인생의 가장 처음 시점'까지 살피게 하며 나의 이름을 찾도록 '방황의 시간'을 마련해 준 결정적인 자아가 아닌가. 사춘기였다. 이것은 '엄마의 사춘기'였다.


‘나는 엄마다. 그러나 엄마로서만 살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무엇을 잘할까? 무엇을 좋아할까? 그러나 현실적으로, 나의 기량과 재능을 발휘하며 경제적인 성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가족을 사랑한다. 아이를 잘 키우고 싶다. 그러니 일에 매달리는 시간은 적어야 한다. 그렇다면 인풋은 적지만 아웃풋이 많은 일을 찾아야 한다. 스스로 만족하며 사회적으로도 그럴듯한, 일과 육아를 병행할 수 있는 생산적인 것은 무엇일까?’


꿈이 컸다. (하지만 인생의 첫 방황이니 박수를 쳐주자.)


무언가를 시작해야 했지만, 도무지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세상을 모르는 하룻강아지에겐 두려운 것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곧 아무런 준비 없이 사업을 시작했다. 그 첫 번째 도전은 '파티 플로리스트로서의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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