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를 꿈꾸던, 엄마 이전의 삶

by 맘약

육아 말고 뭐라도, 그리고 생산적인 일. 이런 고민의 길에서 가장 편하고 쉬운 방법은, 사실 임신-출산-육아 쓰리콤보 이전에 내가 하던 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나는 이미 퇴사를 했지만 그 일을 다시 시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경단녀’라는 슬픈 말이 엄마들을 옥죄는 현실에서 그나마 내가 쭉 마음의 여유를 가졌던 건, 지난 과거 힘겨운 인내와 바꾼 면허증 덕분이리라.


학창 시절, 나는 꽤 성실히 공부하는 모범생이었고 그 덕에 괜찮은 대학에서 유용한 학문을 공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졸업과 국가고시를 통해 전문직의 면허를 얻었다. 그 이름은 약사. 그 후 나는 하얀 가운을 입은 병원 약사로서 유명 대학병원에서 7년을 일했다.


다행이었다. 약사라는 직업은 직장을 그만두는 것으로 없어지는 명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육아로 경력에 공백이 가득하지만, 언제든 다시 일을 할 수 있었다. 참 감사한 일이었다. 하지만, 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갑갑한 상황 속에 하루하루 지쳐있던 안쓰러운 그때의 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직장인들과 마찬가지로 병원 약사의 삶 또한 미천한 월급쟁이 신분 그 자체였다. 장소만 다를 뿐 똑같은, 딱딱한 조직의 톱니바퀴 일상. 물론 병원에 알맞은 세심한 톱니바퀴가 되는 과정은 아주 약간 까다로웠다. 하지만 그 역시 누구나 대체할 수 있는 톱니바퀴일 뿐이었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약장엔 크고 작은 약들이 가득 차 있었다. 약장은 병원의 규모만큼 크고 넓고 많았다. 알약, 물약, 주사약 등 종류와 모양은 제각각이었지만 이렇게 약이 가득 찬 약장을 보면 이곳이 마치 대형 도서관의 서가인 듯도 했다.


약국의 기본 업무는 이러했다. 처방을 검토하고 약을 조제하고 조제된 약을 감사한 후 복약안내를 하며 투약. 이런 흐름 속에서, 맨 처음 컴퓨터에게 업무를 하달받고 마지막에 환자를 대면하기까지 우리는 하루 종일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 안에 있었다.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라, 진짜 뱅글뱅글 돌아가는 초록색 컨베이어 벨트였다! 물론 우리 약국의 업무 흐름 앞과 뒤로도, 병원에선 수많은 컨베이어가 돌아갔다.


이곳은 환자가 많은 병원이었다. 하지만 손은 늘 부족했다. 직원 수에 비해 많은 일이 주어진 까닭에 우리는 매일을 허덕였다. 사실 요즘 같은 한 여름에 생각해보면 좋은 점도 있었다. ‘비싸고 고귀한 약'님께 알맞은 온도를 맞춰 드리려, 에어컨이 1년 내내 빵빵하게 돌아갔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언제나 바쁘게 뛰어다녔기에 에어컨이 가동되는 한 ‘겨울’에도 땀을 뻘뻘 흘리며 일했다.


너무나 바빠서! 근무 시간엔 화장실 조차 제대로 갈 수 없었다. 일하는 공간엔 개인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컴퓨터는커녕 편하게 앉을 의자도 없었다. 병원의 사람에겐 주말도 없었다. 우리는 그저 하루하루 돌아가고 있었다. 회복도 충전도 못한 채. 이건 어딘가 문제가 있었다.


약국의 근무는 생각보다, 다양한 업무가 가득한 ‘체험 삶의 현장’이었다. 주문, 진열, 보관, 출납관리에선 한 껏 육체 노동을, 통계, 분석, 보고에서는 한 껏 서류 노동을 했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크리티컬한 건 아마도 감정 노동이었을 터.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하고 약사가 되어 씩씩하게 일하는 젊은 선생님들을, 때때로 겁먹고 울게 만든 많은 순간이 있었다. 소리치고 화내고 재촉하고 무언가를 던지는 무섭고 이상한 환자들. 나 또한 거기서 꽤나 힘든 시간을 보냈다. 당시엔 정말이지 그들을 굉장히 교양 없고 이상한 사람들이라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건강검진을 위해 직원이 아닌 환자로서 우리 병원을 찾았다. 그리고 그제서야, 이전에 약국 앞에서 그렇게 화가 나 있던 환자들의 마음을 조금은 깨달았다. 아마도 환자들은 직원 개개인에게 화를 낸 것이 아닐 터였다. 병원의 복잡하고 답답한 시스템, 그리고 그 시스템에 어려움과 불편을 느끼는 환자들을 제대로 공감하거나 도와주지 못하는 약국의 시스템에 화를 내었던 것일 테다. 나는 이미 병원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음에도, 환자로서 찾은 병원은 낯설고 어렵고 복잡했다. 그리고 그날 마주한 여러 직원들은 반복되는 많은 업무 때문에 대부분 사무적이고 약간 지쳐 보였다. 나조차 이렇게 느낄진대 일반 환자들은 오죽할까. 직원도 힘들고 환자도 힘든 병원. 이건 정말 문제가 있었다.


나는 우리 조직이 개선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때때로 주니어의 의견을 대표하여 현재의 문제점을 윗선에 이야기했다. 이런 이야기를 할 때 나는, 내가 마치 잔다르크가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굉장한 나만의 착각이었다. 떠올려보니 나는 목소리가 작은 편이었다. 시스템의 문제에 대해 한 두 번 넌지시 이야기를 했지만, 답변이 없다 싶으면 그에 관해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랬다. 나는 갈등을 싫어하고 순응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한다고 해서 나에게 특별한 이익이 있는 것도 아닌데, 굳이 피 튀기며 싸우기는 싫었다. 변화의 욕구와 개선의 의지는 있었지만, '집단의 규모가 커다란 만큼 나의 티끌 같은 의견은 쉽게 묻히게 됨'을 이제는 슬슬 받아들였다.


우리는 모두 목소리가 작았다. 문제점은 늘 그대로였다. 정체된 상황과 지속적인 버거움에, 나는 조직에 대한 관심, 열정, 그리고 일에서 느끼던 보람이 점점 줄어들고 있음을 깨달았다. '사람을 향하는 친절하고 따뜻한 참약사가 되리라' 들뜬 마음으로 첫 출근 한 지 몇 해, 이제는 너무나 많은 시간이 흘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이 조직을 떠나는 것’ 뿐이리라 생각했다. 한때는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하는 거’라며, 조직에 속하며 얻은 소속감, 우월감, 만족감에 감사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나 스스로 의지와 기쁨을 갖고 선택한 일을 이제는 늘 불만으로 삼고 있었다. 퇴근 후 동료와 기울이는 맥주잔만이 직장 생활에서 느끼는 소소하고 유일한 기쁨이었다. 대부분의 직장인처럼 나도, 매일 퇴사를 꿈꾸었다. 그러나 퇴사에 알맞을 핑계와 시점을 찾지 못했다. 회사의 한숨은 집까지 왔고, 나의 한숨에 신랑의 걱정도 늘었다.


그러다, 아이가 생겼다! 임신은 그 자체로 놀랍고 아주 감사할 일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정말이지 아주아주 적절한 시점에 찾아온 대단한 무언가였다. 특별한 계기를 만들지 못하여 고리를 끊지 못하던 나에게 매우 특별하고 설득력 있는 퇴사의 이유가 생긴 것이다. 알맞은 때에 나에게 와준 정말 고맙고 사랑스런 이 아이. 아이를 키워서 낳고 기르겠단 이유로 난 병원을 뛰쳐나왔다. 이 아이가 정말 고마웠다. 덕분에 난 자유를 얻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땐,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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