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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담 Aug 18. 2023

향수(鄕愁)의 향연(饗宴)

-<지용제>를 다녀와서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지만, 이른 아침과 저녁에서 가을내음을 맡습니다.

아래 글은 지난 초가을 <지용제>를 다녀와 쓴 글을 공저로 출간하면서 다시 정리했어요-



다시 시 쓰고 싶어.

진짜?

응, 시를 써야 가슴 속 응어리가 조금이라도 풀려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아. 많이 늦었지만, 해 볼래.

좋네, 오랜 꿈 다시 찾은 거야? 박 시인님?


 겪지 않았으면 좋았을 아픈 이별을 몇 번이나 해야했던 남편의 결심에 크게 내색하지 않고 시집을 사 주고 여러 시인들의 좋은 작품들을 공유하는 것으로 응원했다. 쉽지 않은 창작의 길이며, 놓고 지낸 긴 시간에 퇴색은 되었을지 모르나 그의 세상을 이미지화하는 탁월한 시선과 언어표현 능력을 믿기에 그 결심이 그를 살리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긴 밤 무거운 어깨 짐으로 잠 못 들고 아파하며 뒤척인 시간을 시로 이겨내길 간절히 바랐다.


 가을 초입은행잎이 선선한 바람에 영롱한 노란 빛을 더해 가고 하늘이 기어이 끝없이 높아만 가는 날들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온 만물이 익어가는 좋은 계절이다. 많이 보아야 많이 담고 풀 수 있다 여기는 우리는 여행에 진심인 편이다. 이 좋은 계절, 충북 옥천 여행을 계획했다. 명목은 한국 현대문학사에 순수서정시를 개척한 <향수>의 시인이자 수 많은 문학인들을 추천하여 등단시킨 탁월한 안목의 시인 정지용을 만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팬데믹 이후 3년 만에 대면으로 개최하는 지역축제인 <지용제>를 즐기고 했다. 사실 몰래 신청해 둔 '지용 백일장'은 출발 전에 넌지시 알렸고 다소 민망해했으나, 곧 보자는 결연의 얼굴을 보여 다행이었다.


그냥 보는 거야, 알지? 부담 갖지 말구.

고교 문예반 활동할 때 백일장 생각난다. 고마워.


 그동안 꽤 메모 끄적이며 습작한 사실을 알기에 기회를 주고 싶었다. 담은 걸 풀어야 또 채울 수 있기에.

가는 내내 우리는 정지용 시인의 시를 찾아 읊으며 그의 맑은 정서와 시어 조탁 능력을 칭찬하며 부러워했다.


 옥천은 온 마을이 그냥 정지용이었다. 마을 길 이름도, 페는 물론 상회나 신협의 이름에조차 '향수'가 붙고 담벼락마다 온통 그의 시가 새겨져 있다. '향수 심부름센터'는  좀 우스꽝스러웠지만 그에 대한 애정이려니 했다. 카페 이름이 <꿈엔들 잊힐리야>라니 그저 들어가고 싶은 설렌 벅찬 유혹을 느끼게 한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라는 교육적 측면에서 보면 옥천은 또 다른 지용 시인이 탄생하기에 적합한 곳이리라. 유려한 자연 경관에 온 마을이 이러하니, 시적 감수성을 키우기에 이보다 좋으랴 싶었다.


 우선 정지용 시인의 모교인 죽향초등학교부터 갔다. 꽤 넓은 운동장과 아기자기하니 낮은 건물이 정겨운 곳으로 운동장을 둘러 선 플라타너스의 우람한 둥지와 너른 이파리, 동글동글 열매가 반기는 곳이었다. 초등학교 강당에서 간단한 백일장 개회식을 가진 후 시제 발표가 이어졌다. <발걸음>이라는 상당히 구체적이면서도 수 많은 은유가 가능한 좋은 시제였다. 나야 남편의 동기부여가 목적이었고, 시 창작에는 별 재주가 없는지라, 얼른 교실을 나왔다. 집중하는 그를 응원하며 플라타너스 그늘에서 어린 지용을 추억하며 그를 기다렸다. 참가에 뜻을 둔다던 소박한 말과 달리 꽤 진지하게 임하며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킨 그를 격려하며 발표까지 남은 시간에 본격적으로 축제 <지용제>를 즐기기로 했다.


 초등학교에서 시골길따라 5분 정도 걸으면, <정지용 생가>와  <정지용 문학관>이 이웃해 있다. 두 건물 앞에 지즐대며 흐르는 실개천에도 이미 그의 향수 시 구절뿐 아니라 여러 조형물로 꾸며져 있다문학관 앞뜰에 서 있는 작가님 동상이 반갑다. 향내 가득 품으며 반기는 국화길 따라 들어가면, 그의 전신 모형 마네킹이 의자에 앉아 반겨준다. 시인님과 다정하게 한 컷 안 찍을 수가 없다. 전시실을 들어서면 제일 좋아하는 시 <호수>가 멋드러지게 쓰인 액자가 보인다문학관 내에 울려 퍼지는 익숙한 가곡, <향수>가 반갑다. 스크린 터치대로 시가 낭송되는 체험도 할 수 있고, 그의 생애를 보여주는 영상실과 시인의 시를 직접 낭송할 수 있는 체험실도 있다. 현대 시문학사에서 그의 위상을 잘 보여 주는 설명과 역대 <정지용문학상> 수상자들이 나열된 사진이 근엄하다.


  문학관을 나서면 바로 이웃한 초가인 정지용 생가 입구가 나온다. 정말 소박한 시골 여염집이다. 음악 소리에 얼른 들어가 보니, 운 좋게 조원경 작곡가가 직접 반주하는 작은 콘서트를 볼 수 있었다. 귀여운 동요 <예쁜 아기곰>의 작곡가로, 정지용의 시 '호수'에 곡을 붙여 공연해 주었다. 귀한 시간이었다.


 문학관과 생가에서 약 200m 정도 거리에 있는 <지용문학공원> 인근을 축제의 장으로 꾸며 차량 통제하여 진행하고 있었. <詩끌북적>-지용제 부제답게 축제의 장다웠다. 각종 단체에서 부스를 마련하여 체험도 하게 하고 무료 시음이나 선물도 챙겨주느라 번잡했다. 우리는 향수 신협에서 초빙한 서예작가의  "다 괜찮다"는 친필 문구를 표구한 액자를 선물로 받았다. 우리에게 딱 필요한, 적절한 위로였다.


 무엇보다 축제엔 먹거리가 빠질 수 없다. 푸드트럭이며 각종 길거리 군것질에, 천막 주막 안에는 없는 거 빼곤 다 있는 시골 장터 분위기 그대로였다. 각종 음식들의 향이 서로 뒤엉키어 손님을 끌어당긴다. 게다가 시골 장터에서나 볼 수 있던 품바 공연을 했다. 우스꽝스런 행색과 걸죽한 입담과는 달리 장구랑 북을 어찌나 열정적으로 치던지, 저이도 예술인이구나 느꼈다. 호응하는 관객들의 흥도 볼거리였다.


 정작 자신의 삶은 시대적 굴곡으로 순탄하지 못했으나, 그의 작품은 온전한 사랑을 받으며 온 마을이 그를 추억하고 있었다. 온 몸으로 그를 담뿍 느끼고 담고 온 날이었다. 언어를 고르고 골라  갈고 닦아 어여쁘게 표현할 수 있는 시인이라면 분명 타고난 섬세한 감수성을 지녔으리라. 이는 나고 자란 고향산천의 풍성함이 준 영향이기도 하리라. 시인은 시 창작에 대한 열정뿐 아니라 미래의 꿈나무 시인들의 등단을 위해서도 아낌 없는 노력을 하셨다. 정작 본인은 친일이니 월북이니 하는 질타를 받는 고초를 겪었으나 아름다운 그의 시는 분명 우리의 소중한 문학적 자산이다. 


 옥천은 그에 대한 온 마을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곳이자 그로 살아가는 곳이었다. 첫 술에 배 부를 수 없다고, 남편도 기대하지 않은 장려상 수상으로 더 노력하는 시인이 되리라 믿는다. <지용제> 축제를 통해 절망에 젖어 있던 한 사람이 다시 시를 쓸 자양분을 얻어 간다면 이보다 좋은 축제가 있을까.


#지용제 #옥천여행 #백일장 #지역축제 #정지용 #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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