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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연희 Jul 07. 2022

드라마 '환혼'을 계속 봐야 하는 이유

인정하자. 나는 오지라퍼다.

흡사 하이에나처럼 드라마 사냥에 몰두하는 쓸만한 이유를 적어도 세 개 이상은 댈 수 있는 사람, 손.

해야 할 일에 깃발은 꽂혔고 매진, 정진, 급발진을 해도 부족한 때에 오히려 드라마 탐험에 더욱 열을 올리는 거, 나만 그런 거 아니다에 오백 원을 내놓는다. 


그렇게 얻어걸린 드라마, 환혼.


내가 아무리 말 많고 시간 많은 한량이라 해도 이렇게 글 파고 사진까지 퍼 나르는 정성을 들인 것을 보면 이 아이는 매력적인 작품임이 틀림없다. 단 두 회만 봤을 뿐인데도 말이다.


하지만 그 두 시감 남짓한 시간 동안 풀리지 않는 매듭들이 있었으니. 


아무리 괜찮은 드라마라도 첫 몇 회분 정도는 인고의 시간을 보내야만 뒤에 가서 진정한 재미를 느끼게 된다는 고진감래의 자세도 잘 알고 있고, 친절한 선배들이 콕 집어 안내하는 어떤 고비 - 예를 들어 CG 압박이라든지 - 를 넘으면 드라마를 완주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도 안다. 하, 필자가 드라마에 대해 모르는 것이 무엇이랴. 일 찌기는 다모 열풍 시절, 무삭제 감독판 영상이 담겼다는 한정판 시디 세트를 태평양 건너에서도 마다하지 않고 구입하던 뜨거움이 있었고, 영어를 배운다는 명목 하에 적지 않은 세월 동안 매일 두 시간 넘게 미드를 시청하며 드라마 근력을 키워준 '준 마니아' 급 인사가 바로 나다. 한드, 미드를 가리지 않고 넘나들며 재미 자체를 탐닉하기도 하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삶을 훔쳐보고 뜯어보며 공감하고 분 내고 깨달으며 그들을 잊지 않고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아 왔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마음이 적잖이 불편한 것은 두 주인공의 출생 및 존재 상황이다. 


남자 주인공인 장욱의 태생을 보자. 한 나라의 임금이 그 나라의 제 이인자라고 해도 무방한 신하, 장강을 속여 그 아내를 취하고 거기서 아들이 태어났으니, 그가 바로 우리의 주인공 장욱이다- 적어도 극은 아직까지 시청자가 그렇게 알도록 내버려 두고 있다-. 그 비열한 배신행위를 당한 장강은 산고로 죽어가는 아내 앞에서도 어쩔 수 없는 분노 때문에 아내를 보듬 지도, 갓 태어난 아이를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급기야 태어난 아이의 기문을 막아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술법을 익힐 수 없는 반 불구, 아니 오히려 제대로 불구의 인생을 만들어 버린다. 


태어나 보니 죄인의 자식?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설정이다. 아버지의 죄가 내 죄는 아니니까 말이다. 사회적 편견이나 냉혹한 현실 속에 성장하며 아버지의 잘못을 끌어안고 슬퍼하고 그런 죄를 반복해 짓지 않는 독립된 사람으로 성장하기 위해 애쓰는 인간상을 그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아버지의 죄질은 뭐랄까, 체급이 다르다. 철천지 원수였다고 해도 어려웠을 일이다. 하물며 신뢰와 충성을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군신의 도를 깨고 장강의 아내와 자녀를 범하며 그 가족을 산산조각 내었다. 죄질이 너무 악해서 보는 사람들의 마음이 비통하고 경악스럽다. 자전거를 훔치고, 졸음운전으로 사람을 죽이고, 공금횡령으로 많은 가장들을 길거리로 내몰고, 술김에 싸우다가 살인을 저지르는 그런 범죄들하고는 근원부터 다르다.


만약에 아들 장욱이, 아들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었던 애증의 아버지를 힘들더라도 받아들이고 그 뜻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사는 진중한 청년이었다면 그 또한 후일을 도모할 희망이 있을 것도 같다. 그런데 장욱은 본인의 막힌 기문을 뚫어 대호국 최고의 술법사가 되는 것, 고만 고만한 후계자 무리, 에프포의 명목뿐 아니라 실속 있는 우두머리가 되는 것만이 유일한 관심사일 뿐, 나라의 안위 따위는 안중에 없는 이기적인 모습으로 성장하였다. 그로 인해 그와 그의 대외적 아버지, 장강은 반목의 구도를 띄게 되며 이는 장욱을 장강의 아들이기보다 사악하고 끔찍한 그의 생부, 임금과 한 묶음으로 보이게 하고 있다. 


주인공이 아름답다거나 도덕적이기를 바라는 우리들의 마음은 딱 한 가지 때문이다. 이야기의 끝까지 그를 응원하고 싶기 때문이다. 하는 일마다 실패하는 무능력자에 몸뚱이마저 병들고 시들었어도 주인공은 우리가 응원할 수 있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못했지만 해 주었으면 하는 일, 주인공이 그 일을 할 때, 그 생각을 하며 노력할 때 우리는 함께 응원하게 되고 드라마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나보다 남을 배려하는 일,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일,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일을 위해 나를 희생하는 일, 옳다고 여겨지는 가치를 위해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는 일, 모두가 함께 사는 삶 속에서 충만하게 나를 사랑하는 일 같은 것 말이다. 그들의 삶은 실패로 얼룩졌을망정 마음속 나침반만큼은 잘 작동하고 있는 그런 것 말이다. 우리는 매번 그것을 확인하며 그들의 성장을 숨죽이며 응원하고 그들의 성공에 박수를 보내는 것이다. 


주인공의 출생이 천인공노할만한 것이었기에 더욱 조급하게 그의 선한 마음을 확인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시간을 여주와의 로맨스에 할애하고 코믹한 소재들이 섞여 들여와도 주인공을 바라보는 시선은 느슨해질 것 같지 않다. 언제쯤이면 그가 마침내 주인공이 되어 준비한 팝콘을 입에 던져 넣을 수 있을까. 


장욱뿐만 아니라 여주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천하제일의 살수라던지 가족을 모두 잃고 누군가의 살인 병기로 키워진 일까지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의 몸으로 환혼을 하여 살아간다?


낙수가 가족의 복수를 위해 대호국을 위협하며 사는 것은 비극이지만 그녀의 선택이었고 이제 그 결과를 마주하며 그의 진면목, 주인공으로서의 진짜 선택을 보여줄 것이다. 복수를 위해 열심히 살아온 것을 측은해하며 더 나은 선택을 하기를 응원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환혼인의 삶은 많은 가치들을 뒤틀고 있다. 강제로 몸뚱이를 뺏겨버린 무더기는 부모 잃고 눈도 보이지 않는 불쌍한 소녀였다. 그의 혼은 낙수의 죽은 몸과 함께 천부관 앞에서 불태워져 사라졌다. 그리고 그녀의 잔재인 몸뚱이가 낙수의 혼을 받아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무더기가 구수한 사투리로 "지는 무더기 구만요 도련님" 할 때 그 또랑 한 눈동자와 연꽃 같은 입술은 낙수의 것이 아니라 많은 꿈을 가지고 있었을 어느 한 소녀의 눈동자며 입술인 것이다. 그리고 그 끝은 무엇이 될 것인가. 


드라마 첫 장면에서 보여준 것처럼 환혼인은 옮겨간 육체와 혼 사이의 틈이 점점 커져가며 오래지 않아 석화되어 죽는 것이 정해진 운명이다. 지금은 낙수의 혼이 들어와 걷고 말하고 보며 무더기를 이 세상에 붙잡아 두고 있지만 사실은 처음 환혼할 때 죽인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이것은 주인공이 전쟁하며 몇십 몇백의 전사자를 내는 것과 다른 이야기이다. 무더기의 몸을 가진 낙수는 남주인 장욱과 그 몸으로 연애하고 사랑할 것이 분명한데 그들이 즐겁게 웃을 때마다 불시에 비명횡사한 진짜 무더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한번 살았던 생명이 마감했을 때 우리는 묵념하고 싶어진다. 장욱은 변할 수 있어도 무더기의 현실은 변할 수 없기 때문에 내 마음은 더욱 암울해진다. 낙수가 말끝마다 저질체력을 가진 무더기의 몸을 "쓸모없는 몸뚱이"라고 혼잣말로 핀잔줄 때마다 나는, 그 몸은 한때 누군가에게 목숨이고 전부였다고 외치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귀여운 여주인공에게 마저도 내 감정들을 쉽게 이입하지 못하고 방황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에 장욱에게 이런 추악한 출생의 비밀을 선사한 이유가 후에 왕의 적통을 이어갈 숨겨진 후계자라는 후광을 더하고자 하는 거였다면 그것이야말로 적잖은 실망이 될 것 같다. 세상 모든 물과, 비록 금지된 사술이라고는 하나 사람의 혼까지 그 출입을 좌지우지하는 술법사의 적자가 대체 무엇이 부족해서 왕의 적자까지 되어야만 했을까. 


바라기는 장욱이 그의 출생 배경이 드리운 짙은 어두움을 깊은 마음으로 수용하며 더 이상 그의 생부처럼 다른 사람을 철저하게 기만하지 않는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 낙수가 언젠가는 무더기의 비명횡사를 위로하고 자신의 이기적인 복수를 참회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극의 미래가 내가 바라보는 쪽을 함께 보는 것 같지 않아 그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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