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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니스 Jul 28. 2022

핫 플래시, 안녕?

너였구나. 궁금했어...

낮과 밤이 뒤바뀌는 멀고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나는 하루의 대부분을 침대에 누워서 보냈다. 그냥 모든 게 다 귀찮았고 직장에 복귀하기까지 아직 여유가 있었다. 

어느 날 아침인가 그렇게 긴긴 숙면 뒤에 의식이 돌아올 때쯤 무언가가 내 몸을 타고 오르는 것을 느꼈다. 

주체할 수 없는 열감. 


계절은 여름이었고, 체온이 틀림없이 나보다 몇 도는 높은 대학생 딸이 눈에 불을 켜고 맞춰 놓는 '실내 적정온도' 덕에 천정에서 불어오는 에어컨 바람이 사정없이 온몸을 때리곤 했다. 그렇다고 해서 오리털 이불을 돌돌 말고 자는 내 몸이 외부 온도에 반응하는 일은 별로 없었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는 그 오리털 이불은 아이키아에서 구입한 중저가 제품이었지만 꼼꼼히 몸을 덮고만 있으면 외부 온도에 연연하지 않고 충분히 사랑스러운 잠을 청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더운 바람이든 찬 바람이든. 그렇기에 별안간 찾아온 열감은 외부 환경 탓이 아니라 내 몸 안에서 시작한 것이 분명했다. 


순간 한기가 드나 싶었는데 삽시간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뜨거움에 휩싸였다. 반신욕 할 때처럼 심장에서 먼 곳, 발끝과 손끝에서부터 내 뼈와 살들을 샅샅이 훑어 온 몸을 정복하며 올라왔다. 차곡차곡 채우다가 마침내 심장에 도달하면 그대로 온몸이 열 덩어리로 변했다. 무슨 에베레스트 정상 등반이라도 해낸 것처럼 장엄하게 뜨거웠다. 그 열감의 온도는 습식 사우나에 오래 앉았다가 냅다 냉탕을 향해 뛰어나갈 만큼이었고, 정상에 도달하는 빠르기는 반신욕을 거북이, 사우나를 토끼에 비유한다면 다크스타라 할만했다. 탐 크루즈가 영화 탑건에서 모는 초음속 제트기 다크스타 말이다. 


어렸을 때부터 손발이 차서 생리를 시작한 이후로는 수박을 먹을 때마다 아랫배가 서늘해지곤 했다. 첫아이를 낳고 나서부터는 기본 속옷 외에도 배를 덮어주는 러닝셔츠를 입어줘야 하는 몸으로 발전했다. 밤에 잘 때 원피스 잠옷을 입었으면 하는 남편의 바람을 오랫동안 무시한 이유도 자다가 배를 덮는 천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사라지면 몸에 한기가 들어 잠을 깨우고 아랫배가 욱신거리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여름이 뚜렷한 지역에 살면서도 땀 한번 흘리지 않고 해를 났고 오메가 3을 먹은 다음부터는 감기도 앓은 적이 없어 몸이 뜨거워지는 경험은 매우 생소했다. 


"아, 또 이러네, 연희 씨 미안해! 나, 갱년기!" 이웃 언니와 베트남 쌀국수를 먹고 근처 베이커리 카페로 자리를 옮긴 우리는 그 언니가 오랫동안 살았던 싱가포르 얘기를 듣고 있었다. 그날따라 유난히 향도 없이 밋밋한 커피 맛이 실망스러워 물끄러미 테이블 위의 컵을 내려다보고 있던 나는 갑자기 무슨 말씀이실까 놀라 언니를 올려다봤다. 숱이 많은 삼단 같은 머리를 승무원처럼 단정하게 빗어 묶은 언니 얼굴이 홍당무처럼 달아오르고 식은땀이 양 귓가로 흘러내렸다. 이마에 맺힌 작은 땀방울들은 곧 낙하할 채비를 하는 것처럼 커지고 있었다. 내가 커피 잔을 내려다본 그 짧은 찰나에 메이크업 잘 먹은 뽀송한 얼굴이 그렇게 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내가 말했었지 나 핫 플래시 있다고? 난 괜찮아, 이러다 좀 있으면 가라앉아, 연희 씨는 아직 갱년기 아니지? 괜찮으면 그 옆에 메뉴판 좀 건네줄래요?" 새로 출시된 모카커피를 광고하는 삼각형 모양의 광고판은 곧 부채가 되어 그 언니의 얼굴 위로 요동을 쳤다. 


영문을 모르는 열감이 가라앉아 가고 반수면 상태에서 느릿하게 진행되던 의식이 또렷해질 때쯤 나는 그 언니를 떠올렸다. 핫 플래시다. 


열세 살에 생리를 시작한 이후로 정해진 때가 되면 꼬박꼬박 찾아오던 월경이 작년부터 오락가락 하기에 내게도 세상 모든 여자들이 겪는 폐경이 오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또래보다 잔병치례 없이 건강하고 여러 노화 증상으로부터 자유로웠기에 만으로 오십이 되는 나이에도 갱년기라는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노화가 사람마다 다른 모습으로 다른 시간대에 찾아오듯이 갱년기 역시 수많은 개인차가 있을 거라고 여겼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나에게 핫 플래시가 찾아왔다. 적잖이 당황스러웠고 그동안 건강한 몸을 유지하기 위해 이모저모로 들인 공들을 떠올리며 허탈하고 초라한 감정을 느껴야만 했다. 나도 별 수 없구나 하는. 


핫 플래시는 아직도 뚜렷하게 원인이 규명된 바 없지만 폐경기의 여성에게 흔하게 나타나는 증상 중의 하나로 에스트로겐의 감소로 인해 체온조절에 관련된 생화학 반응계에 생긴 이상 현상이라고 한다. 또한 식은땀을 동반하는 홍조와 주로 상반신에 치중된 열감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짧게는 일분 길게는 삼십 분까지 지속될 수 있으며 평균적으로 일주일에 세 번 정도 이런 증상을 겪는다고 한다. 폐경기에 나타나서 몇 년 후에 사라지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십 년이 넘도록 계속되는 사람들도 있다.    


인터넷을 뒤져 보면 대략 위의 정보들을 다양하게 짜깁기한 후에 에스트로겐이 많이 함유된 대두 식품을 권하거나 대두에서 추출한 어떤 중요 성분으로 만들어진 영양제를 팔거나 한방치료를 권하고 있다. 


처음 핫 플래시를 느꼈던 그 때로부터 몇 달이 지났고 이제 조금은 익숙해진 듯도 하다. 여독이 풀리지 않았던 그때처럼 몸이 힘들 때 찾아온다는 점, 인터넷에는 식은땀과 홍조를 동반한다고 했지만 나는 그런 것이 없다는 점, 일주일에 세 번 정도 느끼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했는데 나는 아직 그 정도로 빈번하지는 않다는 점 등 개인차가 있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폐경의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됐으며 앞으로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고 증상이 더 나빠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려서 책을 안 읽어서 시력이 그렇게 좋냐는 남편의 질투 섞인 핀잔을 들으면서도 자랑스러웠던 내 강철 시력이 어느 날 노안을 덧입게 되었을 때도 자존심은 상했었다. 하지만 마흔만 넘어도 노안에 시달리는 이웃들을 많이 보아온 터라 그냥 어깨 한 번 추스르고 예쁜 돋보기를 찾는데 마음을 집중했었다. 오십까지 버텼으면 일등은 아니더라도 선방했다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핫 플래시를 맞닥뜨린 내 마음은 어깨 한 번 보다는 제법 묵직하다. 애초에 머릿속으로 폐경을 받아들일 때 좋은 것만 오겠지 하는 기대감이 있었다. 건강하다는 자부심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더 이상 월경을 안 해도 된다든지 어쩌면 열세 살에 생리하고 나서 쪘던 살들이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을까 하는 따위의 생각까지만 해보고 말았던 것이다. 


처음의 서늘했던 마음들이 미지근해지고 나니 내가 여태껏 그래 왔던 것처럼 이 또한 함께 갈 마음의 준비를 하는 나를 느낀다. 특별히 불성실하지 않았으므로 내 몸에 일어난 일들을, 내 삶에 일어난 일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가 기도 모임의 리더가 되지 못하는 것과 코로나로 인해 일하던 세탁소가 문을 닫게 된 것과 돈을 많이 주고 구입한 멋있는 피그트리들이 시름시름 죽어가는 것을 받아들였듯이 말이다. 장그래처럼 열심히 안 해서 실패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건강했고 마지막 순간까지 멋진 자만심에 부풀어 있었다. 언제 올지도 모르는 핫 플래시, 불면증, 요실금, 노안, 관절염, 오십견, 건망증 같은 애들을 떠올리며 인생의 빛나는 날들을 방해받고 싶지는 않으니까. 


또래보다 숙성했던 열두 살에 처음 입은 브래지어는 굉장히 불편했었다. 삶은 이렇게 불편한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입는 과정일까. 모르고 없었을 때는 상상도 하기 싫었지만 막상 눈앞에 닥치면 받아들이게 되는. 하지만 생각해보면 나는 그때마다 더 나은 사람이 되었을 수도 있다. 생리를 시작하며 아이를 잉태할 수 있는 여자가 되었고 브래지어를 차면서 그 아이에게 물릴 젖가슴이 있는 여자가 되었다. 피그트리를 다 죽이면서 무쇠 식물 외에는 가짜를 구입하는 지혜가 생겼고 기도 모임의 리더가 되지 못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다른 방법을 찾게 되었다. 코로나로 인해 문을 닫은 세탁소는 내게 나라가 한시적으로 지급한 실업수당을 안겨주었고 결과적으로 더 좋은 직장을 잡게 되었다. 노안과 오십견은 내가 완전하지 않으며 언제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약한 인생임을 일깨워주며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마음을 갖게 해 주었다. 그러니 어떤가.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된 것이 아닐까. 그렇게 또 기대를 해 본다. 핫 플래시도 나에게 무언가를 주지 않을까.  


가끔씩은 온몸이 너무 가벼워 하루 종일 들로 산으로 뛰어다니던 어린 천방지축의 나를 그리워한다. 아무런 불편함도 굴레도 없었던 그때. 몇 블락이 넘는 동네를 쉬지 않고 뛰어다니거나 담을 타고 시냇물을 건너던 그때의 나는 분명히 가벼웠고 해가 져서 같이 놀던 친구들이 삼삼오오 집으로 돌아갈 때는 언제나 아쉬웠다. 아침에 눈뜨면 그날 얼마나 신나게 놀까 궁리하고 밥 먹을 때는 놀 계획을 짜느라 충만하던 그때. 그 눈부시게 생동했던 아동의 마음이 왜 그립지 않겠는가. 하지만 누군가 내게 타임머신을 선물한다 해도 그때로 돌아갈 마음은 딱히 없는 듯하다. 인생이 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 같기 때문일까. 없는 것에서 있는 것으로, 모르는 것에서 아는 것으로. 


나는 있는 사람이 되었고 아는 사람이 되어서일까. 그보다는 언제나 새로운 것을 갈망하는 마음 때문인지도 모른다. 비록 그 가볍고 순수한 아동은 온데간데없지만 나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인생에 끝이 있다는 명제가 그 어떤 것보다 분명한 나에게는 나아갈 앞이 있지 않은가. 핫 플래시가 오고 노안이 왔어도 가야 할 길을 조용히 걷는 나는 여전히 아름다운 인생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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