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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연희 Aug 22. 2022

자기는 왜 이렇게 예뻐요?

하루에 몇 번씩 듣다 보면 좋을까, 안 좋을까

"나는 정말 머리가 나쁜 것 같아요. 250만 년의 0.1%가 2500년이라는 사실을 누가 얘기했는데 거기서 멈춰버린 거 있죠. 그다음 말들은 하나도 안 들렸어요. 왜냐하면 난 그 숫자들이 직관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종이에 썼어요. 천천히 해보자 마음먹었죠. 그래서 2500000을 썼는데 그다음에 1%를 계산하는데 시간을 많이 들였어요. 최근 들어서 그렇게 머리가 나쁘다고 생각한 적은 처음이에요. 난 왜 이렇게 수학을 못하는 거죠?"

평소보다 조금 더 흐뭇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그의 표정은 거의 보지를 못했다. 머리가 얼마나 나쁜지 좌절하던 순간을 최대한 실감 나게 전달하기 위해서 나는 던킨도너츠 바깥에 놓인 통나무 테이블의 나무 무늬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온 몸을 동원해 기억을 쏟아 놓았기 때문이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러니까 자기가 나랑 결혼한 거잖아요" 너무나 흡족하다는 표정으로 그는 양팔을 앞으로 쭉 뻗었다. 허그하자는 것이다. 나는 반쯤은 울상이 된 얼굴 표정 그대로 짧게 허그하고 다시 얘기를 이어갔다.

"아니, 1%, 10% 이런 거는 조금 익숙했는데 갑자기 0.1%가 나오니까 동그라미 두 개를 떼어내고 나서 왼쪽으로 올라가는지 오른쪽으로 가는지 모르겠는 거예요. 머리가 좋은 사람들은 보자마자 그런 숫자가 나오는 거지요?"

내가 만족할 것 같은 답(?)을 제시했고 본인이 원했던 허그를 얻어냈으니 다음 얘기로 넘어갈 것으로 기대했는지, 끊어지지 않고 계속되는 나의 성토에 그는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건 수학이 아니라 산수죠. 그런데 숫자를 매일 접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그럴 수도 있어요. 가게 사장님이라면 돈 계산을 매일 해야 하니까 퍼센티지 계산에 익숙해서 금방금방 하지 않을까요?"


저녁노을까지는 아니지만 한낮의 무시무시한 햇살이 어딘가로 숨어든 이 저녁시간에 단층 건물들이 아치형으로 주욱 늘어선 동네 상가는 참으로 한적했다. 맞은편 노천 테이블에는 바로 옆 라멘집에서 투고한 음식을 즐기는 대가족들의 분주함이 한창이다. 아이들이 여섯도 더 되는 것 같다. 자매로 보이는 엄마 둘이서 아이들 그릇에 라멘을 덜어주느라 거의 앉지를 못했다. 인종, 국적 불문하고 엄마는 다 똑같은가 보다. 가장 어려 보이는 베이비를 가슴에 안고 그 북새통 속에서도 라멘을 잘 먹고 있는 아빠까지도.

"그런데..." 새로운 음료수를 시도하겠다며 주문한 파인애플 슬러시를 벌써 다 마셨는지 빈 컵을 내려놓으며 그가 두 눈을 크게 껌벅였다. 애써 진지함을 표현하려 커진 눈, 여태 올라갔던 입꼬리를 급히 끌어내린 입매, 안 들어도 그다음 말은 알고 있지만 무슨 얘긴지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라멘집의 대가족으로부터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기는 왜 이렇게 예뻐요? 요즘 피부가 더 예뻐진 것 같아요. 무슨 일이에요?"내게 비결이 있다면 꼭 알고 싶다는 표정을 짓고 있지만 그의 온몸은 대화 내용과 상관없는 즐거움에 취한 것 같다.

평소에는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미소를 지은 건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반응으로 일관하지만, 그래서 "답은 안 해주는 거죠?" 이런 말도 연달아 듣지만 지금은 기분 좋은 저녁 바람이 나의 연두색 롱드레스를 조금씩 흔들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마침 대꾸해줄 만한 얘깃거리도 있었다.


"저 스킨케어해주시는 분이 추천한 화장품을 지난주에 가져왔거든요? 알잖아요, 나 기초화장품에 별로 기대 없는 거요. 그런데 그분이 써보시고 모공축소에 효과 있다고 하셔서 마침 마땅한 기능성 제품도 없고 그래서 샀어요. 지난달에 스폿 트릿 먼트 받고서 피부가 엄청 예민해져서 일주일 동안 개봉도 안 했거든요? 어젯밤에 처음 뜯어서 썼는데 아침에 화장하는데 다른 거예요. 그거 알아요 여보? 피부 상태가 좋으면 똑같이 화장해도 눈도 더 커 보이고 화장이 더 예쁘게 돼요" 참을성 있게 자초지종을 듣고 있는 그의 표정은 정말로 흥미진진해 보였다. 그의 칭찬을 평소처럼 대충 넘기지 않고 주제에 적절하게 반응하는 대화의 진행이 마음에 들었으리라.

"정말요? 어제부터가 아니고 요새 내내 예뻤어요. 근데 듣고 보니 오늘 정말 다른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 또 허그할까요?" 화장품에 대한 기대감으로 기분이 더 좋아진 나는 흔쾌히 그의 오른쪽으로 어긋맞겨 허그를 했다. 허그하며 어깨를 잡는 손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싶더니 아니나 다를까. 서로의 얼굴이 멀어지기 전에 기습적으로 입을 맞추고야 만다. 가벼운 입맞춤을 할 때도 있지만 여긴 너무 근거리에 사람들이 많았다.

 

"애들 있어요. 사람들이 봐요!" 눈앞에서 공을 뺏긴 아이처럼 떨떠름한 표정이지만 그의 끓어오르는 즐거움은 요지부동인듯했다.

"이건 맛이 어때요?" 나의 마차 레드빈 슬러시를 뺏어가더니 급하게 빨기 시작했다.

"나는 괜찮은데 아마 당신은 좀 그럴걸요? 당도를 반으로 줄였거든요"슬러시를 내려놓는 그의 얼굴에 웃음기가 없다. 초등학생 입맛 대표선수인 그에게는 무리가 되는 당도였던 것이다.

"설탕 좀 먹어도 괜찮아요."이 진지함은 순도 백 퍼센트임을 나는 알고 있다. 내가 마차 슬러시를 몇 모금 먹지도 않았는데 그는 이미 손바닥만 한 도넛 세 개와 달달한 파인애플 슬러시를 클리어했을 정도로 빵돌이 간식 러버인 것이다.

"근데 내가 얘기한 적 있는, 그 일하면서 알게 된 영어 잘하시는 분 있잖아요"

"아, 네, 네"

"그분 남편분이 하와이 교포래요. 근데 미국에 온 지 몇 년 안되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한국에서 남편분이 잡이 있으셨냐고 물었더니 그랬다고 하더라고요?"몇 가지 궁금한 점들을 물어보기는 했지만 여전히 전체적인 그림이 잡히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개인적인 일을 더 자세히 물어보기도 실례인듯해서 거기까지만 듣고 말았던 것이다.

"미군이셨나 보죠"지금까지와 달리 살짝 사무적이고 차가운 말투다. 나 말고 다른 곳으로 관심이 옮겨갔다는 증거이다.

"아, 진짜요? 아, 정말, 그랬을 수 있겠다. 아이들이 K-12 미국 공교육 받았다고 했거든요. 아 정말 그랬겠다" 그가 얘기할 때까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부분이기도 했고 남편은 대체로 이런 식으로 명쾌한 아이디어를 주는 편이 아니라서- 대부분의 경우 그런 역할은 내가 해왔다 - 많이 놀라웠다. 정말로 직업이 미군이었다면 많은 부분의 퍼즐이 맞춰질 것 같았다.


"갑자기 생각났는데, 소령인지 대위인지 계급은 기억 안 나는데 10년 차 미군이면 연봉이 10만 불도 넘는다면서요? 제가 자주 가는 게시판에 펌글로 올라왔더라고요. 유튜브를 하나 봐요."

"나도 봤어요. 그게 베이스 샐러리보다 사는 지역의 물가를 반영한 수당이 높아서 그런 거예요. 미국 시골이면 그 단가가 많이 낮아지고 해외에 주둔하면 높아져서 미군들에게 해외 주둔이 인기가 좋다고 하더라고요" 나처럼 그도 인터넷에 돌고 있는 펌글이나 친구들의 톡을 통해 들어 알고 있는 얘기였던 모양이다.

"그 연봉에서 70~80% 정도를 은퇴 후에도 죽을 때까지 연금으로 계속 받는데요, 그래서 오십이 되기 전에 은퇴하고 다른 잡을 잡으면 더블 인컴이 되어서 풍족해진다고 하더라고요" 내가 자주 들여다보는 게시판은 미국에 거주하는 여성들이 출입하는 곳이라 미군 가족이 많았고 이렇게 카더라 식의 펌글에 더욱 실제적인 정보가 댓글로 달려서 흥미진진했다.


"전체가 아니라 베이스 샐러리에서 계산하는 거라서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남편은 동시대인들의 연봉에 대해서 특별히 후하게 말하는 마인드셋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결혼 후 아주 오랫동안은 남편의 그런 쫌스러움을 참을 수 없어 대놓고 빈정거리거나 팩트 폭격으로 나가보기도 했지만 '그의 어쩔 수 없는 부분'으로 곱게 남겨두기로 했다. 그런 사실이 상기됐을 때는 최대한 나이스 하게 얘기하고 화제를 마무리한다.

"당신 말대로 각종 혜택이 많아요. 주거지를 옮겨 다니며 사는 게 힘들어서 그렇지 적성만 맞아서 군생활을 잘할 수 있으면 은퇴 후에 선택지가 많은 것 같더라고요"이제 이 얘기는 여기서 그만하는 게 오늘 '차 마시기'의 분위기를 지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일 마치고 와서 살짝 피곤하기도 하고 이것저것 들여다보고 할 일들이 쌓여 있어도 남편이 "날씨도 좋은데 차마 싫어 나갈까요?", "오늘은 목요일까지 일하는 당신한테 불금인 불수잖아요! 이런 날은 차마시러 나가야죠", "아까 잠깐 나가 보니까 오늘 모처럼 선선하던데 밀크티 마실까요?" 등등의 제안을 하면 나는 최근 내가 남편과 얼마나 '차 마시기'를 했나를 잠시 따져보고 최대한 시간을 낸다. 회사 일과 운동하는 취미를 빼고는 끊김 없이 나와 시간 보내기를 원하는 남편의 바람을 존중해서이기도 하고 근본적으로 부부라면 될 수 있는 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이 배우자 된 도리이자 의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주중에는 한, 두 번 정도 가볍게 '차를 마시고'-한 번 나가면 두 시간 이상 걸린다 -  주말에는 브런치 먹으러 나와서 차 마시고 영화 보고 디저트까지 먹는 풀코스 데이트를 보통 매주 하는 편이다. 물론 특별한 행사가 있거나 회사일이 바빠지거나 하면 그런 일들은 자연스럽게 미뤄진다. 지난주처럼 주일학교 교사인 내가 2박 3일로 청소년 수련회를 다녀오고, 또 다녀온 후에는 밀린 일을 메꾸느라 토요일까지 근무를 하게 되면서 일주일 내내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그럴 때는 내가 적당히 쉬었다 싶을 때쯤부터 집안에서 눈이 마주치거나 서로 스쳐 지나갈 때마다 "우리는 놀러 안 나가나요?"라는 신호를 보내기 시작한다.


가끔씩은 내가 남편과 노닥거리며 보내는 이 엄청난 시간의 합을 뭔가를 배우거나, 만들거나, 설립하는데 썼다면 인생에서 지금 보다 더 많은 것을 성취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실제로 수년 전에 남편이 직장을 옮기게 되면서 타주에서 여기로 이사 올 때, 아이들의 학기가 끝나지 않아 나와 아이들은 그쪽에 남고 남편 먼저 두 달 정도 먼저 이사 와서 혼자 지낸 적이 있다. 나는 그 두 달 동안 유튜브 채널을 열어서 꽤 관심을 받는 유튜버가 되었고 15년 차 전업주부가 생전 처음으로 미국 백화점에 취직을 하고 파트타임으로 일까지 시작했었다. 모두 남편이 떠난 후에 남는 시간을 주체 못 해서 벌어진 일들이었다. 그때 일을 돌아볼 때마다 남편이 없었다면 나는 뭔가 대단한 일을 해내는 게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해 보는 것이다. 그렇게 마냥 뭉게구름을 타고 날개를 휘적여서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 게 그렇게 대단할까. 배우자에게 사랑받고, 사랑하며 사는 것보다? 세상의 모든 사랑 중에서도 내게 주신 배우자와의 사랑만큼 중요한 게 어디 있을까. 주신 사랑도 가꾸지 못하면 내가 무슨 일을 잘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도 든다.


"지난 주일에 주일학교 준비하려고 성경 공부하면서 내가 굉장한 걸 깨달았어요. 궁금하지 않아요?" 정말 하나도 안궁 금하지만 성경 이야기인가 싶어 예의 바르게 물어보았다.

"뭔데요?"

"에덴동산의 에덴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그 말 뜻이... 그... 그 당시 그 지역이 이름이... 음... 메소.. 음..."

"메소포타미아요"

"네, 암튼 거기요. 거기 지역에서 고대에 쓰던 말인데... 글쎄 쾌락이라는 뜻이래요"

"네..."

"역시 내가 생각한 대로였어요. 에덴동산에서 아담이랑 이브가 뭘 했겠어요"

돌아오는 길이었기에 차창 밖을 보면서 너무 열심히 맞장구 쳐줄 필요 없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의 무반응을 예상했던지 그의 얘기는 끝나지 않았다.

"둘 다 빨가벗고 있었을 텐데...."

"너는 정말 머리에 든 게 똥밖에 없어!"

"하하하"


남편이 한결같다는 사실이 가끔씩은 놀랍고 가끔씩은 잔잔하게 안심이 되었다. 돌아보니 그의 옆얼굴은 좋아 죽겠다는 표정이다. 그의 평생 철학을 한방에 설파한 기쁨인가 보다.

"아니 그래서 어젯밤에는 좋았던 거죠?"기회는 이때다 싶었는지 평소에 내가 잘 대답하지 않는 질문들을 연달아 내놓았다. 아까부터 쥐고 있는 내 손가락 사이사이에 깍지 끼워진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쯤 되면 축축하고 징그러운 느낌이 들어 그의 팔을 내동댕치 치고 창쪽으로 요란스럽게 떨어져 앉곤 한다.  

"아, 네에..."제법 격한 몸놀림과 별개로 예의를 차린 대꾸를 보냈다. 부부관계에 대해서 진지한 그의 지론을 존중하려면 이 정도까지는 해야 하기 때문이다. 신혼 초에는 이런 얘기를 굳이 정색을 해서라도 이어나가려는 그의 요구가 당황스러웠고 어디까지 얼마만큼이나 허심탄회하게 조율될 문제인가부터 쉬운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무조건 외면하고 담을 쌓거나 피하기보다는 살짝 "좋았다"라고만 영혼 '일'만 실어서 얘기하면 만족해하는 남편을 알게 되었고, 남편 입장에서는 그 이상은 포기하기로 한 건지도 모르지만, 그 후로는 이렇게 대응하게 되었다.


"지난번에 8월 셋째 주에 구역모임 하기로 했어요, 기억하죠?"화제를 바꾸는 것이 아니고 정말로 필요한 얘기였다.

"아, 네, 네"

"일품요리할 건데 뭐할까요? 짜장 어떨까 생각해요. 그 전날 해 놓을 수 있어서 제일 좋아요" 메뉴뿐만 아니라 자리 배치는 어떻게 할지, 시간은 언제로 할지, 아직도 할 얘기가 많은데 저만치 앞에 우리 집이 보였다. 며칠 후에 차 마시러 나가서 다시 정해도 늦지는 않을 것 같다. 일단 집에 들어가면 각자 하던 일이 있어서 마음을 쉬이 뺏기기도 하고 나부터도 '부부의 시간'이 끝났으면 어중간하지 않은 오롯한 '개인 시간'으로 돌아가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시 한 거실의 끝과 끝에 앉아 말없이 서로의 컴퓨터와 씨름하게 될 것이다. 언제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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