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네 명의 손님을 초대해 이틀 동안 준비한 각양 음식으로 저녁을 대접한 것이 어젯밤.
새벽기도를 마치고 곧 임박한 새 담임목사님 초빙을 위한 마라톤 회의까지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당장 허리부터 묵직하여 소파에 널브러졌다.
벌써 이틀 넘게 손대지 못한 글 쓰는 일을 어찌 다시 시작할까 궁리하며 뒤적이다 보니 어느새 부족했던 잠이 봄바람처럼 살랑이며 몰려오고 있었다.
무의식 중에 손에 쥐고 있던 전화기가 자지러지게 흔들렸을 때, 쏟아지는 잠을 흔들어내며 실눈을 떴다. 800으로 시작하는 번호였다.
최근에 걸려오는 스캠 전화들은 모두 현 주소지의 지역번호이거나 과거 십 년 넘게 살던 다른 주에서 사용하던 지역 번호를 사용한다. 익숙한 지역번호로 위장해서 무의식 중에 전화를 받게 하려는 수를 쓰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일도 오래되다 보니 나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장된 번호 외에는 받지 않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그러나 800은 다르다.
800은 대부분의 덩치가 큰 회사들, 예를 들어 은행, 보험회사, 신용카드 회사들처럼 거대한 '커스토머서비스'를 보유한 회사들이 쓰고 있는 대표전화이다. 가끔씩 새로 만든 신용카드의 페이먼트를 은행과 연결해놓지 않아 연체가 되거나 신용카드가 해킹당해 해당 구매를 확인하려는 전화가 올 때는 어김없이 800 이 뜨는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전화를 받았다. 그런 종류의 일들은 빨리 해결하지 않으면 일파만파가 되기 때문이다.
전화 대화의 시작은 내가 짐작했던 대로 미국의 대형 은행 중 하나인 Bank of America였고, 내가 7월 30일에 워싱턴 DC 브랜치에서 그들의 플래티넘비자 카드를 오픈했는지를 확인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끝도 없이 떨어지던 잠의 숲을 헤치고 나와 정신을 차리면서 생각을 거듭하는데 그런 일은 맹세코 없었다. 신용카드를 몇 달 전에 만들기는 했지만 은행도, 카드 이름도 전혀 다른 것이었고 무엇보다 워싱턴 DC는 적어도 올해는 발을 디민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상담원의 영어가 뒤가 떨리는 강한 악센트가 있어서 더 알아듣기 힘들었고 평소에 내가 쉽게 접하는 상황이기도 해서 무턱대고 의심을 하기 힘들었다.
평소의 나라면 이런 종류의 일들은 몇 초도 안돼서 전화를 냅다 끊어 버리는 성질머리를 발휘했겠지만 방금 들은 내용은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어 자꾸만 내 행적을 곱씹어 보고 있었다.
아들이 얼마 전에 만들었다는 신용카드가 혹시 이 카드일 가능성이나 아니면 상담원이 초짜라 내가 계속해서 확인하려고 하는 카드의 이름, 즉 사우스웨스트 항공카드, 벤처엑스카드 이런 식의 리워드가 연결되어 있는 상품명을 도통 알지 못할 가능성 - 왜냐하면 나는 그런 카드만을 만드니까 - 을 곰곰이 생각하며 대화가 길어지고 있었다.
뭐가 어찌 되었든 확실하게 내가 사용하고 있는 카드가 아니므로 이것은 명백히 프러드(fraud)이며 내가 아닌 누군가가 내 아이디를 도용하여 카드를 만들고 사용하였으므로 카드를 캔슬해 달라고 얘기했다. 이런 경우에 미국 카드사들은 두 번 묻지도 않고 일사천리로 그렇게 진행하는 것이 그들의 관행이다. 내가 아는 한 적어도 소급해서 이십 년 동안은 그래 왔다.
그랬더니 그다음 얘기가 황당했다.
이 카드에 유일한 구매 행위가 오늘 떴는데 www.gunsamerica.com이라는 곳에서 총을 구입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복수로. 그러면서 하는 얘기가 이 일은 라이센스도 없이 무기를 구입한 것이므로 무슨 무슨 섹션 조항 어쩌고에 의거하여 홈랜드시큐어리티(국토안보부)에 보고를 할 수밖에 없으며 그렇게 될 경우 내가 미국 내에 가지고 있는 모든 은행과 신용카드가 다 블락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아, 그때 피싱이구나를 80프로 정도 감 잡았다. 사실 확신을 갖고 전화를 확 끊었어야 했는데 자꾸만 이 얘기가 황당은 하지만 있을 법하다는 실낱같은 생각이 머릿속 어딘가를 쿡쿡 쑤셨다. 이 부분이 바로 엉성한 스토리도 상황적으로 얻어걸리는 사람이 있다는 피싱의 묘미인가 보다.
그래서 물었다. 그게 너네들 규칙이면 그렇게 하라고. 그래서 그다음 스텝은 뭐냐고. 지금 나에게 하려는 말이 뭐냐고. 그랬더니 더 원활한 서비스를 위해 이 전화를 자기 슈퍼바이저에게 넘기겠다더니 똑같은 말을 조금 더 매끄럽게 반복하는 사람이 나타나서 처음부터 똑같은 말을 반복하며 내 말에 대답을 하지 못하길래, 그냥 전화를 끊어 버렸다.
뭐, 거기까지는 아, 한가로운 토요일 오후에 걸려온 피싱콜이구나 싶었는데 급하게 구글로 찾아보니 Bank of America의 대표전화가 내게 걸려온 전화번호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와, 같은 지역번호를 따서 전화번호를 만들어 거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 존재하는 업체의 전화번호를 그대로 도용하다니.
원래 전화 확 끊어버리고 뒤도 안 돌아보는 편인데 왠지 뒤가 켕겨서 Bank of America로 전화를 했다. 물로 다른 번호로.
연결된 상담원에게 먼저 확인한 것은 내 소셜 넘버(주민등록번호)와 이름 아래에 신용카드나 계좌가 있냐는 것이었고, 없다는 얘기를 듣고 안심했다. 그걸 알고 싶었던 거니까.
이어서 푸념이나 하고 싶어서 이러저러한 전화를 받았다고 얘기하니 몇 마디 듣지도 않고 그거 피싱이라고 안심을 시켜주신다.
주로 아프리카 등지에서 영어가 가능한 사람들을 고용해 소정의 피싱교육을 받고 일하는 그들이 노렸던 것이 AI로 변조해 쓰려고 하는 내 목소리의 원본이었는지, 지루한 설전 끝에 내 소셜 넘버나 다른 정보를 얻어내려고 했던 건지는 모르는 일로 남았다. 하지만 지구 편 어딘가에서 나와 같이 세끼 밥을 먹고(나는 한 끼를 먹지만) 하늘과 달을 보며 사는 사람이 누군가를 헤치기 위해 쏟는 정성과 숨소리, 목소리를 이십 분 동안 직접 경험하고 나니 참 마음이 헛헛하다.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것도 상처가 되는 세상에서, 서로를 적극적으로 헤치는 사람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그 사람의 마음은 또 어떤 것들로 채워져 있을까. 내가 오늘보다 내일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처럼 그들도 오늘을 과거에 묻고 남을 헤치지 않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사람이라면 다 같은 마음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