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은 장비빨이라고 믿는 내가 뭘 시작할 때는, 무조건 그럴 듯한 환경을 만드는데 착수한다.
케피어 배양을 시작하려고 한다면, 적당하게 넓은 주둥이가 있는 유리병이 있어야 하는데, 이게 또 막 사면 안되고 예뻐야 한다. 냉장고에 넣을 것도 아니고 카운터탑에 올려 놓고 매일 종균들의 움직임을 면밀하게 살펴야 하니까.
책을 쓰겠다고 동네방네 선언하고나서 - 처음에는 아주 아주 극소수에게만 비밀이라며 말하다가 점점 만나는 모두에게 묻지도 않았는데 얘기하고 그랬다 -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소파에 누워 책만 보았다. 풀타임 일을 그만두고 한달 동안.
횟수로는 십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그러잡고 있던 유튜브를 접어야겠다고 생각한 지는 벌써 몇 년이지만, 정작 유튜브 방은 정리하지 않은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 조명기구를 펴서 설치하는 일이 보통이 아니고, 가지런히 정리해서 어디 따로 둘 공간도 마땅치 않다는 게 그 핑계였다.
매번 그 공간을 지나칠 때마다, 뭐, 언젠가 다시 할 지도 모르고...세금 보고할 때 여기서 일했다고도 말했으니 이 공간을 이대로 유지하는 것이 오로지 게으름의 영역만은 아니라고 위안하면서...
하지만, 이제 내 꿈의 종목도 바뀌었는데 저렇게 시커먼 공간이 집안에 남아 있다는 것이 드디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하나 둘씩 조명들을 해체해서 컨테이너에 분류해 넣고, 잡다했던 화장품들을 이웃과 지역 벼룩시장 같은 곳에 나눔하고 눈에 보이는대로 손에 쥐어 주면서 처분해 나갔다.
처음부터 이 공간에 책상을 들여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왜냐하면 내 아이맥은 일층에 있었으니까.
단독 방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소파 앞에 평상같은 테이블을 놓고 방석을 깔고 앉아 뭘 쓰기도 하고, 읽기도 하고, 웹사이트를 뒤적거리고, 넷플릭스를 보는 그런 일들을 부엌과 거실이 한 눈에 보이는 공간에서 하는게 당연하게 여겨졌다. 식구들에게 나를 노출시키고 식구들이 나에게 노출되는 그런 관계가.
남편한테는 내가 글을 쓰면, 꼭 뷰가 있는 곳에서 쓰고 싶다고 얘기했었다. 그 때마다 남편은 콧방귀도 안뀌거나, 니가 벌어 그런 집 사라 나는 모른다 라고 말하는 듯한 시선으로 날 보곤 했지만. 그냥 막연하게, 원초적 본능에 잠깐 나오는 할머니 작가가 앉아 있던 공간 - 무진장 비싼 언덕 위의 집-, 크레이지 리치 에이시안에서 주인공 엄마가 성경공부하던 옥외테라스 같은 장면이 내게는 글을 쓰는 곳으로 박혀 있었다.
[그렇다. 내 머리는 똥으로 가득차 있고 내 심장은 된장으로 만들어져 있다. 글은 써 본적도 없으면서 - IT 쪽 기자 생활은 육년 넘게 했지만 그걸 글이라고 부르기에는 좀 어패가 있으므로 - 몇 밀리언씩 하는 집이 필요하다고 말하는거니까.]
그렇다고 우리집 이층에 뷰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십미터쯤 되는 길쭉한 소나무들이 뒤를 막아서고 창 바로 앞에는 이층 높이의 집을 지붕까지 덮어버릴 정도로 무성하게 자라난 벚꽃나무 가지가 시야를 가리고 있을 뿐,
그런데, 그냥 어느 날, 조금 프라이빗하고 막힌 공간에서 글을 써야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이 내려왔다. 어딘가에서.
그래서, 유튜브 방을 정리하면서 원래 그 곳에 있던 책상을 재배치하고 일층에 있던 내 짐들을 모조리 가지고 올라와 차곡차곡 놓았다.
소속감과 정보를 얻기 위해 들어간 한 까페에서 질문을 하려면 등급이 높은 회원이 되어야 한다기에, 어떤 글을 게시할까 고민하다가 글쓰는 작업 공간을 찍어 올리는 코너가 있길래 옳타구나 이건 쉽지 싶어 한줄 포스팅을 했다. 사진과 함께.
그랬는데 정말 폭발적인 반응을 받아서, 나의 등급승진에는 이제 아무런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이 사진 한장이 이 아무런 희망도 없이 벽보고 글을 쓰는 나의 일상을 조금 희망적인 것으로 만들어줬다. 하도 폭발적이라 알전구 장식샷을 뽀나스로 하나 더 투척해드렸을 정도였다.
왜 아니겠는가, 한국 집이랑 창틀이랑 구조가 달랐으니 그 다름이 그냥 좋게만 보였던 것 같다. 게다가 벽시계가 두개. 왜 두개냐고 물어보셔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소속감을 원하며 들어간 까페에서 나만 다른 나라 산다고 얘기하기 싫었으니까.
웹소설을 업로드하는 시간을 정하지 못했는데, 매번 한국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폰을 들여다 보는 일이 너무너무 귀찮아져서 그냥 벽시계를 걸어버렸다. 이제 고개만 까딱 들면 한국 시간이 보인다. 최근에 내가 한 일중에 가장 천재적인 일로 자부하고 있다.
이 사진을 올리고나서 또 한가지 얻은 좋은 점이라면, 사실 알전구 장식은 유튜브 배경이어서 방치되어 있던 아이템이었는데 뽀나스 사진을 찍으려고 연결하고 한번 켜봤다는 사실이었다. 막상 불을 켜고보니 분위기가 너무 좋아져서 - 특히 나의 모니터 위를 스치고 지나가는 작은 알전구 하나의 조명이 글쓰는 나에게 자꾸 영감을 주고 있다. 쿨럭.- 이제 하루 종일 이 상태로 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밤이나 낮이나.
이제, 글 쓸 일만 남았다. 아이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