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에 첫 뉴욕에서의 한 달을 보내고 생긴 목표는 교환학생에 가는 것이 되어버렸다. 뉴욕에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부터 뉴욕이 그리워졌고, 외국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에게 주어진 자원과 환경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외국에서 살아보려면 새로 대학을 가거나 유학을 가는 것은 너무 큰 목표로 느껴졌고, 다니고 있는 대학교에 학비를 내면 외국의 학비는 면제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적합해 보였기 때문이다.
뉴욕 여행에 돌아온 후 나의 모든 정신은 교환학생에 포커스가 맞춰졌고, 교환학생에 지원하기 위한 영어 공인시험 점수 만들기와 학점관리를 위해 노력했다. 호텔경영학과에서 학점을 인정받을 수 있는 전공을 선택하려면 갈 수 있는 학교가 오스트리아, 핀란드, 폴란드 정도였고, 경영학 복수전공을 한다면 선택지가 더 넓어져 미국, 호주, 노르웨이 등도 선택이 가능했다. 또 한가지 고려하고 싶은 변수는 한국인 학생이 얼마나 많은지의 여부였는데, 미국이나 호주는 아무래도 인기가 많은 목적지이다 보니 오히려 수십 명의 한국 학생들이 함께 가다보니 서로 의지하고 정보를 공유하게 되어 현지 친구들은 많이 사귀지 못할 수 있다는 후기들을 보고 한국사람이 최대한 적은 나라로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처음 교환학생을 준비하게 된 계기는 미국이었지만, 미국에 가게 되면 오히려 한국어만 하면서 살 수도 있겠다는 판단이었다.
결과적으로 핀란드를 1 지망으로 하게 되었고, 학교에 신청 서류를 낸 후 면접을 본 후 최종 합격 통지를 받게 되었다. 그때 같이 면접장에 들어갔던 화학과 친구 재현이는 리투아니아로 교환학생에 가게 되었는데, 리투아니아에서 치대로 편입해서 현재는 유럽에서 치과의사로 일하고 있다. 정말 사람 인생이란 어떻게 어디로 흘러갈지 모른다는 게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맞는 것 같다.
내가 가게 된 학교는 Vaasa라는 작은 도시의 Vaasa Polytechnic이라는 학교였는데, 우리나라로 치면 Polytechnic이란 기술대 같은 학교로 핀란드 학제 시스템 내에서는 일반 대학 Univerisity보다는 좀 더 실용적인 학문을 가르치는 학교였다. 여기에 교환학생으로 온 학생은 나랑 식품영양학과에서 간 숙영 언니 이렇게 둘 뿐이었고, 옆의 Vaasa University에는 같은 학교 다른 과에서 온 성민 오빠, 성균관대에서 온 두 명의 교환학생 총 이렇게 다섯 명이었다. 인구 6만 명 정도의 도시에 살고 있는 한국인은 두세 분 정도 더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한 분은 미용실을 운영하시는 사장님, 다른 한 분은 내가 나중에 일하게 될 Wartsila라는 회사에 다니고 있는 팀장님이었으니 내가 그 도시의 모든 한국인을 알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추위를 유독 많이 타서 온 집안 식구들이 반팔을 입고 지내는 실내에서도 겨울이면 수면양말에 털조끼를 입고 “추워~ 추워”를 입에 달고 사는 내가 핀란드에 가서 1년 동안 살다 온다는 얘기에 엄마는 걱정이 많으셨다. 코트와 내복 등 월동물품에 초점을 두고 이민가방 하나와 큰 캐리어 하나에 짐을 최대한 욱여넣었다. 인천공항까지 가족들이 배웅해줘서 인사를 하고 입국장 게이트로 들어가는데, 뭔가 큰 관문을 하나 넘은 느낌으로 후련하고 뿌듯한 느낌이었다. 엄마 얼굴을 보고 들어서는데 눈물이 살짝 나긴 했지만 앞으로 있을 일들에 대한 기대감이 더 커서인지 크게 슬프진 않았던 것 같다. 지금은 핀에어가 한국에 운항하고 있어 헬싱키는 9시간도 걸리지 않는 가까운 목적지인데, 내가 교환학생에 갈 때는 헬싱키는 직항이 없었다. KLM 항공을 타고 네덜란드에 경유해서 암스테르담에서 헬싱키로, 헬싱키에서 내가 갈 Vaasa로 환승하여 총 세 번의 비행기를 타야 하는 여정이었다. 근데 공항에 들어간 지 두 시간이 넘게 탑승 콜이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 이거 뭐지..
항공기 결함으로 대체 비행기가 암스테르담에서 와야만 탈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항공사에서는 좀처럼 사태에 대한 정확한 설명을 해 주지 않았다. 꼬박 반나절을 기다려 저녁 8시경이 되자 빵과 주스 등을 나눠주었고, 저녁 10시까지 기다리다가 버스를 대절해서 홍은동 힐튼호텔로 승객을 이송했다. 자기 전에도 다음날 몇 시에 다시 공항으로 갈지에 대한 안내는 없는 채.. 그런데 이게 나의 첫 호캉스였던 걸까? 요즘엔 국내에서 딱히 여행이 아니라도 호텔에 가서 하루 투숙하며 부대시설도 즐기고 휴가 기분을 내는 게 유행이라 자연스러운데, 이때만 해도 비즈니스 목적이 아닌데 호텔에 가서 잠을 잔다는 건 거의 없는 일이었다. 국내에 그것도 내가 살고 있는 서울에서 호텔에 가서 잠을 잘 일이 얼마나 있었겠는가. 호텔경영학과 학생인데 생각해보니 서울에 있는 호텔에서 잠을 잔 건 이때가 처음인 거 같다.
남들은 한 번 겪을까 말까 한 일을 해외여행 몇 번 가보지도 못했는데 겪고 겨우 암스테르담행 비행기에 올랐다. 거기서부터 일정이 꼬여 헬싱키에는 하루 늦게 도착하여, 공항에 마중 나오기로 했던 튜터 친구와 연락이 닿지 않아 택시를 타고 어마어마한 택시비를 내고 기숙사 안내센터에 와서 토요일에 겨우 키를 받았다. 키를 받고 내가 살게 된 올림피아카투의 아파트로 왔는데, 여기 애들은 방 뺄 때 전구까지 가져가는 거니? 방에 전구도 없이 달랑 이케아 침대랑 책장 하나, 책상 하나가 전부였다. 이불도 없고 방에 전구도 없고.. 내 가방에는 겨울용 코트 몇 벌이 다인데.. 나는 7월에 핀란드에 가서 그렇게 추운 날씨는 아니었지만 시트도 없이 내 옷가지를 침대에 깔고 코트를 덮고 잠을 청했다. 그 순간 내가 왜 지구 반대편에서 가족도 없이 이러고 있지 하는 생각에 눈물이 왈칵 터져 나왔다.
그러나 다음날 같은 학교에서 온 성민 오빠를 만나서 이케아에 이불도 사러 가고 꼬티 피자에서 파인애플 피자를 먹으며 이런 걱정과 슬픔은 날아가버렸다. 그다음엔 1년이 어떻게 간지도 모르게 하루하루 즐겁게 보냈던 것 같다.
호텔리어에 대한 글을 써보겠다고 다짐했는데 어쩌다 대학 때부터 나의 개인사를 거슬러 올라가며 되짚어가는 이야기가 되었는데, 쓰다 보니 기억도 새록새록 되살아나고 혹시나 누군가에게 교환학생 준비나 핀란드 유학 등에 대한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싶어 교환학생 이야기를 조금 더 써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