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입학처장님이 직접 방한해서 면접시험이 진행되고 있는데 내일 오전이면 모두 끝난다고요?” 와튼스쿨 한국 대표님의 비서가 제게 장황하게 설명한 당시 정황을 전화기 너머로 들으면서 저는 꼭 뛰고 싶은 축구경기가 몇 분 뒤면 끝이 나는데 유니폼조차 준비해 오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의 절망감을 느꼈습니다.
제가 1982년에 한국은행에 입행해 10년간 재직하면서 외환관리 자유화, 아직도 사용되고 있는 시장 평균 환율제도 도입과 국제은행 간 지급 결제 온라인망인 스위프트(SWIFT)의 국내 도입 책임자 (cordinator)로서 굵직한 프로젝트를 무난히 완수해낸 데 힘입어 제 나이 만 서른다섯 살에 늦깎이로 학술연수대상자에 뽑혀 미국 내 20위권 경영대학원에 유학할 수 있는 자격을 얻어냈습니다.
그런데 주립대에 가기보다는 이왕이면 명문 사립대학이 좋을 듯해서 찾아봤답니다. 그 당시 국제금융과 조사역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제 업무가 하도 바빠서 경영대학원 수능 고시 격인 GMAT 공부를 할 틈이 없어서 예제를 한 번도 제대로 풀어보지도 못한 채 시험을 봤는데 역시 형편없는 점수가 나왔더군요. 수학 문제를 시간 내에 빨리 풀어야 하는 그 부분이 꽤 어렵더군요.
그런데 우연히 전화를 한 저와 함께 학술연수 대상자로 선발된 조사부의 후배가 “유펜에다 경제학과 원서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는데 학교 측의 실수로 경영대학원에서 원서를 잘못 보내줬다”라고 툴툴대길래 “그 원서 나한테 보내달라”라고 했더니 금요일 오후 늦게서야 왔더군요. 봉투를 열어보니, 이런! 와튼스쿨(Wharton School)의 MBA 프로그램이 그야말로 환상적이더군요. 제가 당시에 국제금융국에 근무하고 있었고 서울대학원에서 국제경영학을 전공했었기에 그 전공과 잘 연결이 되는, 제가 꿈꿔오던 그런 멋진 과정이었습니다.
입학안내서에 한국 대표 연락처가 있어서 전화를 했더니 비서가 전화를 받길래 제가 입학원서를 보고 전화를 했다고 하니 잠시 침묵이 흐르더군요. 아차! 무언가 낌새가 이상해서 비서에게 물어보았더니 대표님은 지방 출장 가셨다며 현재 진행되고 있는 상황을 설명해주더군요. “몇 달 전부터 응시자들 수백 명을 대상으로 원서를 접수했고 서류심사를 벌써 마친 결과 그중에 50명을 뽑아서 한 달 전에, 입학처장님(Admissions Director)이 직접 내한해서 할 인터뷰에 대한 오리엔테이션까지 마쳤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입학처장님이 방한해서 이번 주 월요일부터 1인당 30분간 면접을 봐서 오늘까지 거진 끝냈으며 토요일인 내일 오전에 서너 명만 남겨놓은 상황이다”라고요.
다른 이들에 비해 몇 개월이나 뒤늦은 그 시점에 저는 입학 안내서를 보면서 “와! 참 좋은 학교다!”라고 감탄하고 있었으니 그 비서가 기가 막혔던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그 순간에 저의 특기인 순발력이 발동했답니다. 그 금요일 저녁, 동료들이 퇴근한 사무실에서 제가 한국 대표님께 편지 두어 장을 써서 팩스로 넣어드리고 퇴근을 했죠. “여차 여차해서 미리 원서를 내지 못했지만 꼭 가보고 싶은 학교입니다. 내일 토요일 점심시간이라도 좋으니 5분만이라도 입학처장님을 만나 뵙게 해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라고요. 아침에 출근하니 벌써 답신 팩스가 절 기다리고 있더군요. 12시부터 30분간 따로 시간 잡아두었다고… 그래서 여의도로 택시를 타고 면접장에 도착하니 큰 키의 흑인 입학처장 에니아트씨가 샌드위치 하나를 집어 들고 올라오면서 “그래, 그게 당신이냐?” 하는 투로 인사를 하더군요.
그렇게 인터뷰가 시작됐고 제가 그 당시 1년간 국제은행 간 온라인망인 SWIFT의 국내 도입 프로젝트를 도맡아 SWIFT벨기에 본사에서 파견 나온 직원 Michael King과 밤낮으로 함께 일하면서 갈고닦은 영어실력을 발휘할 기회가 제게 주어진 것입니다. 당시 저는 총재님의 외빈 면담 시 국제금융국장님과 함께 배석해 면담 기록 작성을 맡을 정도로 영어에 관한 한 인정을 받고 있었습니다. 참고로 저는 중학생 때부터 영어를 취미로 삼아 운전을 하거나 전철을 탈 때 등 자투리 시간에는 무조건 영어학습을 해 오고 있었습니다. 누구든 취미활동이라면 즐겁게 열심히 하기 마련이지요. 그 덕분에 저는 아무런 부담 없이 열정적인 태도로 인터뷰에 임할 수 있었답니다.
인터뷰가 4-50분간이나 신나게 진행되었고 에니아트씨가 열정에 가득 찬 저와 한국은행에서 하고 있는 업무 등에 관해 이런저런 점을 묻더니 “당신 GMAT 시험성적이 잘못됐음에 틀림없다”라고 하시길래 옳다구나 하고 맞장구를 쳤죠. “맞습니다! 제가 한국은행에서 이런저런 중요한 일들을 맡고 있는데 언제 시험공부를 할 틈이 있었겠습니까?” 답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노트에 적어 넣더군요. “왜 이제야 당신을 만나게 됐는지 모르겠다”하시고는 “원서접수 첫 라운드가 며칠 후 마감되는데 그전에 원서를 꼭 제출해 달라”라고 당부를 해서 집에 돌아와서 그날 밤으로 에세이 여섯 문제에 답을 써서 그다음 날 DHL로 부쳤답니다. 남들은 적어도 몇 주나 고민해서 작성할 법한 그 어려운 에세이를 몇 시간 만에 뚝딱 쓸 수밖에 없었으니 참! 그리고 그게 어떤 학교인데요.
여러분 가운데 와튼스쿨에 대해 아시는 분들도 많겠지만 잘 모르고 계신 분들을 위해 잠시 소개를 드리지요. 1884년 펜실베이니아주 철강 부호 죠셉 와튼이 아이비리그의 하나인 유펜에 세계 최초로 세운, 비즈니스 스쿨의 효시입니다. 제가 졸업한 해인 1994년부터 내리 8년간 세계 비즈니스 스쿨 중 랭킹 1위를 차지(US & World Report 기준)한 바 있고, 월 스트리트에서 가장 많은 동문들이 일하고 있는 파이낸스 전문대학원입니다. 최근에는 트럼프 대통령 모녀가 다닌 학교로 언론의 조명을 받은 그 학교이기도 합니다.
그러고 나서 한 달 반 뒤에 입학허가서를 받았습니다. 서둘러 유학 준비를 했고 초등학생 남매와 아내를 데리고 미국 땅을 처음 밟았습니다. 시차와 문화 극복을 위해서 LA에 내려서 열흘간 서부지역 몇 개주를 들린 후 동부의 필라델피아로 가기로 하고 공항에서 밴을 빌려서 식구대로 가져간 짐들을 실은 채 라스베이거스, 애리조나 등을 다녔는데 자칫 데스 밸리에서 소금으로 살짝 덮인 소금호에 차가 빠져 오도 가도 못하고 섭씨 4~50도나 되는 열풍에 꼼짝없이 죽겠다 싶었는데, 마침 지나가던 프랑스 부부께서 밧줄로 차를 묶어 천신만고 끝에 저희를 구해 주었던 참으로 아슬아슬했던 미국에서의 험난했던 신고식이었습니다.
필라델피아에 가서는 MBA 2년간을 정말 힘들었지만 신나게 보내고 한은으로 돌아왔습니다. 당시에는 매우 살벌했던 필라델피아 시내 교정에서 최고령 학생 중 한 명으로서 십 년씩이나 어린 급우들과 정신없이 바쁜 대학원 과정을 보냈던, 실로 열정이 넘쳐났었던 젊은 한 때였습니다. 당시 시내에서 차를 멈추면 흑인들의 공격 대상이 되는 그때에 스터디그룹 미팅을 끝낸 저를 태우러 밤늦게 시내를 운전해 오던 아내의 헌신적인 내조가 없었더라면 어찌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졸업해서 귀국하자 곧 재학 중에 가깝게 지냈으며 저를 각별하게 챙겨주셨던 와튼스쿨의 국제담당 Sheehan 부학장님이 와튼스쿨이 세계 1위를 탈환하게 된 것을 축하한다고 내한해서 남산 하얏트 호텔에서 유펜 동문회를 가진다고 연락이 와서 저도 나갔습니다. 그런데 이 분께서 기라성 같은 한국동문들 앞에서 인사말 몇 마디를 하고선 뜬금없이 “여기에 와튼스쿨의 두 가지 기록을 가진 친구가 있어 소개드리겠다”라고 하고는 제 이름을 호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떨결에 일어나서 수백 명의 선배님들께 꾸벅 절을 했습니다. 그분 말씀이 “그 두 가지 기록 중 첫 번째가 와튼스쿨 역대 입학생 가운데 GMAT 성적이 꼴찌였고, 두 번째 기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뷰에서 즉석 입학허가(on-the-spot admission)를 받은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멋쩍게 웃으며 인사하고 자리에 앉았답니다.
그래서 제가 추론해 보기로는 그 2년 전에 입학처장님이 저를 마지막 순간에 인터뷰해서 뽑아 준 것에 대해 입학심사 패널들 간에 논쟁거리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입학처장님은 저를 꼭 뽑고 싶었으나 제 당연히 부실할 수밖에 없는 에세이, GMAT 성적 등 입학원서를 검토한 패널들이 반대했을 거고요, 그래서 논쟁이 벌어졌고 이 사안을 국제담당 부학장님께서 중재하셨던 것 같습니다.
유학을 마치고 한은에 복귀한 후로 3년에 걸쳐 6명의 한국은행 후배 직원들을 해마다 두 명씩을 부학장님이 방한하실 때를 이용해 한은 간부식당으로 함께 초대해 소개해드리고 제가 추천서를 써 주었는데 모두 입학에 성공했습니다. 당시 후배들이 모두 훌륭해서 다들 입학자격을 갖췄고 저는 단지 들러리를 선 것뿐입니다.
일곱 번째는 제가 국제금융국에서 함께 일했던 후배로 제가 ADB 남태평양 지역사무소 (바누아투)에 근무하고 있을 때 면접에서 실패했으니 도와달라고 부탁해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인터뷰 훈련을 집중적으로 하라고 한 뒤 입학처장에게 재차 인터뷰를 부탁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져서 후배를 필라델피아에 보내서 면접을 다시 보게 해서 입학허가를 받아내기도 했답니다. 졸업 후 유학 후배들이 한은 안팎에서 나름대로 제 몫을 해내고 있는 것 같아 기쁩니다.
한 가지 꼭 말씀드리고 싶은 점은 와튼과 같은 탑스쿨의 경우 GMAT 시험 점수보다는 잠재력과 장래성을 더 중요시하기 때문에 열정을 갖고 인터뷰에 임하면 합격점을 받을 수 있으니 여러분께서도 점수에 연연하지 말고 높은 목표를 정해 도전해 보시기 바랍니다.
제 글이 해외 유학을 꿈꾸는 후배들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이상 저의 좌충우돌 미국 유학 도전기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