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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강 김철기 Jul 01. 2021

삼성의 반도체 첫진출과 IMF 외환위기 극복을 돕다

ㅡ전경련, 전후 최대 경제업적으로 선정

​전경련이 지난 6월 한국전 70주년을 맞아 ‘대한민국을 만든 이슈 대국민 인식’ 에 대한 설문조사에서 한국전 이후 70년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우리나라의 업적으로 경제분야에서는 삼성의 반도체 진출(응답자의 64.2%)과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극복(52.1%)을 각각 꼽았다.

한은 및 ADB에서 도합 30여년간 일해오면서 한국의 경제 및 산업발전 과정을 지켜본 저는 이 조사결과에 공감한다. 한편으로는 우리 국민이 뽑은 최고의 업적 두가지 모두를 우연히도 제가 직접 도울 입장에 있었던 점은 개인적으로 큰 영광이며 행운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와 관련된 흥미로운 에피소드들이 있었기에 소개해 드리고자 한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한국의 현대경제사에 있어 가장 큰 업적 두가지 모두에 직접 기여한 당사자가 될 수 있었는가? 제가 1982년초 한은에 입행해 외환관리부 해외투자과에 첫발령을 받았는데 이듬해 당시 삼성전자가 야심차게 추진한 64K DRAM (D램) 개발 및 양산을 위한 해외투자건을 담당해 허가가 나도록 도왔었다.

이후 1995년에 아시아개발은행(ADB)으로 옮겨 갔는데, 1997년말 IMF 외환위기가 발발한 당시 동아시아금융국에 근무하던 중 한국에 대한 구제금융 10억달러 지급건을 직접 결재해 한은 뉴욕지점의 외환보유고 계정에 입금한 것이었다.

삼성의 최초 반도체사업 진출을 위한 해외투자 허가를 담당하다

저의 한국은행에 입행해 첫 보직이 해외투자 허가담당이었는데 이듬해 1983년 하반기에 삼성전자가 최초의 반도체인 64K D램 연구개발을 목적으로 한 해외투자 허가를 신청해왔다. 삼성전자의 반도체사업부가 미국 실리콘밸리에 500만불이나 되는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금액을 투자해 이임성 박사를 비롯한 재미 과학자를 활용해 64K D램 반도체 시제품을 개발해 들여와서 기흥단지에서 반도체 양산을 시작하겠다는 '야심찬' 사업계획이 담긴 해외투자허가 신청건이었다. 일본의 경우 5년이 넘게 걸렸던 64K D램을 삼성은 6개월만에 개발, 국내에 도입해 양산할 계획이었으니 말이다.


허가신청 서류 검토를 시작했는데 문과출신인 제게는 도통 어려운 내용들이었다. 국내에서 반도체가 아예 없었던 때라 반도체의 기초개념부터 시작해 웨이퍼가 무엇인지, D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배워가며 투자안을 분석한 결과 타당성이 인정돼 허가를 품의했다.

그때 삼성이 비밀문서로 제출한 향후 10년간 사업계획서에는 10년 후인 1992년까지ㅡㅡ 1M D램의 개발에 성공하겠다는 당시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던 비밀계획이 담겨져 있었다. 그러나 삼성이 6개월만에 목표한 64K D램의 해외개발과 함께 국내 양산에 성공한 뿐만이 아니라, 10년후로 계획한 1M D램 개발을 달성하는 데 채 4년이 걸리지 않았다.

1986년 7월 1M D램 개발에 성공한 데 이어 4M D램시장에서 일본의 선두 주자들을 따라잡기 시작한 삼성은 1992년에 64M 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 메모리 강국인 일본을 따돌려 버렸다.

그런데 제가 한은의 지원을 받아 미국에 유학을 간 학교가 필라델피아에 소재한 유펜의 와튼스쿨(Wharton School)이었다. 석사과정 2년차의 경영전략 과목에서 하버드 사례연구(case study) 수업을 했는데 그 사례의 제목이 "후발주자였던 삼성이 어떻게 4M D램 시장에서 일본의 선발그룹을 제칠 수 있었나?" 였다.

그 사례분석을 해보니 당시 세계반도체시장을 주도하고 있던 히다찌, 미쓰비시 등 일본의 선발그룹이 4M D램시장이 미처 성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하게 1M D램시장에서 다음 단계로 옮겨가는 바람에 막대한 시설투자가 드는 장치산업인 반도체사업에서 큰 손실을 입고 주춤하는 사이에 후발 삼성이 1M D램시장에서 엄청난 이익을 챙겨 자금경쟁력을 확보한 덕분이라는 결론을 냈다. 반도체 사업을 시작할 때 일본기업들에 비해 10년이나 뒤처졌던 삼성에게 대단한 행운이 주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일본 학생들이 월등하게 많았던 그 수업에서 저는 '극일'의 통쾌함을 만끽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 해초 회장 취임 5년차를 맞아 미국을 방문한 이건희 회장이 소니 제품에 밀려 가전매장의 한 귀퉁이에 먼지에 덮여있는 삼성제품을 목격하고는 큰 충격에 빠졌고, 이어 프랑크푸르트 임직원 회의에서 "마누라와 자식을 빼고는 다 바꿔야 삼성이 산다" 라는 이른바 '신경영 선언'으로 혁신과 변화를 주창한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 한국의 가전제품의 경쟁력이 일본에 비해 크게 뒤떨어진 시기였기에 말이다.

그날 하버드 사례연구 수업의 주인공은 당연히 저였다. "삼성반도체 사업의 첫걸음을 떼게 도와준 장본인이다" 라고 배경을 설명해 주자 다들 몹시 저를 부러워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수업을 마치자 삼성전자 직원이었던 급우(현 동원산업 이명우 사장)가 다가와서 "삼성을 도와줘서 감사하다"고 말하고 반도체 칩을 넣어 만든 넥타이 핀 세트를 선물하였다.

이외에도 당시 군부세력이 주도한 재5공화국 청와대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반도체 칩을 연병장에 비유해 사전재가를 득한 삼성의 기지, 삼성과 현대의 선대회장님들의 반도체사업 애착과 피 말리는 경쟁관계 등 흥미롭고도 민감한 이야기는 따로 정리해 두었다가 삼성 측의 요청이 있는 경우 기업비사로 넘겨드릴 요량이다.

IMF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10억달러를 한국에 지원하다

1997년말 경에 발발한 한국의 'IMF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IMF, 세계은행과 ADB가 공조한 '대한국 긴급구제금융' 지원 프로그램팀의 일원으로 참여해 오던 중 1998년 정초에 ADB의 대한국 지원금 10억달러를 직접 결재하여 친정인 한은의 외환보유고에 입금한 일이 바로 그것이다.

국민의 대다수가 기억하는 ‘IMF사태’라 하면 ‘정부의 외환보유고 관리 실패로 IMF를 필두로 한 국제기구단으로부터 긴급구제자금을 빌리게 되고 그 결과 금리와 환율이 급등해 국내 기업 및 금융기관을 포함한 국민들이 예상치 않게 심한 고통을 겪게 된 사태’로 풀이할 수 있겠다. 이 IMF 사태에 대한 평가는 아직 훗날 경제 역사학자들의 몫으로 남겨둬야 하겠지만 대부분의 국민들은 이를 잊을 수 없는 쓰라린 아픔과 고통으로 기억하고 있는 듯 하다.

우리나라가 경제 선진국 대열을 바라보며 겉보기엔 화려한 호황세를 누리는 것처럼 보였으나 단기외화 차입이 급증하면서 외채구조가 급격히 악화되었고 잘못된 외환보유고 관리정책(3개월치 수입대금에 맞춘)을 유지한 데다 외환시장에서 환율이 급등하자 이를 방어하기 위해 달러자금을 허비하게 된 결과로 1997년 12월중 환율이 최고점 1,962원으로 연초대비 두배 이상으로 뛰었고 외환보유고는 한 때 39억달러까지 감소한 그야말로 ‘국가부도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렇게 초비상사태를 맞게 된 정부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은 IMF를 비롯한 국제기구단에 구제금융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한국정부는 국제기구단과의 피말리는 ‘밀고 당기기’ 협상 끝에 1998년 12월 5일날 IMF, 세계은행과 ADB로부터 도합 550억달러에 달하는 긴급 구제금융을 받기로 합의했다.

당시 한국정부는 IMF로부터 단기성 고금리 차입금인 보완준비금(SRF, Supplement Reserve Facility) 135억달러를 지원받았다. 이 준비금은 금리가 높아서 벌칙성으로 간주된다. 세계은행 또한 0.5%의 벌칙성 가산금리를 적용한 반면에, 평소 아시아 회원국들에게 우호적인 ADB는 벌칙성 가산금리 없이 통상적인 차관금리를 적용해줘서 한국정부에게 큰 부담을 덜어주었다. 여기에는 당시 재무부에서 파견나온 박진규 이사님이 동료이사실과 담당국장실을 일일이 찾아 다니며 협상한 남다른 노력이 크게 작용했다고 본다.

당시 ADB는 한국정부에게 40억달러이라는 전무후무하게 큰 금액을 3차에 나누어 지원했다. 이중 제가 결재한 것이 그 2차 지원금(2nd tranche)이었다. 1998년 1월 2일에 첫 출근했는데 캐나다 국적의 Paul Dickie 국장님이 아직 해외휴가 중이라 제가 국장대행(officer-in-charge)을 맡게 되었다. 아침 일찍 결재가 올라온 10억달러(1조 6천억원 상당)의 대한국 지원금이자 과거에 몸담았던 한은의 외환보유고 계정으로 입금하는 10자릿수 외화수표를 보는 순간 제 가슴은 사정없이 뛰기 시작했다.

그런데 연말을 부도위험으로부터 간신히 넘긴 한국정부로부터 당일자로 꼭 입금시켜달라는 다급한 요청을 받고 둘러보니 마침 한국직원 선배님 두분(박병욱, 문세화)이 컨트롤러 및 트레저리 부서에 출근해 있었고 흔쾌히 협조해 줘서 이례적으로 당일자에 한은계정에 입금시킨 후 뜨겁게 만세를 외쳤던 기억이 지금까지 생생하다.

이후 한국정부는 국제사회의 예상을 뒤엎고 IMF 구제금융 전체를 불과 3년 8개월만인 2001년 8월에 조기 상환하면서 대한민국에 대한 IMF 관리 체제가 종료되었다. 이는 '금 모으기' 국민운동에서 확인된 우리 국민들의 뜨거운 애국심과 구국열정에 힘입은 결과라고 생각한다. 아울러 이때 국민 ‘금 모으기’를 훌륭한 지략으로 주관하신 신명호 ADB 부총재님(당시 주택은행장)께도 이 기회를 빌어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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