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강 김철기 Jul 01. 2021

내가 근무한 국제기구 아시아개발은행

ㅡ개도국의 경제 사회개발을 돕다

험난했던 이직 과정

"아뿔싸 이럴 수가!" 제가 금융결제국에 근무하고 있던 1994년 가을날 오후 4시경에 아시아개발은행(ADB) 지원서가 첨부된 재무부 국제협력과로부터의 회람공문을 받아들고는 무심코 내뱉은 말입니다. 그 공문에는 당일 오후 4시 30분까지 원서를 제출하라고 돼 있었는데요, 30분내로 원서를 작성해서 제출해야 하는 그 순간 제가 어떻게 대처했을까요?  제가 지원서를 작성해서 팩스로 재무부 앞 송신한 시각이 4시 29분. 평소에 어렴풋이 알고있던 ADB 부서와 직책 가운데 몇 개를 감각적으로 정해서 적어 넣고 나서 그 외에 저의 인적 및 가족 사항과 지원하게 된 동기 등등을 추가했습니다.

창졸간에 일어난 일이라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제가 맡은 한국은행 금융망을 금융결제의 중추 시스템으로서 마무리하는 중요한 프로젝트에 몰두하고 있었는데 몇 달 후 ADB에서 연락을 보내왔답니다. ADB 인사팀과의 면접시험 일정이 하얏트 호텔에서 모월 모시에 잡혀있으니 참석해 달라는 내용의 통지문이었습니다. 설레는 가슴을 억누르고 면접시험장에 들어서니 호주인 인사과장과 세계은행에서 파견 나온 인사 전문 직원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요, 제가 34명의 미리 선발된 명단(short list)에 속해 있다고 하더군요. 내심 가능성이 낮겠구나 싶었음에도 제 천부적인 '열정'을 발동시켜 신나게 면접시험을 치르고 나서 좋은 느낌으로 사무실로 돌아왔답니다.

곧이어 1994년 12월 15일에 저는 한은금융망 개통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였는데 세계에서 미 연준, 영란은행, 일본은행에 이어 네 번째로 개통된 실시간 총액결제 시스템으로 알려지면서 BIS 선진국 총재단에서 극동의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중앙은행이 개통한 시스템에 대해 기대 반 우려 반으로 한은 인사를 불러 자초지종을 들어보는 청문회를 열었답니다. 그래서 당시 심훈 이사님을 모시고 BIS 회의에 참석해서 한은금융망에 대해 브리핑하고 질의응답하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브뤼셀 출장기간 중 저를 유심히 관찰하신 심 이사님께서 하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김조 사역은 한은에 계속 있게 될 거 같지 않다" 고 하셨는데요, 그때서야 제가 ADB에 지원한 후 ADB 측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음을 이실직고했습니다. 귀국한 뒤에 심이사님께서 고맙게도 ADB 파견 이사님과 통화를 해 보셨는데 저와 함께 교수 출신의 지원자 한 명이 최고 점수(A+)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어느 정도 희망을 갖게 됐답니다.

조마조마하게 기다려서 1995년 초반 경에 ADB로부터 1차 합격통지를 받았는데요, 그게 아직은 마닐라 소재 ADB 본부에 가서 저를 희망하는 부서의 부서장님들과 직접 면접을 해서 합격점을 받아야 하는 험난한 과정을 남겨둔 겁니다. 당시 금융결제 국장님이셨던 남기호 국장님께서 주선해 주신 덕분에 은행 공가를 허락받아서 새벽 비행기로 마닐라에 도착했는데 그날 아침에 ADB에 가서 면접 일정을 받아보니 사흘간 매일 대여섯 건의 면접이 있었고 마지막 이틀간은 제가 살 집을 보러 다니는 일정으로 마치게 돼 있었습니다.

시간마다 부서 국장님이나 과장님들을 만나서 면접 고문(?)을 받아야 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미리 ADB업무에 관해 사전 공부와 준비를 제대로 못한 것이 후회가 됐답니다. 제 전공이 파이낸스였기에 여러 부서가 공통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것 같은데요, 제가 부서별 업무를 미리 파악하고 있었더라면 훨씬 더 잘 면접을 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과 함께 힘든 첫 사흘을 보내야 했습니다. 한 주간 많이 시달린 끝에 귀국해서 한은금융망 마무리 업무에 몰두하고 있었는데요, 몇 달 지난 뒤 ADB로부터 채용조건 등을 담은 편지가 왔습니다. 이렇게 우여곡절과 험난한 절차를 거쳐 국제기구로의 이직이 허락돼서 드디어 1995년 10월 하순에 마닐라행 비행기를 가족들과 함께 타게 됐답니다.


중국 금융시장 개방의 초석을 깔아주 

제가 첫 보직을 동아시아 금융국에 받아서 첫 프로젝트로 중국의 광대은행이라는 중소형 국영은행(세계은행의 경우 민생은행)에 중국이 최초로 외국기관들에 의한 지분참여와 장기 차관(도합 1억 2천만 불) 및 기술지원을 ADB로 받는 프로젝트를 1996년에 맡게 되었답니다. 이 ADB와 당시 민생은행을 지원한 세계은행의 파일럿 프로젝트가 성공적인 것으로 판단될 경우 여타 대형 국영은행의 대외개방을 추진한다는 정부의 큰 밑그림이 있었더군요.

당초에는 대출 마케팅과 대출심사 기능 간 구분조차 돼있지 않았던 참으로 원시적인 은행업무를 하고 있었는데요, ADB의 기술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제가 현장교육을 하고 보고서에서 제도개선을 제안한 끝에 적어도 형식상으로는 근대식 은행업무를 하는 모양새를 갖추게 됐답니다. 그런데 이후 중국이 보인 저력은 정말 놀라웠는데 불과 몇 년 사이에 파일럿 프로젝트에 각각 참여한 ADB와 세계은행으로부터 습득한 금융제도 및 선진 기법들을 여타 대형 금융기관들에게 복제 도입해 금융계 전반을 바꿔놓은 것입니다.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뉴욕증시에서 10대 대형은행 가운데 절반을 중국 국영은행들이 차지하게 된 기적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후 2000년대 초에 초현대화된 중국의 금융가를 다시 가본 제가 받은 충격은 너무 커서 쉽게 잊히지 않습니다.

인민은행 결제시스템을 자문하다

제가 중국 금융제도 개선과 함께 담당한 중요한 일이 바로 중국 선진화 결제시스템(CNAPS) 구축을 자문한 일이었습니다. 제가 한은금융망의 지급결제 정책을 담당한 경력을 인정받아서 유일하게 결제제도 전문가를 겸하고 있었는데요, 중국이 골머리를 앓고 있던 지급결제제도의 중추 시스템을 건설하는 초대형 프로젝트를 지원해 달라는 요청을 받아 여러 차례 출장을 가서 인민은행 지급결제국과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해 보았지만 묘수를 찾기 힘들었답니다. 한국은 금융기관들이 한은의 금융망을 주축으로 질서 정연하게 금융망을 갖춰온 반면에, 중국의 경우에는 수백 개의 중앙은행 분행간망을 따로 하고 당시에는 영향력이 더 센 국영은행들이 각자의 금융망을 갖춰 전국의 수천 개 지점을 연결해 놓고 서로 경쟁하고 있는 소위 '춘추전국시대'인지라 인민은행조차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상태였답니다. 그래서 지방의 같은 도시 내에서 타행수표를 돌려 대금을 결제받는 데 열흘이 넘게 걸리는 경우가 허다했답니다.

그때 제가 채용한 전문가가 바로 제가 BIS총재단 회의에서 질문을 받았던 영란은행 국장님이셨는데 퇴직하셨길래 모셔서 함께 인민은행 측에 자문하게 됐습니다. 저는 이 난맥상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한은금융망과 같이 중앙은행 분행들을 허브(hubs) 또는 노드(nodes)로 삼아 상업은행들을 묶어서 중앙은행 결제망으로 통합한 대형의 한은금융망 같은 중추 시스템을 갖춰야만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이 사업의 규모와 비용이 워낙 커서 이후 한동안 예산사업에서 빠졌다가 2000년도에 들어서야 인민은행이 지체예산으로 거액결제 및 차액결제시스템 등을 순차적으로 도입해 결국은 한은 금융망과 비슷한 시스템인 CNAPS를 구축하게 됐답니다.


외환위기 극복에 보탬이 되다

 여러분은 0이 아홉 개나 달린 열 자릿수의 달러화 수표를 보신 적이 있나요? 한국에서는 환란위기로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 속에서 1997년 연말을 간신히 넘겼던 당시였는데요, 새해 첫 출근을 한 제 책상 위에 놓인 10억 불(1조 6천억 원 상당) 짜리 외화수표!  한국 정부, 정확하게 말하자면 한은의 외환보유고 계정으로 들어갈 금액이었답니다.  그날 마침 제 캐나다인 국장님께서 본국 휴가 중이신지라 제가 국장대행을 맡게 됐는데 저의 친정 앞으로 보낼 수표를 보고 제 가슴은 쿵쾅대기 시작했답니다. 떨리는 손으로 결재를 마치고 당일자로 입금이 되도록, 마침 정초부터 출근하신 유관부서의 한국인 선배님들께 협조를 부탁을 드려서 간신히 유례없는 당일자 입금을 시켰습니다. 제가 일부 관련한 한국 정부의 IMF 긴급 구제금융 패키지 가운데 40억 불을 ADB가 공급하기로 했는데 그 두 번째 자금지원(2nd tranche) 건이었습니다. 그때 높은 페널티 성 금리를 적용했던 IMF나 세계은행과는 달리 저희 ADB는 통상의 저금리를 적용해 한국 국민들의 부담을 줄여드렸습니다. 그것도 10년 전 1988년에 졸업한 회원국에 대해서 특별 지원한, ADB로서는 전무후무한 지원규모였답니다.

남태평양 섬나라에서 보낸 3년

 제가 새 밀레니엄을 앞둔 1999년에 ADB의 남태평양 지역사무소에 파견돼 3년 3개월을 근무한 적이 있습니다. 인구 20만 명의 작은 섬나라인데요, 주변의 6개 섬나라 국가들에 대한 지원 프로그램을 맡아 운영하는 지역사무소에서 큰 자부심을 갖고 열심히 일했답니다. 시계를 벗어나면 원시인 생활을 변함없이 영위하고 있는 부족들을 볼 수 있는데요, 이 부족 국가에게 당시 ADB가 환란 때 한국에 적용한 것과 유사한 국가개혁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얼마나 난센스인지 알아차리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백개가 넘는 상호 불소통 언어를 사용하는 80여 개 섬들을 찾아다니며 족장들을 모시고 우리의 새마을운동과 비슷한 참여형 개혁 프로그램을 설명하자면 통역이 몇 명이서 차례차례로 자기네 말로 옮겨야 하는데 내가 말한 내용이 어떻게 전달됐는지 파악하기가 묘연해지더군요. 그런데다 지구 상에 가장 행복하다고 알려져 있는 이들 부족들에게 "당신네들이 부족한 것이 이러저러하니 저희가 지원해 드릴게요" 하고 얘기하는 것이 때때론 부끄럽기도 하더군요.

다시 마닐라 본부로

 이 동화 같은 나라에서 열심히 일하고, 2002년 월드컵 4강에 오른 것을 현지인들과 함께 차량 퍼레이드로 축하한 뒤에 마닐라로 귀환하였습니다. 본부에 돌아와서 남태평양국과 예산과를 거친 후 총재실에서 여러 부총재실 간 업무조정 책무를 맡아 삼 년간 ADB 전반에 걸친 정책과 영업 전반에 일가견을 갖게 되었고, 이 경험들이 제가 마지막으로 근무한 독립 평가국에서 평가전문가로서 활약하는 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독립평가국에서 지병을 얻다

국제기구 한국인 직원 가운데 최초로 독립평가국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ADB는 총재의 지휘 하에 개도국 개발 지원사업을 추진하고 이를 70여 개국의 회원국들로 구성된 이사회가 이를 감독 감시하는 지배구조인데, 이를 독립평가국이 이사회를 대신하여 ADB의 사업에 대해 그 효율성, 효과, 영향 등등을 독립적으로 평가하여 이사국을 포함하여 전 세계에 공표하는 것으로 객관성, 공정성 및 고도의 자질을 요하는 업무를 담당합니다.

특히 중요한 업무로는 다년간의 국가지원 프로그램 전체를 평가한 뒤 새로운 프로그램에서는 이러이러한 섹터에 집중 지원하되 이러저러한 문제점을 개선하는 방안을 제시하는 국가지원 프로그램 평가(Country Assistance Program Review) 보고서 작성 업무입니다. 제가 맡은 국가로는 인도, 캄보디아, 라오스 및 몽골국의 프로그램 평가서였는데요, 제가 몽골국 평가서 마무리를 위한 출장을 가게 됐습니다. 당시에 몽골국 IMF 소장이 마침 장병균 박사로 제 한은 입행 동기가 맡고 있었던지라 제가 국가 프로그램 평가를 하는 데 도움을 여러 가지로 받은 적이 있고요.

지병을 얻고 더욱 분발하다

그런데 몽골 출장을 마칠 즈음에 동행한 제 Director가 제 걸음걸이가 이상하다고 지적해 주었습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는데요, 사무실로 돌아와서 타이핑을 하는데 the를 치면 자꾸만 hte로 나와 영문을 모른 채 지내다가 왼편 손발과 몸이 점점 더 굳어져 물리치료와 침 치료를 정기적으로 받게 됐습니다 이렇게 이년 남짓 고생하다가 잠시 서울로 들어와서 서울대병원 파킨슨센터에서 파킨슨병으로 확진받았답니다. 순간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으나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활짝 웃으며 의사 선생님께 "확진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 이상 저는 앞으로 매일매일을 세배씩 더 행복하게 열심히 살아가겠습니다"라고 약속드렸답니다. 불치병을 얻은 대신에 그날 이후로 '불행 불감증' (제 신조어) 환자로 바뀌었답니다.

곧 체력 회복을 위해 선택한 수영을 아침저녁으로 계속해서 4년 후 귀국할 때까지 줄잡아 무려 2,000 km을 넘게 했으니 서울 부산 간 몇 차례를 왕복한 셈입니다. 업무에도 더욱 집중한 결과로 은퇴를 앞두고 연속해서 최고 등급의 고과 성적을 받게 됐고요. 이러한 변화를 가져다준 것은 바로 제가 평소에 신봉한 '회복탄력성 (resilience)' 덕분이었습니다.

은퇴 후 인생이모작, 새 출발 하다

제가 불치병을 의식하지 않고 불굴의 투지로 벅찬 업무를 감당해온 것에 감명받은 평가국장님과 경영진의 배려로 업무상 재해로 인정받고 삼 년이나 앞당겨 은퇴할 수 있었습니다. 귀국 후 저는 수영 경험을 활용해 맨몸으로 물에 쉽게 떠서 익사를 방지하는 '잎새 뜨기'를 국내외 최초로 개발하고 한국안전수영협회를 설립해서 지금껏 '생명 살리기 봉사활동'에 몰두해 오고 있습니다.

글을 마치며 

장차 국제기구에서 일하고 싶은 후배들에게 저는 이 말을 드리면서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한국의 후배님들이 만약 세계에서 꿈을 펼쳐보고 싶은 경우에는 우선 오랜 기간 국제기구의 특성에 맞는 준비를 하며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그 기회가 왔다 싶으면 주저하지 말고 마치 매가 산토끼를 낚아채듯 기회를 놓치지 마시길 바랍니다.

Time and tide wait for none! 

이전 05화 삼성의 반도체 첫진출과 IMF 외환위기 극복을 돕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