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미국이 서방국들의 협조를 얻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를 국제은행 간 금융통신망인 스위프트에서 퇴출시킴에 따라 러시아가 더 이상 스위프트를 통한 미 달러화 표시 온라인 은행 간 금융거래 및 무역거래를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이 뉴스에 매일 오르는 바람에 스위프트가 갑자기 유명해져 일반 국민들께서도 자주 접하게 되셨으나 여전히 어려운 스위프트에 대해 제가 개인적으로 경험한 에피소드들을 엮어서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스위프트(SWIFT: Society for Worldwide Interbank Financial Telecommunication)는 1973년 벨기에 브뤼셀에 설립된 비영리협회로서 회원은행들 간 무역거래와 결제를 신속하고 안전하게 하기 위해 각종 은행 업무를 코드 화해서 정형화된 보안 메시지 형식으로 만들어 금융 및 무역거래의 업무 자동화가 가능하도록 한 은행들 간 온라인망을 구축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이로써 회원은행들은 기존에는 주로 텔렉스를 사용해 통신을 하고 수작업으로 해오던 업무처리를 온라인 자동화 시스템화해 고객들에게 획기적으로 개선된 금융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약 200여 개 국가에서 1만 개가 넘는 은행들이 가입해 국제 금융거래를 해오고있으며 2020년 기준으로 스위프트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매일 약 3,800만 건의 거래가 전송되어 수조 달러 규모의 거래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미국 정부로부터 스위프트 퇴출 제재를 받은 러시아의 경우 달러화 표시 천연가스 등의 물품대금을 받지 못하게 되고 반대로 달러화 표시 수입대금을 지불할 수 없어서 달러화 결제를 주로 하고 있는 국제무역시장에서 매우 큰 타격을 입게 됨으로써 스위프트 제제를 ‘핵옵션(nuclear option)’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제가 1991년 한국은행 재직 시 금융기관의 스위프트 국내 도입 프로젝트의 총책임을 맡아 1년간 열심히 뛰어서 당시 해외 은행들에 비해 10년이나 뒤처졌던 국내은행들이 스위프트 통신망을 조속히 구축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적이 있었습니다. 또한 이 스위프트 국내도입 프로젝트가 저의 향후 커리어 발전에 큰 도움을 주었기에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답니다. 그때 있었던 에피소드들을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991년 초에 국정원이 입수한'북한이 스위프트 가입을 추진한다' 는 첩보성 루머에 화들짝 놀란 청와대로부터 김건 한은 총재님이 전화를 받게 되었습니다. 청와대 측의 최대 관심사는 남북 간 경쟁에서 질 수 없다는 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당시에 우리나라에서는 주무부처인 정보통신부가 스위프트 서비스를 국내 금융기관에 허용할 경우 국내 통신시장을 외국 사업자에게 개방하는, 당시로서는 용납하기 힘든 일로 간주하고 이를 금지해오고 있었습니다. 여타 대부분의 국가의 은행들은 이미 10여 년 전에 스위프트 회원가입을 해서 온라인 자동업무체제가 가능했던 반면에 한국의 금융기관들은 텔렉스를 사용해 국외 은행 간 금융 무역거래를 수작업으로 해오고 있었으니 국내 금융기관들이 상대적으로 얼마나 뒤떨어져 있었는지는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1991년 3월 초, 영문도 모른 채 당시 김시담 국제금융국장님과 함께 김건 총재실로 불려 가 '앞으로 1년 내에 국내 금융기관들 전체가 스위프트에 가입해 온라인 기기를 도입 사용케 하라'는 총재님의 특명을 받아왔습니다. 제 상사였던 조성종 국제금융과장님의 전폭적인 신임과 위임을 받아 이 스위프트 시스템 국내 도입 프로젝트를 맡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수일 내로 당시 국내은행, 외은지점들, 제2 금융권, 단자회사, 증권회사들을 총망라한 도합 8-90개 금융기관 실무책임자를 한은에 소집해서 기획한 대로 향후 스위프트 국내 도입 프로젝트를 설명하고 적극적인 참여와 협조를 부탁드렸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불철주야 스위프트에서 파견 나온 마이클 킹씨와 동료직원 강종구 씨(후일 미국 박사학위 취득)와 한 팀을 이루어 신나게 열심히 뛰어 딱 1년 되던 날에 전국 80여 개 금융기관들이 성공적으로 스위프트 기기 설치 준비를 마치게 하고저희가 스위프트 사용 매뉴얼을 발간했습니다.
드디어 1992년 3월 2일 오전 김건 한국은행 총재께서는 제이 세르보 스위프트 브뤼셀 본부 사무총장님, 박찬문 금융결제원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스위프트 시스템 개통식을 갖고 한국의 스위프트 가동 개시를 알리는 첫 메시지를 주요국 중앙은행에 송신했습니다.
이 날이 여태껏 텔렉스에 의존해 오던 대한민국의 금융기관들이 국제 간 금융 무역거래를 온라인으로 자동 처리하게 된 획기적인 날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한국 금융기관들이 외국 금융기관들과 동일한 여건을 갖추고 당시 급격한 경제 팽창세에 힘입어 급성장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스위프트 도입 프로젝트를 제때에 성공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저는 그해에 한은의 미국 유학생으로 선발됐으니 스위프트 국내 도입이 제게 미국 유학 기회를 선사했다고 믿습니다. 스위프트에서 파견 나온 직원과 1년간 동고동락하면서 길고 닦은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미국 유학(와튼스쿨, UPENN)에 도전해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MBA 학위를 취득한 후 한은에 돌아와서 당시 한은의 최대 숙원사업인 중앙은행 지준금 계정을 활용한 실시각 거액 송금, 카드 수표대금 등 소액거래의 일 2회 차액결제, 국내 외환 당일 거래, 세금 등 국고금 수납을 위한 중앙은행의 중추 은행 간 결제시스템인 한은 금융망(BOK-Wire) 구축사업을 지급결제 정책면에서 도맡아 밤낮으로 일해서 이를 성공리에 완성한 후 1994년 12월 15일에 개통식을 가졌습니다.
이후 국제결제은행(BIS : Bank for International Settlement)에 당시 한은의 심훈 이사님과 함께 브뤼셀의 중앙은행 총재단 청문회에서 불려 가서 어떻게 극동의 작은 나라가 기적과 같이 세계에서 4번째로 한은 금융망과 같은 실시각 결제시스템을 갖추게 되었는지 설명드렸습니다.
제가 이 성공사례와 함께 명문 비즈니스 스쿨에서 취득한 MBA 학위에 힘입어 1995년에 국제기구 아시아 개발은행(ADB : Asian Development Bank) 동아시아 금융국에 진출할 수 있었고, 제가 첫 프로젝트로 담당했던 중국의 광대은행(Everbright Bank of China)이라는 중소형 국영은행에 대한 최초의 외국인 지분투자 및 차관공여 파일럿 프로젝트를 성공시킨 데 안심한 중국은행들이 야심 차게 대외개방을 시작하게 되었고 오늘날 굴지의 국제은행들로 급성장하는 데 그 초석을 깔아준 기여를 하였습니다.
저는 이렇듯 아시아 개발은행에서 20년 가까이 국제공무원으로 활약하게 된 것과 제가 최초에 스위프트 도입 프로젝트를 맡게 된 사건 간에 두터운 인과관계가 성립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 일련의 사건들이 1991년에 떠돌았던 '북한이 스위프트에 곧 가입할 것'이라는 루머에 의해 촉발되었다는 점이 흥미롭고 아이러니하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