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스승의 날, 지난 6년간 벼르고 별러 왔던 광교산 시루봉 정상 등정에 13년차 파킨슨병 환자로서 도전해 일견 불가능해 보였던 산행에 성공했다. 약 6년전 저희 부부가 EBS의 '신통과의례 ㅡ부부통'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 PD 팀을 이끌고 마지막으로 광교산에 올랐던 적이 있다. 그날도 서너 시간 걸려 지팡이에 의지한 채 어렵사리 산타기를 해서 시루봉에 어렵사리 올랐는데 정작 TV에 비친 장면은 불과 몇초, 불안한 종종 걸음걸이로 어렵사리 산길을 오르는 모습을 보여 준 것이 다여서 조금 서운했던 적이 있었다. 방송을 찍게 되는 이들은 이같은 경험을 자주 하게 될 것이다. 방송 작가가 애초에 계획한 시나리오의 등산행사가 아니고 제가 촬영 PD와 상의해서 결정한 산행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제가 호흡행공과 오금펴기, 골반과 허리세우기를 중시하는 분당 태천원 도장에 나가기 시작한 지난 주에 놀라운 변화를 경험했다. 도장에서 오금을 펴자 그간 등산스틱에 의지해서 간신히 뒷산에 오르곤 했던 제가 등산스틱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이른바 '네발 산행'에서 '두발 산행'으로 급진화 했던 것이다. 장기간 파킨슨병을 앓고 나거 예외없이 하지가 불안해진 환우들께는 눈이 번쩍 뜨일 반가운 소식이 아닐까 싶다.
도장에 나간지 1주일만에 큰용기를 내서 광교산 정상인 시루봉까지 (편도 7km) 등정하기로 하고 아침에 집을 나섰다. 마침 스승의 날이라 도장에서 저를 헌신적으로 지도해 주신 사범님께 감사 선물을 드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등산을 시작했다. 오늘도 스틱을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제 보호자 역할을 맡으신 같은 아파트 단지의 조선배님이 함께 하셨고 선배님의 8살 짜리 손자 건우가 가벼운 몸짓으로 동참했다.
올해 초등학생이 된 건우는 재빠르기가 마치 다람쥐나 토끼와 닮았다. 수십계단을 가볍게 뛰어서 오르는 건우의 몸놀림이 내게 자극이 됐다. 건우는 어제 35천보 가량 걸었다고 한다. 비록 보폭은 짧지만 대단한 활동량이다. 아마도 어른들은 힘이 장사라도 어린이들의 활동량을 능가하는 경우가 쉽지 않으리라.
집에서 출발해서 수지성당을 거쳐 총 거리가 편도로 7km 남짓되는 거리인데 약 5km 가량 지나서부터는 가파른 계단식 등산로가 자주 나타났다. 가파른 구간을 오를 때는 호흡법이 중요하다. 여러분께선 호흡을 할 때 들숨과 날숨 가운데 어느 것에 신경을 쓰시는지? 흔히 호흡을 할 때 들이쉬기 부터 먼저해야 한다고 많이들 믿고 있으나 호흡이라는 말 자체가 숨을 내뱉기(호)와 들이쉬기(흡) 으로 이뤄진 단어이다. 숨을 충분히 내쉬지 않으면 새 공기가 들어갈 공간이 없다. 그리고 길게 내뱉고 길게 들이쉬면 호흡행공이 되어 에너지가 축적이 된다. 이것이 호흡행공과 오금펴기, 골반 세우기, 척추 세우기에 중점을 두고 수련하는, 제가 매일 다니는 도장(분당 태천원)에서 가르치는 호흡법의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경사가 급해지자 제 보호자께서 말없이 제가 혹시 필요할지도 몰라서 챙겨간 등산스틱을 제 배낭에서 꺼내서 건네주셨다. 행여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는 사고를 예방하고자 하는 배려라고 생각하고 감사히 받아들였다. 그런데 열흘전 쯤 제가 새로 구입한 4단접이 스틱을 사용해 보질 않아 이리저리 조립하는 방법을 궁리하다가 폰에서 매뉴얼을 찾아보니 비밀 장치를 알려줘서 딸각 소리와 함께 사용 준비 끝. 제가 스틱에 체중을 실고 매달려 소위 네발로 걷던 이전과는 달리 스틱을 균형을 잡는 데만 사용한 채 '두발 등산'을 계속했다. 이렇게 걷는 것이 오금이 펴진 경우에만 가능한 것이며 이전처럼 오금이 굳어진 상태에서는 몸의 균형이 잡히지 않아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가파른 계단이 끝났나 보면 또 하나의 계단이 기다리길 대여섯 차례, 드디어 목적지인 시루봉 정상에 도달했다. 실로 6년만에 제 꿈 한가지를 이루어냈다. 감격스런 순간이다!!
저는 몇해전에 몸상태가 안좋아져서 대학병원에서 장애인 등급 3 등급(뇌병변 장애) 판정을 받았다. 장애 등급 3등급은 쉽게 설명하자면 외출을 해서 활동하는 일체에 있어서 보호자의 보호가 필요하다는 판정이다. 그래서 제 보호자인 아내는 제가 약속 장소에 나가거나 열차와 전철을 타거나 하는 대부분의 일상활동을 저와 동반하는 것을 규칙으로 삼고 있다. 걸음이 잘 안되는 저를 위해 어디를 가든 차로 저를 데리고 다니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아내는 천사과에 속한다. 스스로도 수영장에 가거나 악기 배우러 다니는 등등 바쁜 가운데에도 제가 모임에 나가 있을 때 시간마다 전화를 걸어 제가 별일이 없는지 체크해 주는 아내가 고맙기 그지없다. 그리고 아무리 피곤해도 저녁 식사를 마치고는 저를 데리고 나가서 정평천로에서 만보 내외를 걷는 것을 규칙으로 삼고 있다. 정말로 감사하다.
그러나 저 때문에 아내가 늘 불안해하고 자신의 편안한 시간으로는 즐기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그래서 이제부터 제 궁극적인 목표를 이렇게 세웠다. 제가 혼자서 활동을 할 수 있게돼 비로소 아내가 여느 보통의 아내처럼 자신의 시간을 갖고 살아가도록 여건을 만들어 주는 것을 목표로 잡고 더 열심히 노력해야겠다.
이 점에서 제가 이번에 광교산 등정에 성공한 사건은 아내와 주변 이들의 불안감을 상당히 불식시킬 만큼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