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적인 행복의 기준을 설정해 보자.
얼마 전 트위니의 쿨가이 조한민과 저는 배드민턴을 치러 체육관에 갔다가 신발주머니를 잃어버렸습니다. 탈의실에서 배드민턴 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나왔는데, 한민이의 배드민턴화가 들어있는 신발주머니가 없어졌습니다. 한민이 표정이 많이 어두워졌습니다. 저는 한민이와 같이 신발을 찾아봤지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새 신발을 살까 고민을 했지만, 누군가가 실수로 신발주머니를 가져갔다가 다시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에, 저는 한민이에게 오늘 하루만 신고 온 운동화를 신고 운동하자고 말했고, 한민이도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한민이는 자기감정을 많이 드러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신발을 잃어버린 후에,
“형, 빡 쳐요 (화나요)”
라고 했습니다. 한민이가 즐거운 마음으로 운동을 할 수 있도록 짧은 이야기를 나누고 운동을 했습니다. 운동 후에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는데, 신발주머니 하나가 보였습니다. 한민이 신발주머니였습니다. 운동전에 찾아봤을 때, 그 자리에 분명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누군가 잘못 가져간 것을 알고 두고 간 것이 분명했습니다. 우리 둘은 신발을 안 사고 운동하길 잘했다고 이야기하며 기뻐했습니다.
한민이가 속상해할 때, 제가 한민이에게 해준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한민아, 너는 선천적으로든 후천적으로든 참 많은 걸 가지고 있는 것 같아”
“네?”
“너 똑똑하고, 운동 잘하고, 키 크고, 잘생기고, 성격도 좋지? (전부 사실입니다.)”
“형,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맞아? 아니야?”
“ㅋㅋㅋ 반박을 못하겠네요”
“사람들에게, ‘잘생기고, 똑똑하고 키 크고, 좋은 성격의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해줄 테니 신발주머니를 내놓으세요.’라고 한다면 분명 많은 사람들이 신발주머니를 들고 올 걸.”
사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긴 합니다만, 자기가 갖고 있는 것에 대해 행복해하고 작은 일에 너무 속상해하지 말자고 한 말이었습니다.
“만약에 빌 게이츠가 갖고 있는 것만큼 재산을 줄 테니, 팔을 한쪽 잘라달라고 누군가 말한다면, 어떡할래?”
“안 하죠.”
“너 최소한 팔 두 쪽만 해도 빌 게이츠 재산 두 배만큼은 되겠네?”
뭐, 이 것도 사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스스로 분명 자기 팔 한쪽이 빌 게이츠 재산보다는 큰 가치가 있다고 여긴 것은 분명했습니다.
“(팔 하나 없는) 빌 게이츠가 신발 잃어버렸을 때, 아니면 도둑맞았을 때, 평소와는 다르게 화내는 모습을 본다면? 내가 방금 그 모습을 봤는데, 좀 의아하더라고... 나중에 네가 금전적으로 성공해서 고급차를 몰고 가다가, 폐품 수집하는 할아버지가 실수로 차를 긁으면, 화 낼 거야?”
“그것 하고는 다른 이야기죠.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요.”
맞습니다. 그것과는 다른 이야기지만, 제가 전달하고자 한 이야기를 한민이는 이해하고, 기분 좋게 운동하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자기가 갖고 있는 행복에 대해 잊고, 갖지 못한 것에 욕심 부리며 스스로 불행하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행복의 기준을 상대적으로 설정하면 항상 불행할 수도 있습니다.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목표가 되고, 그 목표를 이루면 또 더 나은 사람이 목표가 되고, 항상 나의 행복의 기준은 높아지게 됩니다. 높이 올라가기 위해 목표를 위로 설정하는 것에는 동의합니다만, 행복의 기준을 항상 내가 있는 곳보다 높은 곳에 설정하는 것은 반대합니다.
1980년의 상위 1% 부자였던 사람과, 2016년의 상위 50%의 보통 사람 중 누가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살까요? 또 누가 더 행복할까요?
1980년의 상위 1% 부자였던 사람과, 2016년의 상위 50%의 보통 사람 중 누가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살까요? 그리고 누가 더 행복할까요?
옛날 부자는, 컴퓨터와 인터넷을 모릅니다. 정보를 검색하려면 도서관에 가야 하지만, 도서관에도 충분한 서적이 없습니다. LOL은 커녕 스타크래프트도 할 수가 없습니다 (너구리나 겔러그도 없었을 겁니다.). 휴대전화도 없기 때문에 길 가다가 전화를 하기 위해서는 주변의 공중전화를 찾아야 됩니다. 텔레비전의 화질은 굉장히 떨어집니다. 영화나 텔레비전의 콘텐츠도 지금과 비교하면 많이 떨어집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하루에 갔다 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의학 기술이 떨어져서, 아파도 치료받기가 쉽지 않고, 암에 걸리면 죽은 목숨입니다. 지금 보통 사람이 누리는 많은 편리함을 옛날 부자는 누릴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옛날 부자에게 길가다가 전화할 수 있는 기기를 사라고 하면 엄청난 돈을 내고 샀을 것입니다. 엄청난 정보가 있는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준다고 했다면, 그것을 위해서도 엄청난 돈을 내고 샀을 것이며, 지금 보통 사람 집에 있는 HD 화질의 텔레비전을 볼 수 있게 해준다면, 그 당시로는 가치를 매기기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암에 걸렸을 때, 2016년도 대학 병원의 의학 기술로 치료해주겠다고 하면, 전 재산도 내놓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저는 일반적으로 2016년의 보통 사람이 더 많은 것을 누리지만, 1980년대의 부자가 더 행복함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보통 사람은 옛날 부자보다 훨씬 많은 것을 누리고 있지만, 느끼는 행복감이 떨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제 생각에는 행복의 상대적인 기준을 설정하는 것에 어느 정도의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상대적으로 '부자'가 아니고 '보통 사람'이기 때문에 불만을 느끼는 것이죠.
그런 생각을 한 이후, 저는 제 행복의 기준을 ‘가족 모두 건강한 것’으로 설정하고 살고 있습니다. '돈은 없어도, 건강한 몸이 있으면 무얼 못할까?' 하는 생각입니다. 뭐든 해서 돈은 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이 인생 목표를 설정한 이후로 행복하지 않은 순간이 별로 없습니다. 가장 최근에 힘들었던 시기는 아내가 출산 후 문제가 생겨 응급 수술을 받고 입원해 있던 1주일 이었던 것 같네요. 그 이후로는 다시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사실 그 기준을 생각한 것은 ‘위가 아닌 아래를 바라보자’에서 출발하였습니다. 내가 있는 곳보다 높은 곳이 행복의 기준이 되면, 제가 너무 불행할 것 같아서 낮은 곳으로 기준을 두고 싶었는데, 얼만큼 낮은 곳이 좋을까를 고민하다가, 그래도 몸은 건강해야 노력해서 다른 것을 얻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설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제가 몸이 안 좋아진다면? 사지가 멀쩡하지 않게 된다면… 팔이 하나 잘려 없어진다면, 난 불행할까? 하고 고민해본 적이 있습니다. 결론은 ‘아마도 또 더 낮은 곳으로 기준을 바꾸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행복이 상대적인 것에 의한 것이라면, 항상 불행한 요소가 있기 마련입니다. 행복의 절대 기준을 설정해보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