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 꽤 괜찮은 유언장을 완성했다

스물아홉, 죽기 딱 좋은 날씨에 남기는 기록

by Designer Nine

고성에 내려와 살면서 가장 많이 변한 건 소리다. 서울에서는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 없이는 출퇴근이 힘들었는데, 이곳에선 창문만 살짝 열어두면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 가끔 지나는 차 소리, 그리고 이름 모를 새소리가 백색소음이 되어준다.


그 적당한 고요함이 좋아서, 오늘은 모니터 대신 종이 노트를 펼쳤다. 항상 남을 위한 디자인 시안만 그리던 손으로, 오늘은 온전히 나를 위한 기획서를 써보기로 했다.


내 인생의 마지막 프로젝트, 엔딩 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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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종이와 펜을 꺼낸 이유


사실 기록이라면 아이패드가 훨씬 효율적이다. 수정도 쉽고 영원히 백업도 되니까... 그럼에도 나는 굳이 낡은 방식인 종이 노트를 택했다.


백스페이스 키 하나로 고민 없이 지워지는 디지털 활자보다는, 종이 위에 꾹꾹 눌러쓴 볼펜 자국처럼 내 마음에 선명하게 남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배터리가 방전될 일 없는 이 아날로그 노트 위에서, 나는 비로소 솔직해질 준비를 마쳤다.




아직 젊은데 무슨 유언장이야?


처음 펜을 들었을 땐 솔직히 좀 우스웠다. 스물아홉. 죽음을 논하기엔 너무 젊고, 삶을 논하기엔 아직 모르는 게 많은 나이다. 당장 내일 죽을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물려줄 거창한 유산이나 빌딩이 있는 것도 아니다. (있다면 참 좋겠지만.)


하지만 부고장을 만들고 죽음을 공부하다 보니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죽음은 꼭 나이순으로 오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예고 없이 찾아온 이별 앞에서 남겨진 사람들은 슬퍼할 겨를도 없이 선택의 문제로 싸우고 상처받는다는 것이다.


"영정사진은 뭘로 하지?" "부고 문자는 누구까지 보내?" "이 물건들은 다 어떡해?"


그 혼란스러운 틈바구니를 보며 생각했다. 내가 떠나는 날, 내 사람들이 나를 추억하는 대신 내 짐을 치우느라 골머리를 앓게 하고 싶진 않다고. 그래서 나는 오늘, 가장 건강하고 이성적인 상태에서 나의 마지막 사용 설명서를 미리 적어두기로 했다.


이것은 언젠가 나를 배웅해 줄 사람들을 위한 최선의 배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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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스럽지 않게, 나답게


법적 효력이 필요한 재산 분할 같은 건 쓸 말이 없다. 내 유언장의 핵심은 취향과 존엄이다. 나는 여행 일정을 짜듯, 하나하나 구체적인 주문 사항을 적어 내려갔다.


1. 꽃은 굳이 필요 없어, 대신 '향기'를 채워줘: 솔직히 나는 꽃에 큰 감흥이 없다. 국화꽃을 쌓아두는 대신, 내가 평소 좋아하던 우드 향이나 숲 냄새가 나는 디퓨저를 하나 놓아줬으면 좋겠다. 장례식 특유의 무거운 향 냄새 대신, 내가 머물던 공간처럼 편안한 향기가 조문 온 친구들을 맞이해 주길 바란다.


2. 플레이리스트는 내가 정해둔 걸로 틀어줘: 적막 속에 숟가락 달그락거리는 소리, 혹은 곡소리만 들리는 건 싫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게 뭐야? 싶겠지만.. 내가 평소 작업할 때 듣던 '노동요'들이 있다. 적당한 템포의 시티팝이나, 비 오는 날 듣기 좋은 재즈. 마지막 가는 길이라고 해서 굳이 엄숙한 척하고 싶지 않다. 그냥 평소의 나처럼, 내가 좋아하는 음악 속에서 인사하고 싶다. 나 먼저 퇴근한다! 하는 기분으로.


3. 영정사진은 '가장 편안한 미소'로: 사진첩을 뒤져보니 무표정의 신분증 사진, 잔뜩 꾸미고 찍은 사진들이 아닌 그냥 편한 옷을 입고 잔잔하게 미소 짓고 있는 사진이 가장 나다워 보였다. 억지로 웃는 게 아니라, 마음이 편안할 때 나오는 그 표정. 사람들이 내 마지막 얼굴을 봤을 때, 슬픔보다는 "그래도 행복하게 잘 살다 간 것 같아"라고 느껴줬으면 좋겠다.


4. (가장 중요) 내 아이패드와 외장 하드는 묻지도 말고 초기화해 줘: 그 안에는 세상에 공개되지 못한 C컷 시안들, 감성에 취해 쓴 오글거리는 문장들,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나의 자잘한 기록들이 가득하다. 이건 가족이라도 지켜줘야 할 프라이버시다. 비번 풀려고 애쓰지 말고, 쿨하게 포맷 버튼을 눌러주길. 그게 나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길이다.






죽음을 적고 나니, 오늘 밤공기가 달다


한 줄 한 줄 적어 내려가다 보니, 이상하게 마음이 차분해졌다. 우울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방 청소를 끝낸 것처럼 개운하다. 유언장을 쓴다는 건, 죽음을 부르는 주문이 아니라 내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정리하는 과정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향, 내가 사랑하는 음악, 내가 기억되고 싶은 표정... 죽음을 가정하고 나서야 비로소 나라는 사람의 윤곽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노트를 덮고 기지개를 켰다. 창밖은 여전히 고요하고, 아이스커피는 여전히 좋다. 죽음을 기억하자, 역설적이게도 지금 내 눈앞의 삶이 좀 더 소중해졌다. 나는 죽기 위해 유언장을 쓴 게 아니다. 오히려 내일 아침을 더 기분 좋게 맞이하기 위해, 마음속 묵은 짐들을 종이 위에 털어낸 것뿐이다.


몸이 좀 뻐근하다. 옷을 챙겨 입고 가볍게 밤 산책이나 다녀와야겠다. 유언장에 얜 산책을 참 좋아했어라는 문구는 굳이 적지 않아도, 오늘 내가 이 바람을 온전히 느끼면 그만이니까.




혹시 지금 마음이 복잡한 당신이라면,

오늘 밤 메모장을 켜고 아주 가벼운 유언 한 줄 남겨보는 건 어떨까.
생각보다 꽤, 기분이 괜찮아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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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에서 삶과 죽음을 디자인하는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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