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경 작가의 《볼 수 있는 동안에》를 읽고
스스로 약속했던 업로드 날짜를 두 번이나 어기면서까지 기다리고 읽은 책이었다. 단순히 책의 내용을 요약하는 글이라면 대충 훑어보고 쓸 수도 있었겠지만, 다른 작가님께 추천받은 책이라 제대로 읽어보고 싶었다. 그렇게 배달된 차경 작가의 《볼 수 있는 동안에》는,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의 숨통을 조여왔다.
책의 초반부는 작가님이 사시가 된 배경부터 자신의 직업, 친구와 지인들, 그리고 자신의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작가의 삶을 이루는 담백한 조각들을 따라가는 이 부분은 막힘없이 술술 읽혔다. 하지만 중반부로 넘어가 작가가 영정사진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중 마주한 103페이지의 한 대목에서, 나는 며칠 동안 다음 장을 넘기지 못했다. 암 투병 끝에 무표정하게 카메라 앞에 섰던 고객이 작가에게 던진 서늘한 질문 하나 때문이었다.
"작가님이 죽음을 알아요? 모르시는 것 같은데."
그 문장이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다. 이제 갓 서른이 된 내가, 죽음 근처에 가본 적도 없으면서 '데스 디자이너'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달고 활동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나대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이름만 번지르르하게 지어놓고 있어 보이려 애쓰는 가식쟁이가 된 것만 같아 얼굴이 뜨거워졌다. 내가 지금까지 브런치에 쓴 글들이 다 경험 없는 빈껍데기는 아니었을까 하는 자책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부끄러움이 차올라 그 순간 책을 읽는 속도는 한없이 더뎌졌고, 나는 한동안 빈 페이지만 응시해야 했다.
사실 내가 그토록 부끄러웠던 이유는, 책 속에서 작가에게 가시 돋친 질문을 던진 그 고객의 마음이 나의 과거와 너무나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 나는 노인의 삶을 주제로 한 전시회에 혼자 간 적이 있었다. 왜 굳이 그곳을 혼자 찾았는지 지금도 명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전시장을 나오며 내가 내뱉었던 감정은 차경 작가를 몰아세웠던 그 고객처럼 지독하게 비관적이었다.
당시 나에게 노년 혹은 할머니라는 존재는 전시회가 말하는 따뜻한 교훈이나 아름다운 마무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나에게는 외할머니에 대한 아픈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명절마다 친척들 앞에서 나의 콤플렉스를 대놓고 말하며 나를 구경거리로 만들곤 하셨다. 우리 손주 왔니 하며 진수성찬을 차려주는 TV 속 할머니의 모습은 나에게 판타지일 뿐이었다. 외할머니 댁에만 가면 음식에 손도 대지 못했고, 명절이 오기 전부터 엄마와 할머니 집에 안 가니 마니 하며 싸우며 도망치고 싶어 했다.
그 상처가 결국 독하게 살을 빼게 만든 동기가 되기도 했지만, 전시장에서 마주한 정형화된 노년의 서사는 나에게 기만처럼 느껴졌다. "내가 경험한 건 전혀 이렇지 않은데, 왜 죽음과 노년을 한 가지 교훈적인 길로만 포장하려 드는 거지?" 하는 반발심이 들었다. 그때의 나는 타인의 노력을 기분 나쁜 주입으로 치부해 버리는 날 선 관람객이었다.(돌이켜보면 열심히 전시회를 준비하고 만든 그분들에게 미안하고 죄송스러운 마음이다..)
그랬던 내가, 이제는 반대편에 서서 '죽음을 디자인하겠다'라고 말하고 있으니 그 모순이 얼마나 깊었겠는가. 함부로 죽음을 타이틀로 걸고 프로젝트를 기획했던 시간들이 과연 정당했는지, 책장을 넘기는 내내 스스로를 검열하고 또 검열했다.
부끄러움에 멈춰 서 있던 나를 다시 걷게 한 것은 177페이지였다. 차경 작가는 호주에서 만난 D와의 작업을 계기로 영정사진 프로젝트의 이름을 파이널리 미(Finally Me)로 완전히 바꾼다. 죽음이라는 주제를 너무 적나라하고 어둡게 보여주기보다, 오히려 삶을 더 잘 살기 위해 환기시킨다는 느낌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그 대목을 읽는 순간, 마음속에 엉켜있던 실타래가 조금씩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아, 내가 해야 할 일도 죽음을 예찬하거나 정의 내리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있는 죽음을 조화롭게 건드려 주는 것이구나.' 죽음을 남용하며 공포나 슬픔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기억함으로써 오늘을 더 선명하게 바라보게 하는 것. 그것이 내가 가져가야 할 진짜 태도임을 깨달았다. 죽음을 완벽히 알지 못한다고 해서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라,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되 그 경계에서 삶을 더 가치 있게 만드는 환기구 역할을 하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책의 후반부에서 작가는 솔직하게 고백한다. 바뀐 프로젝트조차 결국 초기 의도와는 동떨어지게 운영되는 느낌을 받았고, 처음의 취지와는 달라진 것 같아 고민이 깊어졌다고. 결국 작가는 프로젝트를 매듭짓고, 자신의 남은 여정을 지휘하기 위해 자유롭게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밝히며 책을 끝맺는다.
나 또한 고성에 내려와 브런치를 시작하며 선언했던 삶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을 수도 있다. 직장인을 그만두고 선택한 이 길이 정답이 아닐 수도 있고, 시간이 흐르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걷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은 나에게 말해준다. 이 모든 시도와 방황이 결국 나 자신을 자유롭게 살아가게 하기 위한 여정임을 말이다.
성공이나 정체성에 집착하며 스스로를 괴롭히기보다, 이 선택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다. 죽음을 디자인하겠다는 거창한 포부 이전에, 살아있는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그 순간의 감각들을 마음껏 누리고 싶다.
먼저, 이 책을 추천해 주신 분께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덕분에 저는 제가 브런치에서 활동하는 이름 뒤에 숨겨진 내면들을 다시 살펴볼 수 있었고, 다시 나아갈 용기를 얻었습니다.
이 글을 읽는 구독자분들과 지나가는 모든 분께도 제 글을 찾아와 주셔서 감사하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또, 저처럼 최근 들어 죽음과 삶이란 단어에 복잡한 마음이 든다면 조심스레 이 책을 한 번 읽어보시는 것을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작가님만의 파이널리 미를 찾은 것처럼, 우리도 지금 당장 살아있는 순간들을 마음껏 받아들이며 더 이상 불안과 초조함에 사로잡히지 않는 삶을 이루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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