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의 기록, 엔딩 노트

2026년을 준비하는 방식

by Designer Nine

12월 31일이다. 거리에는 새해 목표나 갓생을 다짐하는 계획들이 넘쳐난다. 하지만 나는 새로 산 다이어리에 할 일을 적기 전, 꼭 먼저 하고 싶은 일이 있다. 이미 가득 찬 마음에 무작정 새로운 것들을 얹는 대신, 불필요한 것들을 먼저 지워내는 일이다. 제대로 정리가 되어야만 다음 일을 시작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To-Do 리스트가 미래의 나에게 지우는 과제라면, 엔딩 노트는 과거의 내가 짊어지고 온 짐들을 내려놓는 작업이다. 전자가 더 많이 해내고 채워야 한다는 행동목표를 동력으로 삼는다면, 후자는 무엇을 멈추고 비울 것인지를 결정하며 얻는 선택에 집중한다. 내일의 계획을 세우기 전에 오늘까지의 나를 먼저 정돈하는 것, 그것이 엔딩 노트의 본질이다.


고성에서의 연말은 이 기록에 집중하기에 좋다. 책상 앞에 앉아 빈 노트를 한참 동안 응시하며, 무엇을 여기서 끝내야 할지 결정하는 일은 단순하지만 글로 표현하기는 어려웠다. 버릴 물건을 고르는 수준을 넘어, 지난 3-4년 동안 내 삶에 쌓인 수많은 마음의 짐 중 무엇을 덜어낼지 고민하는 과정은 나 자신을 아주 깊게 들여다보는 시간이었다.


4326.png




가장 먼저 한 고민은 나를 무겁게 만드는 감정들의 실체를 밝히는 것이었다. 서울에서 직장인으로 살던 시절과는 달리, 올해 12월 초부터 시작한 1인 프리랜서로서의 삶이 노트 위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몇 번 수익은 내봤지만, 매달 정해진 날짜에 성과급, 보너스까지 들어오던 직장인 시절의 월급과는 차이가 컸다. 그 숫자 사이의 간극을 마주할 때마다 정체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내가 과연 이 길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스스로를 의심하던 시간들이었다. 타인의 성취를 보며 느꼈던 조급함이나 명확한 근거 없이 나를 옥죄던 불안들이 내 생각을 흐릿하게 만드는 소음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나는 이 고민들을 내년으로 가져가지 않기로 했다.(그게 맘대로 되진 않겠지만 최대한 노력해 볼 예정이다) 노트에 그 감정들의 이름을 적고 정리했다. 내일부터는 이 불안들에 내 마음을 더는 쓰지 않기로 했다.


직장인 시절의 흔적은 마음뿐만 아니라 아직도 몸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서울에서 직장인으로 살아가려 애썼던 시간 동안 망가진 건강 상태를 마주하는 일은 생각보다 괴로웠다. 앞만 보고 달리느라 돌보지 못했던 몸의 신호들이 프리랜서로서의 홀로서기를 앞둔 나에게 아직까지 해결해야 할 짐으로 다가왔다. 이번 노트에는 내 몸을 함부로 대했던 지난날의 습관들도 함께 적어 넣었다.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내년의 나에게 줄 가장 큰 선물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실감한다.


직장인 때처럼 수익이 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매몰되어 스스로를 괴롭히던 태도를 끝내는 것이 이번 노트의 핵심이었다. 프리랜서로서 자리를 잡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내년의 과제로 남겨두되, 당장의 격차 때문에 쉴 때조차 죄책감을 느끼거나 무리하게 자신을 몰아붙였던 방식들을 이번 해와 함께 닫기로 했다. 끝을 맺는다는 것은 무언가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의 마음 공간을 비워내어 내년의 내가 조금 더 내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드는 과정이었다.


흑역사.png 스트레스성 체중 증가, 빈혈.. 3-4년 동안 돈은 꽤 벌었지만 건강은 많이 잃었다




엔딩 노트를 통해 하나씩 매듭을 짓고 나니, 다가올 2026년을 어떻게 보내고 싶은지가 이전보다 선명해졌다. 무언가를 더 많이 해내겠다는 욕심에 매몰되기보다, 비워낸 이 자리를 잘 유지하며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들에 더 깊게 몰입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직장인 시절의 기준과 비교하며 느끼는 강박 대신 나만의 루틴을 선택하고, 건강과 내실을 함께 다져가는 2026년이 되기를 바란다.


기록을 마치고 나니 마음이 한결 차분해진다. 비워낸 자리에는 반드시 그만큼의 새로운 여유가 생긴다는 사실을 이제는 믿는다.


이 글을 보는 모든 사람들이 2026년에는 좋은 일만 오기를 바란다.

아픈 일은 2025년에 놔두고 새로운 해에는 아프지 않기를.


2352523.png



*이 연재가 궁금하다면 구독해 주세요! 더 좋은 글로 찾아뵙겠습니다.



고성에서 삶과 죽음을 디자인하는 기록

[1화] 29살, 나는 왜 서울을 떠나 '데스 디자이너'가 되었나

[2화] 왜 삶의 마지막 소식은 '스팸 문자'처럼 보일까?

[3화] 내가 죽으면 내 '비공개 인스타'는 누가 지워줄까?

[4화] 나는 오늘, 꽤 괜찮은 유언장을 완성했다

[5화] 당신의 영정사진은 '신분증 사진'입니까?

[6화] 내일 내가 없어도, 이 방은 나다울 수 있을까?


#연말 #기록 #엔딩노트 #프리랜서 #고성 #데스디자이너

매거진의 이전글내일 내가 없어도, 이 방은 나다울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