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kg을 덜어내고 알게 된 ‘데스 클리닝’
이번 크리스마스에 동생과 가기로 했던 3박 4일 도쿄 여행은 결국 내년 2월로 미뤘다. 내가 예매할 당시 비행기 티켓값이 막판에 몇 배로 가격이 치솟았던 것도 문제였지만, 동생과 일정을 맞추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 연말은 고성 집에서 차분하게 한 해를 정리할 시간을 얻었다.
요즘 나는 몸과 공간을 조금씩 비워내는 중이다. 지난 11월 18일부터 식단과 운동을 병행하며 한 달 남짓한 시간 동안 9kg 정도를 감량했다. 살이 빠지니 몸이 가벼워졌고, 자연스럽게 방 안에 쌓인 물건들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평소 정리를 귀찮아하는 편이라 웬만하면 무시하고 살았겠지만, 몸의 무게를 줄이고 나니 방 안의 물건들도 좀 줄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며칠 동안 짐을 정리하면서 진이 조금씩 빠지다 보니.. 약간의 꼼수(?)가 생겨 청소연구소 등 청소를 대신해 주는 서비스도 알아보다가 우연히 ‘데스 클리닝(Döstädning)’이라는 말을 알게 됐다. 그냥 클리닝도 아니고 데스 클리닝이라는 단어는 처음이라 이게 뭔가 싶어 어떤 개념인지 자료를 찾아보고 조사하기 시작했다. 내용을 살펴보니 단순히 방을 치우는 기술이 아니라, 내가 죽은 뒤 남겨진 사람들이 내 짐을 치우느라 고생하지 않게 미리 정리하는 습관을 뜻했다.
데스 클리닝은 스웨덴의 작가 마르가레타 망누손이 제안한 개념으로, 북유럽의 오랜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단순히 버리는 행위를 넘어 남겨진 이들을 배려하는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담고 있었는데, 자료를 통해 확인한 핵심 원칙들은 다음과 같다.
1. 타인의 시선으로 물건의 가치를 재설정할 것: 망누손은 "가장 먼저 버려야 할 것은 당신에게만 소중하고 남들에게는 쓰레기인 것들"이라고 명시했다. 가족들이 내 유품을 정리할 때 물건의 가치를 몰라 버려도 될지 말지를 고민하며 죄책감을 느끼지 않도록 내가 미리 솎아내는 것이 핵심이다.
2. 큰 물건에서 작은 물건으로 진행할 것: 가구처럼 부피가 큰 물건부터 정리해야 공간이 비워지는 것이 눈에 보여 지치지 않는다. 사진이나 편지 같은 것들은 자꾸 들여다보게 되어 정리를 방해하기 때문에 반드시 가장 마지막 단계로 미뤄두어야 한다.
3. '슬렝아스(Slängas)' 상자의 원칙: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지질한 기록들은 상자에 따로 모아 겉면에 스웨덴어로 "Slängas utan att öppnas(열어보지 말고 버릴 것)"라고 적어두라고 조언한다. 이는 유족들이 고인의 사생활을 들춰봤다는 부채감을 느끼지 않게 하려는 배려다.
4. 선물의 의미를 다시 정의하기: 누군가에게 받은 선물이라도 지금 나에게 쓸모가 없다면 처분한다. 나에게 필요 없는 좋은 물건은 일찍 정리해서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보내는 것이 물건의 수명을 현명하게 마감해 주는 길이다.
5. 주변에 진행 상황을 알릴 것: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나는 지금 내 짐을 정리하고 있다"라고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스스로 정리를 계속하게 만드는 동기부여가 될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의 의미를 자연스럽게 전달하는 과정이 된다.
관련 내용을 조사하고 나니, 나중에 가족들이 겪을 번거로움을 줄여야겠다는 실질적인 당위성이 생겼다. 그제야 청소 서비스의 힘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 내 짐을 청소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다시 한번 명확한 이유가 생긴 것이다.
이유가 생기고 먼저, 쓰지 않으면서 자리만 차지하던 물건들을 골라 중고 거래 앱에 올렸다. 가족들이 나중에 일일이 가격을 알아보고 처분하려면 얼마나 번거로울지 생각하니, 지금 내가 직접 적당한 가격에 파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 섰다. 상태가 나쁘거나 팔기 애매한 것들은 미련 없이 분리수거함으로 보냈다. 플라스틱, 종이, 의류함으로 물건들을 분류해 내놓으며 불필요한 흔적들을 하나씩 지워나갔다. 몇 개는 무료로 필요한 사람에게 나눔 했다.
이렇게 단순히 짐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물건의 목록을 살피고 그것들의 처분 방식을 직접 결정하는 과정 자체에 집중해 보았다.
이유가 확실해져도 당장 모든 잡동사니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중고 거래 앱에는 여전히 구매자를 기다리는 물건들이 남아 있고, 방 안의 정리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하지만 쓰지 않는 물건들을 쌓아둔 채 외면하고 꼼수만 부리던 예전보다, 스스로 하나씩 분류하고 비워내는 지금의 과정이 훨씬 뿌듯하게 느껴진다. 내가 실제로 사용하는 물건들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죽기 위해 청소하는 것이 아니다. 내일 아침, 더 가벼워진 환경에서 내가 좋아하는 일에 더 몰입하기 위해 비워내는 것이다. 9kg의 무게를 덜어내고 데스 클리닝을 나름 실천 중인 지금, 나는 이전보다 훨씬 가벼운 연말을 보내고 있다.
한 해의 끝에서 마음이 복잡하다면 거창한 계획 대신 서랍 한 칸만이라도 비워보길 권한다. 비워낸 자리에는 반드시 그만큼의 여유가 생기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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