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수는 잘 지내고 있을까?
<우리는 함께 자란다> 뒷 이야기
<우리는 함께 자란다>를 출간한 지도 8개월이 지났다. 이 책은 한국어 강사인 내가 유치원에서 1:1로 여섯 살 다문화 아동 진수를 가르치며 서로 성장하게 된 이야기이다. 어른에게 반말을 하는 아이, 단체 활동을 거부하고 마음에 안 들면 친구든 선생님이든 때리는 등 유치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였던 진수는 수업을 하며 점차 나아졌고, 수업을 마칠 때에는 누가 봐도 유치원 생활을 즐거워했다. 그리고 나 또한 진수를 가르치며 마음속의 걱정과 근심을 덜어낼 수 있었고 스스로 성찰하고 앞으로 걸어갈 길을 다잡을 수 있었다.
내가 진수를 가르쳤던 건 2020년 6월부터 10월까지였다. 그런데 요즘 들어 특히 진수 생각이 많이 난다. 2020년 8월의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때 세종학당재단에서 2020년 하반기 해외 파견 교원을 모집하는 공고가 나와서 지원하려고 했다. 나는 2017년에 이미 세종학당재단 파견 교원으로 베트남 후에 지역에서 한국어를 가르친 경험이 있었다. 경력도 있고 파견 교원 시절 평가도 아주 좋게 받았으니 지원하면 붙을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했다. 후에에서 좋은 경험도 추억도 많이 쌓아서 언젠가 다시 세종학당재단 파견 교원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마침 내가 파견 가길 원했던 지역에 자리가 났다. 하지만 그것은 파견 교원이 되려는 둘째 이유였고 첫째 이유는 바로 그때 나의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진수를 포함해서 다문화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매우 좋았다. 힘든 점도 있었지만 보람찼고, 일하는 게 즐거웠다. 하지만 개인적인 사정은 그렇지 못했다. 우리 엄마는 우울증이었다. 그것도 몇 년 동안 고쳐지지 않는 우울증. 우울증에 걸리면 환자 본인도 당연히 힘들지만, 옆에서 지켜보고 도와줘야 하는 가족들도 정신적으로 아주 힘들다. 나는 엄마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일상에서 엄마를 중점으로 두고, 항상 엄마의 기분과 마음 상태를 신경 썼다. 조언해 주고 공감해 주고 같이 여행도 가고 항상 엄마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음식도 찾았다. 하지만 엄마의 상태는 조금 나아지다가도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것을 반복했으며, 어느 순간 엄마는 더 안 좋은 상태로 빠져버렸다. 내가 하는 모든 노력은 맨손으로 우울증이라는 단단한 바위를 깨려고 하는 헛짓에 불과했다. 2019년 12월, 결국 몇 번이나 바위를 내려치던 내 손은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우울증이라는 괴물이 엄마를 넘어 나에게도 전이가 된 것이다.
끔찍한 기분이었다. 혼자 있으면 아무 이유 없이 물속에 있는 것처럼 갑갑했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고 아무것도 먹기 싫었다. 슬픈 일을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이유모를 울분이 가슴에서 목구멍으로 올라와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터져 나왔고,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이런 증상은 오래가지 않았다. 우울증 치료 이력이 남는 게 싫어 병원에 가지는 않았지만 엄마가 이런 나를 보고 변하려고 노력했고, 다른 가족들도 나를 도와줬다. 우울한 감정은 쉽게 가시지 않았고, 그 이후에 코로나19가 터져 원하지 않은 실직을 하게 되어 내 상황은 더 안 좋아졌지만, 그래도 최악이었던 2019년 겨울만큼은 아니었다. 여전히 우울했고, 너무 불안정하고 열악한 한국어 교원의 상황 때문에 좋아하는 일을 그만두어야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힘들었지만, 적어도 아무 미래도 떠올릴 수 없는 건 아니었고 아무 이유 없이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울지는 않았으니까. 다만 나는 한 번의 우울증 위기를 겪고 나서 엄마의 우울증을 외면하려고 했다. 그건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엄마의 우울증과 또다시 맞서려고 하면 내가 큰 상처를 받을 것 같았다. 2019년 겨울이 다시 반복되는 게 무서웠다. 그래서 엄마와 심리적으로 거리를 두려고 했고, 정말로 우리 사이가 전보다는 좀 멀어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2020년 6월, 진수를 만나게 되었다. 아이를 가르치기는커녕 주변에 만날 수 있는 아이도 없던 내가 이 아이를 잘 보듬어 줄 수 있을까 고민도 많았고, 심적 신체적으로 고생도 많이 했고 우여곡절도 있었지만 진수는 고맙게도 나날이 좋은 변화를 보여줬다. 그런 진수를 보며 아이에게 정말 도움이 되는 선생님이 되기 위해 하루 종일 고민하면서 나도 내 안의 우울을 차츰 잊을 수 있었다. 이건 엄마에게도 좋은 영향을 줬다. 나는 집에 오면 진수와의 일을 부모님께 다 말했는데, 덕분에 좀 멀어졌던 엄마와 나의 사이가 조금은 가까워졌다. 그리고 엄마는 진수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응원했다. 진수가 말썽을 피웠다고 하면 안타까워하고, 좋은 모습을 보였다고 하면 정말 기뻐했다. 나중에는 내 부탁으로 한 거지만 진수와 영상 편지를 주고받기도 했다. 전보다는 조금 더 우울증이 괜찮아진 것 같은 모습도 많이 보여 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엄마의 우울증이 다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나 또한 내 안의 상처와 두려움이 없어진 것이 아니었다. 나는 엄마가 우울증 증상을 보일 때마다 그 상황을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상황을 피한다고 해서 감정도 피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나는 집이 너무 불편해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던 와중에 세종학당 해외 파견 교원 공고가 난 것이다. 지원서 작성은 거침없었다. 하지만 제출 버튼은 누르기가 힘들었다. 내가 가려고 했던 그곳으로 가고 싶은데, 여기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벗어나야 하는데...
코로나19로 해외 파견이 망설여졌던 것도 있지만 사실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은 진수였다. 진수는 이제 막 좋아지고 있었다. 반말만 하던 아이가 내가 고쳐주지 않아도 존댓말을 쓰기 시작했고, 책을 보면 도망치던 아이가 여전히 책을 싫어해도 아주 잠깐이지만 내가 읽어주는 책 내용을 듣기는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수는 나를 아주 좋아하고 의지했다. 아침에 유치원에 가면 다른 선생님들이 교실에서 기다리라고 해도 유치원 현관에서부터 발을 동동 굴리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매일 보는데도 오랜만에 만나는 것처럼 매일 나를 반겨준다. 내가 다른 친구들에게 조금만 친절하게 대해도 질투하면서 친구들이 나를 '진수 선생님'이라고 하면 뿌듯해한다.
이런 아이를 두고 떠나게 되면, 아이가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은 물론이고 큰 상처를 받지 않을까? 어린 시절의 큰 상처는 잊기 힘들고, 인격 형성에도 영향을 미친다는데. 아니야, 큰 상처를 받을 거라는 건 내 생각일 수도 있어. 더 좋은 선생님이 와서 진수를 잘 이끌어 줄 수도 있어. 솔직히 최선을 다했다고 해도 부족한 점이 많았잖아. 그리고 파견 교원이 되면 지금 버는 돈의 두 배는 넘게 벌어. 내가 진수를 아무리 아껴도 나와 혈연 관계도 없는 타인인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 아니야! 그래도 큰 상처를 받을 수도 있는 거잖아. 좋은 선생님이 되어 주겠다고 스스로 약속했잖아. 솔직히 지금 가려고 하는 건 도망치고 싶어서잖아. 도망치려고 진수를 나 몰라라 해도 돼?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서 머리가 너무 아팠다. 지원서 제출 마감일까지 고민했고, 결국 제출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다행히 그때 지원을 하지 않은 것이 나한테는 훨씬 좋은 결과로 돌아왔다. 진수는 그 이후로도 정말 많은 변화를 보여줬다. 한국어 실력도 좋아졌고 유치원 생활을 좋아하게 되었고, 무엇보다 유치원 선생님들도 입을 모아 칭찬할 만큼 태도가 좋아졌다. 그리고 우리는 더 많은 추억을 함께 쌓았다. 그 이야기로 나는 브런치에 가입해서 이야기를 풀어놓게 되었고 <우리는 함께 자란다>도 출판했다.
그리고 계약 연장이 불가능하게 되어 진수와 어쩔 수 없이 헤어졌을 때 세종학당재단에서 2021년 상반기 파견 교원을 뽑았고, 전에 가고 싶어 했던 그곳은 아니지만 선호하는 지역인 베트남 하노이에도 수요가 나서 망설임 없이 지원했다. 그렇게 2017년에 이어 2021년에도 세종학당재단 파견 교원이 되었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2021년 초부터 계속 한국에서 재택근무를 했었다. 파견을 가야 하는데 가지 못하는 상황이 불편하기는 했지만 그걸 제외하면 모든 것이 만족스럽다. 좋은 동료를 만났고, 학생들도 수업을 열심히 듣는다. 그뿐만이 아니다. 바로 우리 엄마...
진수 덕분에 엄마도 좋아지는 듯 보였지만 당연히 엄마의 우울증은 치료되지 않았다. 우울증은 우울한 감정이 아닌 병이다. 중증 우울증은 긍정적인 감정으로만 치료가 될 수 없다. 나는 꾸준히 엄마의 병을 외면하려고 했다. 병은 의사가 치료해야지 내가 치료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저 엄마가 치료를 잘 받길 묵묵히 응원해주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2021년 어느 날, 우울증을 이기려고 나름 노력하던 엄마는 결국 가슴을 쥐어뜯으며 무너져버렸다. 그런데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내 마음이 이상했다. 충격적인 모습인데도 그리 충격을 받지 않았다. 죽고 싶은 정도라며 오열하는 엄마를 보고 불쌍하고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은 드는데 옛날처럼 가슴이 턱 막히고 무섭지는 않았다. 엄마의 우울이 나의 마음에 큰 영향을 주지 않은 것이다.
'왜 그러지? 내가 나쁜 딸이고 엄마의 감정에 공감하지 않아서인가? 아니, 혹시 내가 마음이 강해진 거 아닐까? 엄마를 적극적으로 도와줄 수 있을 정도로.'
이런 생각이 들자 나는 엄마의 우울증에 맞서기로 했다. 엄마가 나에게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는 게 무섭지 않았다. 시간을 최대한 같이 보냈고, 이야기를 모두 들어줬으며, 우울증 환자 가족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공부했다. 그리고 내가 공부한 내용을 다른 가족에게도 공유했다. 그리고 시간이 될 때마다 정신 병원에 가서 엄마와 같이 의사를 면담했다. 의사선생님은 엄마의 상태를 '지금 당장 아파트에서 뛰어내려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태'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내가 옆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조언해 주셨고, 나는 그 조언을 잘 따랐다. 일을 하면서 엄마에게 집중했는데도 나는 전혀 심적으로 힘들지 않았다.
지금 엄마는 우울증 치료를 받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못할 만큼 너무나도 괜찮아졌다. 주기적으로 병원에 가서 상담도 받고 약도 먹지만 약도 아주 많이 줄였고 의사 선생님도 엄마 상태가 아주 좋아졌다고 하신다. 그리고 엄마는 진심으로 행복해한다. 오로지 나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진 결과라고는 할 수 없다. 좋은 의사 선생님을 만났고, 무엇보다 본인의 치료 의지가 강했다. 하지만 내 노력이 엄마에게 제일 긍정적인 영향을 줬다는 건 의사 선생님도 엄마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엄마는 내가 자신의 목숨을 구했다고 한다. 엄마와의 이야기는 너무 길기 때문에 나중에 브런치에서 따로 풀어놓으려고 한다.
지금, 그동안 골머리를 앓았던 문제가 올해 초에 해결되어 베트남으로 파견을 갈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베트남 하노이로의 출국을 앞두고 있다. 그래서 진수 생각이 요즘 들어 많이 난다. 내가 2년 전에 진수를 외면하고 해외 파견을 갔다면 어쩔 뻔했을까? 도망쳐서 간 곳에 낙원은 없다는데 나 또한 그렇지 않았을까. 그리고 브런치를 시작하지도 <우리는 함께 자란다>를 출간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직업에 대한 불확실한 믿음 때문에 방황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엄마를 잃었을 수도 있었다.
그때 지원을 하지 않은 나를 칭찬하고 싶고, 진수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보고 싶다. 잘 지내고 있겠지? 이제 8살이 되어 학교를 다니고 있을 텐데. 진수는 병설유치원에 다녔고, 병설유치원은 초등학교 건물 안에 있다. 우리는 처음 만난 날 학교 주변을 같이 걸었다. 나는 학교 건물을 가리키며 "다음에 진수도 형아 돼서 학교에 다니겠네."라고 했고, 아이는 "학교 싫어 형아 되기 싫어. 무서워."라고 대답했다. 유치원 생활도 어려워하는 아이였기에 학교는 더더욱 무서웠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마지막으로 본 진수는 학교에 들어가도 더 이상 무서워하지 않을 것 같았다. 선생님들이 입을 모아 칭찬할 만큼 태도도 좋아졌고, 한국어도 훨씬 잘하고, 유치원에 다니는 게 너무 재미있다고 말하는 아이가 되었으니까 학교에서도 잘 지내고 있을 것이다. 언젠가 인연이 다시 닿아 만나게 되면 그때 다시 진심으로 고맙다고 말해 주고 싶다. 그때까지 건강하게 잘 지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