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국어 교원 May 16. 2022

선생님은 인내심이 있어요

2018년 후에 세종학당 2학기

2018년 2학기에는 새로운 수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바로 '초급 회화'수업이다. 원래 세종학당 정규 과정은 <세종한국어1>부터 <세종한국어8>권까지인데, <세종한국어 회화 초급> 교재가 개발되어 2018년부터는 초급 회화 수업도 운영하기 시작했다. 정식으로 운영하기 전 시범 수업을 한 동기 선생님 말로는 회화 책이 좋고 수업도 재미있었다고 해서, 내가 이번 학기에는 우리도 초급 회화를 해 보자고 요청을 했다. 그렇게 해서 초급 회화 반이 개설되었다. 원래 후에 세종학당은 현지인 선생님이 문법과 어휘, 파견 교원 말하기와 듣기를 담당해서 한 반을 번갈아가며 가르치는 팀티칭으로 운영이 되는데, 초급 회화는 말하기 위주이므로 나 혼자 하게 되었다. 


초급 회화 1권은 <세종한국어1~2>권에서 회화 부분을 집중적으로 다룬 책이다.  세종 1부터 내용을 다루기 때문에 '안녕하세요'부터 배우게 되어 있다. 나는 <세종한국어2>를 공부할 수 있는 수준의 학생을 대상으로 모집했다. <세종한국어1> 수준의 학생은 진도를 따라오기 힘들 것 같았고, 무엇보다 반을 개설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이유가 당시 세종 2를 공부할 학생 중에 세종 1 수료는 했지만 아직 말하기 실력이 많이 부족한 학생이 몇 명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학생들에게 세종 2를 공부할 수 있기는 하지만 초급 회화를 공부하며 세종 1부터 다시 연습하는 것을 권했다. 그런데 그 학생들은 세종 2 수업과 초급 회화 수업을 같이 신청했다. 그럼 주 6일 수업을 듣는 것인데, 직장이나 학교를 같이 다니는 학생들인데 이렇게까지 공부하는 게 좀 놀라웠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건 따로 있었다. 나는 당연히 세종 2 수준의 학생들만 이 수업을 신청할 줄 알았다. 그런데 웬일인가, 세종 4를 공부하는 학생 세 명이 더 신청했다. 그리고 초급 회화 수업을 듣기 위해 새로 학당에 등록한 학생도 두 명 있었는데, 한 명은 세종 4 정도의 실력이었고 다른 한 명은 한국어 실력이 이미 중급이었다.(세종한국어는 1부터 4까지가 초급, 5부터 8까지가 중급이다) 그렇게 세종 2 학생 세 명, 세종 4 수준 학생 네 명, 중급 수준 학생 두 명이 초급 회화 1을 듣게 되었다.


나는 첫 수업 때 세종 4 수준 이상 학생들에게 말했다.


"회화 수업은 세종한국어1~2권 내용을 공부해요. 여러분이 공부하면 너무 쉬워서 재미없을 거예요. 그런데 왜 신청했어요?"

"한국인 선생님과 한국어로 더 많이 이야기하고 싶어서요."


한국인과 더 많이 이야기하고 싶어서 신청했다니, 학생들의 학구열이 놀라웠다. 수업이 너무 쉬워서 학생들이 재미없어할 것이라는 생각은 내 착오였다. 세종 2 학생들은 물론 다른 학생들도 수업에 집중했고 열심히 참여했다. 그래도 세종 4 이상 수준 학생들에게 좀 미안해서, 말하기 수업 연습 자료를 따로 만들거나 세종한국어 회화 2 내용을 편집해서 숙제를 주는 등 자료를 따로 만들었다. 수준이 서로 다르다 보니 신경 쓸 것이 많았지만, 학생들이 워낙 열정적으로 공부해서 비교적 수업이 순조롭게 진행이 되었다.


초급 회화 수업이 거의 막바지가 됐을 때, 나는 학생들에게 특별한 선물을 주고 싶었다. 비자 연장 때문에 한국에 갔을 때 한국에서 전통 등 만들기 키트를 우연히 봤는데, 학생들과 한번 만들어 보고 싶어서 사비로 몇 개 사 왔었다. 한국에서 15개 정도 사 왔는데 초급 회화 학생이 8명이니, 학생이 별로 없는 중급반 학생 중 원하는 학생을 초대하면 문화 수업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초급 회화 학생과 중급반 학생들을 대상으로 전통 등 만들기 문화 수업을 했다. 


전통 등 종류는 두 개였다. 하나는 전면을 복주머니와 한지로 꾸미는 사각 등, 하나는 민화로 꾸미는 육각 등이었다. 안에 작은 전등을 넣어서 진짜로 불을 켤 수 있었다. 사각 등은 만드는 방법대로 하면 잘 만들 수 있기에 크게 신경 쓸 것이 없었는데 민화는 좀 신경을 써야 했다. 나는 그림이나 색칠에는 영 소질이 없지만, 그래도 선생님인데 색칠을 잘 못하는 학생들에게 도움을 줄 수는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에 민화 색칠 연습을 좀 했다. 수업 당일 내가 연습한 색칠 기법을 학생들에게 알려주니, 학생들이 나를 엄청난 실력자라고 생각하는 듯해서 뿌듯했다. 사실 네이버 블로그 보면서 급하게 연습한 건데.


학생들과 만든 전통 등. 왼쪽 밑에 연꽃 색칠은 내가 했다.


학생들은 모두 훌륭하게 전통 등을 만들었고, 수업이 끝나고 페이스북에 자랑을 했다. 반응은 엄청났다. 수업을 듣지 못한 다른 학생들이 부럽다느니 자기들도 등을 만들어 보고 싶다느니 하는 댓글을 많이 달았다. 나도 재료가 부족해 일부 학생들만 만들게 한 게 미안했다. 다행히도 BBB코리아에서 수업 반응이 좋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번 2학기 수료식 때 전통 등 만들기 문화수업을 하기로 했다.


2학기가 끝나가고 성취도 평가 시험을 볼 때가 되었다. 회화 수업이기 때문에 말하기 평가만 보는데, 내용은 세종 1~2 수준이니 당연히 세종 2 학생들도 충분히 할 수 있고 세종 4 수준 이상 학생들은 너무 쉽게 할 거라고 생각했다. 세종 4 수준 이상 학생들은 아무리 쉬워도 시험이라 그런지 예상외로 긴장을 좀 하기는 했지만 막힘없이 대답했고, 100점 만점을 받았다. 하지만 세종 2 학생들이 시험을 볼 때는 정말 기운이 쫙 빠졌다. 내가 기대했던 수준에 많이 못 미친 것이다. 세종 1,2에 나오는 내용 중에서 말하기만 집중적으로 다룬 거라 이 학생들은 똑같은 내용을 두 번 들은 것인데, 기대한 만큼은 못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말하기 실력은 수업 초반과 그다지 달라진 게 없어 보였다. 애초에 이 수업은 이 학생들의 말하기 실력 향상을 위해 만들었던 거라 더 기운이 빠졌다. 내가 잘 못 가르쳐서 그런 거라는 생각, 학생들한테 욕심을 부린다는 생각도 들고, '내가 가르친 학생 중에 실력이 좋아진 학생들도 많은데 이 학생들은 열심히 가르치는데도 왜 이러지? 혹시 노력을 안 하나?' 하는 생각도 들기도 했다. 사람들마다 외국어 습득 능력이 다른 건 당연하고, 내 기대에 충족되지 않았다고 학생들이 노력을 안 한 것은 아닌데, 그리고 한국어를 꼭 잘해야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런데 성취도 평가에서도 그동안 배운 것을 거의 활용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 학생한테는 괜찮다고, 수고했다고 했지만 속으로는 화가 좀 나기도 했고 실망감과 자책감도 들었다. 학생이 올바른 대답을 하기를 기다렸는데, 그 기다리는 시간이 싫어서 빨리빨리 좀 대답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내가 인내심이 부족한 교사라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평가가 끝나고 학생들이 카페에 가자고 해서, 이런 감정을 숨기고 즐거운 척하며 카페에서 수다를 떨었다.


그런데 한창 이야기하던 중에 내 옆에 앉은 '번'이 뜻밖의 말을 했다. 번은 이번에 세종학당 수업을 처음 등록한 중급 수준 학생이다.


"선생님, 저는 선생님한테 정말 감사해요. 선생님은 인내심이 있어요."


당황했다. 내가 인내심이 있다니? 방금 전만 해도 스스로 인내심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는데? 혹시 내 마음을 알아채고 저런 말을 하는 건 아닐까? 그런데 뒤의 말을 들어보니 번의 진심인 것 같았다. 번은 진지한 표정으로 길지만 천천히, 또박또박 말하기 시작했다.


"저는 한국 회사에서 일하고 있어요. 한국어를 좋아하고 더 많이 연습하고 싶었어요. 한국인 동료들이 저를 도와주겠다고 해서 고마웠어요. 그다음부터 한국인 동료들하고 한국어로 이야기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저는 한국어 실력이 아직 좋지 않아서 말할 때 생각을 해야 해요. 그리고 발음도 안 좋고 문법하고 단어를 틀릴 때가 많아요. 동료들은 저를 도와줬지만, 제가 말할 때 답답해했어요. 그리고 말을 하면 항상 중간에 '틀렸어, 그거 아니야, 발음이 안 좋아'라고 말했어요. 점점 자신감이 없어지고 한국 사람하고 이야기하는 게 무서워졌어요. 그래서 다음부터는 한국어로 말하지 않았어요. 근데 계속 말을 안 하면 한국어 실력이 더 안 좋아질 것 같았어요. 그때 후에 세종학당에서 회화 수업을 한국인 선생님이 가르친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초급 수업이지만 신청했어요. 수업을 듣기 전까지도 좀 무서웠어요. 회사 동료들한테 들은 것처럼 틀렸다는 말을 많이 들을 것 같았어요. 그런데 선생님은 제가 잘못 말해도 계속 웃으며 끝까지 들어주셨어요. 제가 말을 다 했을 때 잘했다고 칭찬해 주시고 틀린 것을 고쳐 주셨어요. 또 대답할 때 시간이 좀 걸려도 웃으면서 계속 저를 기다려 주셨어요. 그래서 저는 선생님한테 말할 때 아주 편했고 한국어 실력도 좋아진 것 같아요. 이제 한국 사람과 말하는 게 무섭지 않아요. 저는 선생님이 인내심이 있다고 생각하고, 선생님께 아주 감사해요."


번의 말을 듣고, 감동과 동시에 죄책감이 들었다. 오늘 아침에 학생들이 대답할 때 시간을 끄는 것에 답답함을 느꼈던 것이 미안해졌다. 그리고 그 감정을 무의식적으로 학생들에게 내비쳤을까 봐, 그게 학생들을 위축시켰을까 봐 걱정도 됐다. 


예전에 다른 기관에서 근무할 때, 전국 말하기 대회에 나가는 학생을 지도했었다. 말하기 대회는 중고급 수준의 학생들이 참가하는 거였고, 우리 학생은 배우는 단계는 중급이지만 말하는 실력은 거의 초급 수준이었다. 그런데 나와 한 달 동안 수업 후에 만나서 계속 연습을 하니 말하기 실력이 좋아졌다. 말하기 대회 연습은 아주 순조로웠다. 대회 하루 전까지는 말이다. 그날 나는 실전처럼 연습해 보고 싶어서 같이 그 학생을 가르치고 있는 A 선생님께 부탁하여 심사위원처럼 발표를 듣고 질문을 해 달라고 부탁했었다. 큰 실수였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A 선생님이 오자 학생은 조금 긴장한 상태에서 발표를 시작했고 첫 문장부터 살짝 어색한 발음을 했다. 그러자 A 선생님은 바로 발표를 중단하며 발음을 지적했다. 그런데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이제까지 뭘 배운 거냐며 호통을 쳤다. 정말 사소한 문제였고 넘어갈 수 있던 건데 그렇게 지적을 해서 나도 당황했었다. 선생님은 화가 난 상태로 학생에게 계속 말해 보라고 했고, 학생은 뒤이어 발표를 이어 갔지만 당연하게도 몸이 굳어 버렸고 목소리도 작아졌고 말도 더듬었다. 그러자 A 선생님은 학생에게 폭언에 가까운 말을 하며, 절대로 말하기 대회에서 상을 탈 수 없을 거라는 말을 하고 나가 버렸다. 그 선생님이 나가자 학생이 말했다.


"선생님, 저 못할 것 같아요. 말하기 대회 못 나갈 것 같아요. 너무 무서워요."


나는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덜덜 떠는 학생을 다독이고 위로하며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고 했다. 대회 당일 날, 학생은 나한테 신신당부를 했다.


"말하기 대회 때 A 선생님 안 오게 해 주세요. 오시면 저 말 못해요. 선생님이 대회장 중간에 앉아서 우리 연습할 때처럼 웃으면서 이렇게 이렇게(고개를 끄덕끄덕) 해 주세요. 그럼 저는 선생님을 보고 말할 거예요. 그럼 긴장이 덜 될 것 같아요."


다행히도 A 선생님은 수업이 있어서 대회 당일에 오지 못했고, 나는 학생의 말대로 학생이 발표하는 내내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 결과, 학생은 쟁쟁한 실력자들 속에서 장려상을 탔다. 그리고 몇 년 후 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어 선생님이 되었다.


나는 A 선생님이 왜 학생한테 그렇게까지 말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나보다 훨씬 오래 그 학생을 가르쳤었고 학생에 대한 기대치가 아주 높았는데, 실력이 거기에 미치지 못하자 화가 나신 것이었다. 게다가 그 말하기 대회는 학교 대표로 한 학생만 나가는 거여서 학교의 자존심도 걸려 있었기 때문에 더 그랬을 것이다. 말하기 대회에서 상을 타지 못할 거라고 말한 건 진심이 아니었을 것이다. 학생이 장려상을 타자 같이 좋아하며 축하해 주셨다. 하지만 A 선생님은 그 학생한테 절대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었다. 그 선생님은 그동안의 학생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 뻔했고, 학생한테 한국어 말하기에 대한 트라우마를 안겨 줄 뻔했다. 상을 타지 못했으면 학생은 정말로 자기가 심각하게 부족한 줄 알고 한국어를 포기했을 수도 있다. 그럼 그 학생의 인생은 지금과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나는 이 일을 겪으면서 절대 학생이 말할 때 지적하고 끼어들지 않아야겠다고, 학생이 편하게 말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줘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물론 A 선생님처럼 화를 내고 폭언을 하는 건 원래부터 절대로 하면 안 되는 것이고 말이다. 그런데 이걸 잠시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 같다. 물론 겉으로는 티를 안 냈다고 생각하지만, 속으로는 학생의 말하기 실력이 생각보다 안 늘었다고 답답해하며 학생들을 조금 책망했다. 대충 공부하는 학생이면 몰라도, 정말 열심히 공부하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학생이 좀 느려도, 내 기대에는 미치지 못해도 끝까지 기다리는 태도를 가져야 했다. 번은 고맙게도 흐트러질 뻔한 내 태도를 바로잡아 주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시간을 잡고 싶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