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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국어 교원 Jun 28. 2022

고마웠던 사람들

2018년 후에 세종학당 3학기

누구나 살면서 크든 작든 항상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간다. 외국인으로서 해외에 살다 보면 그런 도움이 더욱 필요하다. 몽골 울란바토르에서도 베트남 후에에서도 이런 도움을 과분하게 받았고, 그 덕분에 2년 가까운 해외 생활을 별 탈 없이, 좋은 기억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이번 글에서는 후에에 살면서 고마웠던 사람들에 대해 말해 보려고 한다.


1. 동기 선생님, 김 선생님


나와 같이 후에 세종학당에 파견된 동기 선생님이다. 세종학당 교원이 되기 전, 나는 동남아시아 지역은 여행으로도 가 본 적이 없었고 모기와 벌레가 싫어 앞으로도 갈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코이카 단원 시절 필리핀으로 파견된 동기 단원이 전부 뎅기열에 걸려 고생을 해서 그런 것도 있었다. 그래서 세종학당에 지원했을 때 지망에 쓰지도 않은 베트남에 파견이 되어 당황했었고(그때 당시에는 지원할 때 1~3 지망을 쓰게 했다.) 걱정도 많았다. 하지만 같이 가는 동기가 있어 마음이 놓였고, 정말 김 선생님은 그 존재만으로도 정말 귀국할 때까지 의지가 되었다. 그리고 업무적인 면에서도 성격도 서로 잘 맞았다. 김 선생님이 집을 구하지 못해 6개월간 우리 집에서 같이 살았었는데, 한 번도 성격이나 생활 습관의 차이로 부딪힌 적이 없었다.


또 김 선생님은 배울 점도 많았다. 나보다 사회생활 경험이 많으셔서 업무적인 태도에서도 배울 점이 있었고, 차분한 성격과 상대방의 기분을 나쁘게 하지 않고 설득하는 말투 등도 닮고 싶었다. 같이 살 때 개인적인 일로 고민이 있어 이야기를 했었는데, 해결되는 건 없어도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적도 있었다. 같은 집에도 살았었고, 2년 가까이 같은 곳에서 근무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한 번도 서로 기분 상한 적이 없을까? 혹시 김 선생님이 나한테 불만이 있어도 참고 넘어가 주신 것은 아닐까 염려가 되어 귀국 전에 진지하게 물어봤는데, 그런 건 전혀 없고 내가 나이에 비해 이미 성숙하고 많은 경험을 하고 있다고 칭찬해 주셨다. 진심인 듯해서 다행이었다.


2. 후에 세종학당 선생님들


후에 세종학당 현지 선생님들이 없었으면 나와 김 선생님은 2년이 아주아주 힘들었을 것이다. 처음 파견 와서 집 구하는 것부터 해서 귀국할 때까지, 우리는 선생님들에게 과분한 도움을 받았다. 운영 요원 선생님들은 말할 것도 없다. 서로 잘 맞아 후에 세종학당 사무실은 분위기가 좋았다. 특히 2017년 말에 들어오신 늉 선생님과 2018년 1학기 후 들어온 린짱 선생님. 일이 처음이라 처음에는 서툴렀지만, 그만큼 순수했고 열정적이었다. 청소를 할 때 사람 몸만 한 쓰레기봉투에 들어가 보기도 하고, 갑자기 서로 한국 노래와 베트남 노래를 불러 보기도 하고, 오후에 당 떨어질 때가 되면 항상 소금 커피를 배달시켜 먹으며 수다를 떨다가 또 일에 집중하는 등 재미있게 일했다. 가끔 운영요원 선생님들이 베트남 음식이나 과일을 챙겨 올 때도 있었다. 집에서 잘 안 챙겨 먹던 나는 베트남 선생님들 덕분에 영양을 챙겼던 것 같다.


후에 세종학당 선생님들과는 아직도 연락하며 잘 지내고 있다. 올해(2022년) 하노이에 파견 교원으로 다시 와서 연휴 때 후에를 잠깐 갔었는데, 그리웠던 선생님들도 만나고 후에 세종학당도 갔다 왔다. 공항에 린짱 선생님, 그리고 린짱 선생님과 단짝이자 아끼는 학생이었던 찌 씨가 마중 나왔는데 린짱 선생님이 나를 보고 울었다. 나 또한 살짝 울컥했다. 다시 만나자, 한국으로 오면 연락해라 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계속 미뤄지다가 이렇게 만난 것이다. 후에 세종학당도 가 봤는데 코로나로 인해 그동안 오프라인 수업만 해서 교실에 책상과 의자가 한쪽으로 치워져 있던 것만 빼면 4년 전과 똑같았다. 심지어 내가 사용했던 방석과 실내화도 있었다! 우리는 4년 전으로 돌아가 수업하는 놀이(?)를 하며 놀았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수업 놀이. 그리고 오랜만에 후에 세종학당에 가서 옛날처럼 소금 커피를 주문해 마셨다. 1인당 두 개씩!


3. 경비실 아저씨


후에 세종학당 1층에서 항상 웃는 얼굴로 나를 맞아 주시던 후에대학교 국제교류처 건물 경비 아저씨. 아저씨의 인자해 보이는 미소는 항상 다른 사람도 기분 좋게 했다. 우리는 가끔 베트남어로 짧은 대화를 나눴다. 세종학당에서 일하다 보니 베트남에 살아도 베트남어로 이야기할 때가 별로 없다. 기껏해야 가게에서 "이거 얼마예요?", 카페에서 "커피 한 잔 주세요", 택시 탈 때 "~로 가 주세요"뿐이다. 그래서 할 수 있으면 주변 베트남 사람하고 이야기를 하려고 노력했는데 이 아저씨도 그 연습 상대 중에 한 명이었다.


나 : 안녕하세요. 오늘 날씨가 덥네요.

아저씨 : 아~ 정말 더워요.

나 : 요즘 건강하세요?

아저씨 : 그럼요. 선생님도 건강 잘 챙기세요.


내 베트남어 실력이 초급 수준이라 이 정도의 대화밖에 나누지 않았지만, 그래도 뜬금없이 말을 걸어도 웃는 얼굴로 받아주고 내가 이해할 수 있게 천천히 또박또박 호찌민 말로 대답해 주셔서 감사했다. 호찌민 말로 대답해 주신 게 왜 감사했냐면, 후에는 사투리가 아주 심한 곳이기 때문이다. 베트남은 표준어가 딱히 없고 하노이 말과 호찌민 말이 있다. 둘이 다른 언어는 아니고 발음과 자주 사용하는 단어가 조금 다르다. 후에는 하노이나 호찌민 사람들도 통역을 써야 한다고 할 정도이다. 인터넷에서는 후에 사투리로 가르쳐 주지 않아 나도 하노이와 호찌민 말로 공부했다. 그런데 아저씨는 내가 알아들을 수 있게 배려해 주신 거 같아서 감사했다. 베트남어를 잘한다고 거짓말도 해 주시고 말이다.


올해 후에에 갔을 때 아저씨도 만났는데 나를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로 환하게 반겨 주셨다. 린짱 선생님이 말하길, 가끔 내 안부를 물어보셨다고 한다. 이번에는 업그레이드된 베트남어 실력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그동안 후에가 많이 그리웠다, 지금은 하노이에서 일하고 있고 임기는 올해 말까지인데 내년에 베트남에서 어학연수를 할 생각도 하고 있다, 앞으로도 건강 잘 챙기셨으면 좋겠다 등등... 그러자 이번에는 놀란 얼굴로 진심으로 베트남어를 잘한다고 하셨다.

 

다시 만난 경비 아저씨


4. 집주인 아주머니


아주머니이기는 하기만 나는 집주인을 언니(chị)라고 불렀다. 집주인은 임대한 집에 정말 애정을 가지고 있는 분이었다. 처음 집을 보러 왔을 때 모델하우스 같다고 생각할 정도로 예쁘게 꾸며 놓고 있었다. 호텔에서 일한 경험이 있어서 남다른 센스가 있는 거 같았다. 내가 살던 아파트(빌라지만 여기에서는 다 아파트라고 불렀다)는 겉보기에는 아주 허름한 곳이었지만, 집주인 덕분에 집안은 집에 온 손님들은 다 칭찬할 정도로 예뻤다. 바퀴벌레만 덜 나왔으면 100% 만족했을 텐데. 집주인이라고 모두 다 임대한 집에 신경을 많이 쓰는 건 아닌데 이렇게 신경을 쓴 점이 좋았다. 그리고 집에 신경을 쓰는 만큼 나한테도 신경을 써 줬다. 월세와 전기+수도+인터넷 요금을 받으러 한 달에 한 번 집에 왔는데 올 때마다 과자나 과일 등 선물을 가져왔다. 나는 그 때마다 베트남어 말하기 연습을 했고, 집주인은 내 말을 잘 받아줬다. 경비 아저씨처럼 내가 알아들을 수 있게 천천히 또박또박, 후에 사투리를 안 쓰고 말이다. 내가 베트남어를 공부하고 베트남 문화에 관심을 두는 것을 좋아한 것 같다. 가끔은 아무 이유 없이 저녁을 사 주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좋다고 나섰고, 집주인은 베트남 음식을 맛있게 먹는 날 보며 흐뭇해했다.


내가 일시 귀국 했을 때는 내 선물뿐만 아니라 엄마 스카프도 선물해 줬다. 아주 예쁘고 고급스러운 스카프였다. 완전 귀국할 때도 선물을 줬다. 귀국하고 나서도 몇 번 페이스북으로 안부를 물어봤으며 내 게시물에 꾸준히 좋아요를 눌러 줬다. 올해 후에에 갔을 때 집주인한테도 연락을 했었는데, 하필 그 기간에 가족 여행을 하고 있어서 못 만났다. 다음에 또 한 번 후에에 가기로 했는데, 그때는 꼭 만나자고 약속했다. 이번에는 내가 좋은 선물을 준비해 가려고 한다.


5. 청소 아주머니


입주했을 때, 나는 청소 아주머니를 부를 생각이 없었는데 김 선생님이 계속 요구했다. 자신이 집을 구할 때까지만 청소 아주머니를 쓰자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청소를 분담해서 하면 서로 스타일이 다르기 때문에 분명 사소한 것에서부터 불만이 생긴다고, 그럴 가능성을 아예 만들지 말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 시간에 7만 동(약 3,500원) 일주일에 한 번 청소하는 걸로 불렀다. 나는 정확히 잘 모르지만 하노이나 호찌민에 비해서는 비싼 시급이라고 하는데, 후에에서는 집에 와서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드물기 때문에 비싼 거라고 했다. 비싼 시급도 그렇고 내가 그냥 청소하면 되는데 아주머니를 부르는 것도 그렇게 내키지는 않았는데 지나고 보니 김 선생님 말대로 한 게 잘한 거 같았다. 인터넷이나 주변 이야기를 들어 보면 서로 아주 친한 친구도 같이 살다가 청소 문제 때문에 갈라지거나, 불편하게 사는 경우가 있는데 우리는 그런 문제가 없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아주머니도 친절하셨고 아주 꼼꼼하게 청소해 주셨다.


그래서 김 선생님이 집을 구하고 나가신 이후로도 계속 아주머니를 불렀다. 상대적으로는 비싼 시급이라고 하지만 일주일에 3,500원, 한 달에 14,000원은 나한테는 방 두 개에 거실과 부엌, 베란다와 화장실까지 청소하는 수고에 비해 큰 돈도 아니고 갑자기 아주머니의 일을 끊는 것도 미안하기도 했고 말이다.


나는 아주머니를 경비 아저씨와 집주인을 이은 베트남어 말하기 상대로 삼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아주머니는 후에 사투리가 심하셨다. 그래서 말은 별로 안 했지만 그래도 약 2년 동안 바디랭귀지와 간단한 베트남어로 사이좋게 잘 지냈다. 아주머니는 청소도 열심히 해 주셨지만 정말 착하시기도 했다. 한 번은 변기에 걸쳐서 사용하는 변기세정제를 청소하시다가 안에 빠뜨리셨는데, 내가 계속 괜찮다고 했는데도 변기 세정제 값만큼 시급을 받지 않으셨다. 몇 번이나 원래 시급만큼 주려고 했는데도 꿋꿋하게 거절하시면서 말이다. 그리고 한 번은 아주머니가 청소 후에 나가실 때 나도 볼 일이 있어 나가려고 하자, 다음 일정이 있으신데 내 목적지까지 오토바이를 태워 주셨다. 착하고 성실하셨던 아주머니, 지금도 몸 건강히 잘 지내셨으면 좋겠다.



7. 학생들


베트남에 처음 갔을 때부터 귀국할 때까지 계속 학생들이 내 옆에 있었다. 브런치에도 몇 번 글을 썼듯이, 고마운 학생들이 너무 많다. 선생은 가르치면서 배우는 게 더 많다더니 정말 그랬다. 몇몇 학생들은 아직까지 연락을 주고 받고, 한국에 유학을 온 학생들과도 몇 번 만났었다. 세종학당 파견교원으로 재지원한 이유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다시 베트남으로 가려고 한 이유는 학생들의 영향이 크다. 후에 세종학당에서 그랬듯이 새로운 학당에서도 학생들과 재미있게 수업하고 좋은 인연을 만들어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잘 지내는 중이다.



이 외에도 고마운 사람들은 참 많았다. 나보다 힘이 없으실 것 같은데 1년 반 동안 4층까지 18리터 물을 배달해 준 물 할아버지, 내가 오면 항상 활짝 웃는 얼굴로 "반미?"라고 외치며 싸고 맛있는 반미를 준 식당 아저씨. 가끔 새로운 메뉴에 도전하면 "오!"라고 외치셨다. 다른 손님들에게 나를 우리 식당에 자주 오는 외국인인데 베트남어를 한다고 자랑하기도 하셨다. 학당 앞에 가끔 가던 식당 아저씨도 내가 귀국한 후 가끔 린짱 선생님께 내 안부를 물어보셨다고 한다. 사소한 거지만, 그렇게 나를 알아 주고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정말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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