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문화원 세종학당 1학기
나는 역사를 좋아한다. 그래서 어디를 여행 가든 거기에 있는 박물관이나 유적지를 웬만하면 방문하는 편이다. 하노이는 베트남 역사 문화의 중심인 만큼 박물관과 역사적 장소가 많이 있어서 좋다. 이번 글에서는 하노이와 하노이 역사 문화를 탐방한 내용을 쓰려고 한다.
문묘는 공자를 모시는 곳으로, 1070년에 세워졌다. 베트남 최초의 대학교이기도 하다. 날씨가 찌는 듯이 더운 어느 일요일 아침,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낼까 하다가 갑자기 문묘가 떠올랐다. 하노이의 대표 문화재로 문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었는데, 시간이 있으니 생각난 김에 거기나 한번 다녀올까 싶었다. 지도를 검색해 보니 버스로 금방 갈 수 있어서 바로 나갔다. 문묘 앞에 가니 사람들이 엄청 많았다. 입구 앞에는 사탕수수 주스인 느억 미어를 많이 팔고 있었다. 그리고 버려진 느억 미어 일회용 컵들도 넘쳐 났다. 하노이에서 길가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쓰레기는 더미는 일상이지만, 대표적인 문화재이자 교육의 정수라고 불리는 문묘 입구조차 그럴 줄이야.
아무튼, 나도 느억 미어를 하나 사고 문묘에 들어갔다. 관광객들이 많이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결혼사진을 찍는 듯한 팀이 몇 팀 있었다. 문묘 정원이 고풍스럽게 멋있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문묘에서 결혼사진을 찍는 것이 하노이의 문화인 것인지는 모르겠다. 연꽃으로 가득한 연못을 지나서 들어가니 또 다른 정원이 나왔는데 정원 좌우로 거북이가 큰 비석을 받치고 있는 석상 여러 개가 있었다. 무엇인지 몰랐는데, 나중에 정보를 찾아보니 1442년부터 1787년까지 시행한 과거 시험에 합격한 이름을 새겨 놓은 것이라고 한다. 과거에도 합격하고 이름도 문화재로 남겨지다니, 부럽다!
제일 안쪽으로 들어가니 큰 사당이 나왔다. 사당에는 중간에 제일 큰 제단이 있었고 양 옆으로 중앙보다 작은 제단이 있었다. 아무 정보도 없이 그냥 문묘에 간 것이라서 그때는 그게 누구의 제단인지 몰랐는데, 또 나중에 정보를 찾아보니 문묘는 공자뿐만 아니라 맹자와 증자 등 다른 현인들도 모시고 있다고 한다. 아마도 중앙은 공자, 옆에 있는 것들은 다른 현인들의 제단인 것 같았다. 제단마다 돈을 놓는 곳이 있었다. 사당 앞에서는 똑같은 교복을 입은 중학생들이 모여서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문묘는 베트남 학생들이 중고등학생 때 수학여행으로 꼭 오는 곳이라고 하는데, 아마도 수학여행을 온 듯싶었다. 선생님의 설명이 끝나고 묵직한 종소리가 뎅 뎅 울리자 비파인지 대금인지 전통 악기를 연주하는 소리가 났다. 그러자 거기 있던 수많은 학생들과 다른 베트남 관광객들이 고개를 숙이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나도 누군지 모를 분의 제단에 이천 동을 올리고 기도했다. 나를 포함해서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이 하노이에서 건강하게 지낼 수 있게 해 달라고.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중요한 기도를 드리는 만큼 돈을 더 드릴 걸 그랬다. 물론 현인들께서는 현인이시니만큼 돈에 연연하지는 않으시겠지만...
탕롱황성은 1010년 레 왕조 때 건설된 궁궐로, 1810년에 응우옌 왕조가 수도를 후에(Huế)로 옮길 때까지 베트남 왕조의 궁궐이었다고 한다. 문묘에 온 김에 탕롱황성도 가 보기로 했다. 사실 처음 목표는 탕롱황성이 아니라 호찌민 묘였다. 호찌민 묘는 문묘에서 걸어서 20분이 걸린다고 구글이 알려줬는데, 평소에 집에서 학당까지 20분이 넘는 거리를 걸어서 출퇴근하는 나였기에, '이 정도 거리는 그냥 걸어가야지!' 생각했다. 걸어가면서 낯선 거리도 구경해 보고 싶기도 했고 말이다. 방금 전 문묘에서 40분 시간을 보냈다는 것과 기온은 33도가 넘는다는 것을 잊고 바보같이. 걸어가면서 수많은 대사관 건물들을 봤다. 내 상태가 괜찮았다면 감상하면서 느긋하게 걸어갔겠지만, 나는 대사관 밀집 지역이라 그런지 내가 잠깐 앉아서 쉬면서 시원한 음료를 마실 수 있는 길거리 카페조차 계속 안 나와서 지치고 짜증이 났다.
'평소에는 눈에 치일 정도로 많이 보이는데 왜 여긴 없는 거야!'
물을 미리 챙겨 오지 않은 내가 바보였다. 문묘에서 느억 미어를 마셔서 그나마 다행이었지, 안 그랬으면 탈수될 뻔했다. 호찌민 묘로 가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식당과 카페가 있는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다행히 걸어서 5분 거리에 근처에 콩카페와 식당이 있었다.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식당 바로 근처에 있는 콩카페에서 코코넛 커피를 마시니 살 것 같았다. 카페에서 정신을 차리고 호찌민 묘 정보를 다시 찾아보니, 호찌민 묘는 오전에만 방문 가능하다고 나왔다. 어차피 가도 헛고생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구글 지도를 찾아보니, 내가 있는 곳 바로 근처가 탕롱황성이었다. 그렇게 꿩 대신 닭으로 탕롱황성을 구경하기로 했다.
탕롱황성은 하노이가 옛 왕조의 수도였을 때 궁궐이라는 것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라는 정보만 알고 들어갔다. 그래서 들어갔을 때 조금 놀란 점이 있었다. 하나는 생각보다 엄청 넓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넓은 것에 비해 남아있는 궁궐 터가 별로 없다는 것이었다. 입구로 들어가면 잔디밭밖에 없는 정원과 앞으로 쭉 뻗은 길이 있다. 길을 따라 걸으면 끝에 성벽과 황성의 진짜 입구가 나오는데, 그 건물만 이곳의 옛 영광을 나타내 주는 것 같았다.
성벽에 올라가니 아까 걸어온 정원이 시원하게 훤히 내려다보였다. 저 멀리 하노이를 상징하는 깃발탑(Cột cờ Hà Nội)이 보였다. 깃발탑은 깃발 포함 41m 높이의 탑으로, 1812년 응우옌 왕조 시대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정작 응우옌 왕조는 하노이의 700년 넘는 수도로서의 역할을 끝낸 왕조라는 걸 생각하면 참 아이러니하다.(응우옌 왕조는 1802년부터 1945년까지 존재한 베트남 마지막 왕조로, 창조하고 나서 수도를 후에로 옮겼다.)
성벽 뒤쪽으로 가니 건물 몇 개가 더 나왔다. 하지만 7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베트남 왕조의 궁궐이었다는 사실에 비해 황성의 규모는 초라해 보였는데, 알고 보니 프랑스 통치 시절을 거치면서 건물들이 많이 개조되고 헐렸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궁궐들도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많이 훼손되었는데, 어느 나라나 주권을 잃은 역사가 있는 궁궐은 그 당시의 애환을 보여주는 것 같다. 남아있는 전각들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일부 건물에는 베트남 왕조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또 일부 건물에는 탕롱 황성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1946년~1954년. 2차 세계대전 이후 베트남에 대한 식민 정책을 포기하지 않는 프랑스와 호찌민이 이끄는 베트남군의 싸움) 때 베트남 군의 군사 기지로 사용되던 때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지하 벙커였다. 벙커에는 인도차이나 전쟁과 지휘관들의 사진, 전쟁 당시 사용하던 물건, 지휘관들이 회의를 하던 자리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살면서 벙커라는 곳은 처음 와 봐서 느낌이 묘했다. 살짝 무섭고 갑갑한 느낌도 들고, 마치 내가 몇십 년 전 전쟁의 상황 속으로 들어온 느낌도 들었다. 바로 여기에서 호찌민이 전쟁을 지휘했다니, 다른 전시관과 달리 얼마 지나지 않은 역사라 그런데 더 체감이 되었다. 밖으로 나가니 전쟁 때 지휘관들이 타고 다닌 자동차도 있었다. 설명을 자세히 읽을 수는 없었지만, 사진으로 보아하니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최종 승리하고 승전 기념 행진을 할 때 탄 자동차 같았다.
6월 어느 날, 다른 세종학당 선생님의 초대로 바비산 근처 마을에 가게 되었다. 선생님의 학생이 거기 사는데, 한국인 선생님을 초대했다는 것이다. 학생의 집에 가기 전에 먼저 베트남 전통 마을이라는 곳에 갔다. 아주 특별한 것은 없었지만, 베트남의 옛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듯했고, 사진을 예쁘게 찍을 수 있는 장소가 몇 군데 있었다. 모델 촬영으로 보이는 팀도 몇 팀 있었다.
전통 마을 구경을 마치고 나서 학생의 집에 갔는데, 감사하게도 음식을 많이 준비해 주셨다. 나는 그냥 동료 선생님 따로 온 거지, 그 학생을 가르친 건 아닌데 이런 대접을 받아도 되나 싶어 미안할 정도였다. 그런데 동료 선생님은 베트남 시골 사람들에게 이렇게 외국인을 초대하는 일은 오히려 주변 이웃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일이라고, 앞으로 학생이 집에 초대하면 부담 갖지 말고 가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음식을 아주 배불리 먹고 집에서 노래도 부르며 놀았다.
음식을 다 먹고 시간이 있으면 국립공원으로 유명한 바비산에 가자고 했었는데, 이 날은 기온이 34도 가까이 되는 더운 날이었다. 이미 전에 전통 마을을 구경하면서 땀을 진탕 흘렸기 때문에 그냥 집 근처 구경할 곳에 가기로 했다. 그러다가 들린 곳이 바로 이곳이다. 어떤 곳인지 사전 정보가 전혀 없는 상태로 갔다. 심지어 우릴 초대한 학생도 거기가 뭐 하는 곳인지 몰랐다. 안내판을 보니 옛날 왕조의 별궁이었다고 한다. 별궁은 흔적이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 입구에 탕롱황성 앞에 있던 탑의 작은 버전으로 보이는 탑과 제사를 지내는 곳이 있었다. 나는 문묘에서처럼 거기에서도 돈을 시주하고 하노이에 있는 동안 건강하게 해 달라고 짧게 기도를 드렸다.
별궁 뒤쪽으로 가니 옛날 이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산책을 즐겼을 법한 작은 숲길이 나왔다. 숲길을 걸으니 더운 게 한결 시원해졌다. 싱그러운 나무 냄새와 풀 냄새가 더위에 지친 내면도 시원하게 해 주는 것 같았다. 숲길을 나가니 헬리콥터와 전투기가 나왔는데, 분명 옛날에 실제로 사용했던 거고 무슨 의미가 있어서 전시해 논 것 같았는데 딱히 안내문이 없어서 무슨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다. 흠... 이게 왜 별궁 뒤에 있을까? 그냥 사진 찍으면서 재미있게 놀았다.
바비산에 다녀오고 1주일 후, 갑자기 박물관에 가고 싶어졌다. 호안끼엠 주변에 무슨 박물관이 있나 구글맵을 찾아보니 베트남 여성박물관과 호아로 수용소가 나왔다. 우리 집에서 걸어갈 수도 있는 거리였다.
호아로 수용소는 프랑스 식민지 시절(1887년~1954년) 프랑스인들이 베트남 정치범(독립운동가)들을 가두고 고문, 사형까지 실시한 곳이다. 독립 이후에는 베트남 전쟁 때 미군 포로수용소로 쓰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서대문 형무소와 비슷한 감옥이다. 수용소에 들어가자 직원이 나에게 '한국어? 한국어?'라고 하며 한국어 음성 안내기를 빌리겠냐고 물어봤는데, 가격이 10만 동(약 5,500원)이라 안 빌리려고 했다. 그런데 내부에 들어가 죄수들이 발목 족쇄로 서로 줄줄이 엮여 갇혀 있는 모형을 보니 '아, 이건 설명 들으면서 봐야 된다'는 생각이 딱 들어서 다시 입구로 돌아가 음성안내기를 빌렸다.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가 고통받은 분들의 역사를 더 자세히 알고 싶어 졌기 때문이다. 덕분에 수감자들의 고통을 더 생생하게 알 수 있었고 그 속에서의 감동적인 이야기도 들었다. 그리고 안내기가 없었으면 그냥 지나쳤을 중요한 물건들에 대한 정보를 자세히 알 수 있었다.
몇십 명의 수감자들은 전부 발목에 족쇄를 차고 있었고, 그 족쇄들은 전부 한 줄로 연결이 되어 있었다. 감옥은 수용 가능 인원을 훨씬 초과하는 인원이 갇혀 있었고, 방 안에 변소가 있었다. 수감자들은 서로 연결이 되어 있어 자유롭게 용변을 볼 수 없었고 더군다나 용변을 보는 시간도 정해져 있었다고 한다. 아주 기본적인 인간적 대우도 받지 못한 것이다. 거기다가 방 안에 아무 가림막 없이 변소가 있어 위생 문제도 심각했으며, 이로 인해 죽은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제1수용소가 제일 큰 수용소였는데, 이곳은 큰 철문이 있었다. 기억은 자세히 안 나지만, 사형이 집행되는 날만 열렸던 철문이라고 했던 것 같다. 철문 뒤 방으로 가니 수감자들이 사용하던 옷 등 생활용품이 나왔다. 이 옷은 교도관들이 단 한 벌만 제공해 주었기 때문에, 수감자들은 옷을 빨아서 입을 수가 없었다. 단체로 몇 달 동안 계속 항의를 해서(아마 옷을 안 입었다고 설명했던 것 같다) 여분의 옷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외에도 물건 하나하나의 사연을 설명해 주어서 실감이 났다. 이곳은 임산부를 포함한 여성과 아이들도 갇혀 있었다. 태어난 자체만으로 축복받아야 할 아이들이 태어나마자마 죄인 취급을 받았을 생각을 하니 안타까웠다.
감옥을 나오니 굉장히 큰 나무가 보였는데, 수감자들에게 유일한 안식처였던 나무라고 한다. 수감자들은 여기서 그나마 마음을 달랠 수 있었고, 나뭇잎은 병균을 없애는 효과였는지 다친 곳을 치료하는 역할이었는지 확실히 기억은 안 나지만 수감자들의 건강도 챙겨줬다고 한다.
이 외에도 수감자들의 탈출 시도 이야기, 수감자들의 사랑 이야기를 들으며 관람했다. 특히 여성 혁명가 황 응언과 번 투의 사랑 이야기는 정말 가슴 아프게 들었다. 황 응언과 번 투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는데, 같이 호아로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열악하다 못해 지옥 같은 수감 생활과 고문들도 그들의 사랑은 갈라놓지 못했지만, 번 투는 결국 수감 중에 사형당했다. 황 응언은 다행히 살아서 출소했고 여성 독립운동가로서 큰 활약을 했지만 번 투를 끝까지 잊지 못해 결혼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프랑스인들이 베트남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한 방법은 몸서리쳐질 정도로 잔인했다. 수용소에는 독방도 있었는데, 언뜻 보면 다 같이 갇힌 것보다 차라리 독방이 낫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설명을 들으니 그 방은 방 자체가 고문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의도적으로 약간 경사지게 만들었는데, 발이 창살에 묶여 있는 수감자들이 똑바로 누우면 머리에 피가 쏠리는 구조였다. 앉을 수도 없고 누울 수도 없게 만든 구조인 것이다. 이곳에서도 역시 사람이 많이 죽었다고 한다.
수용소 안에는 단두대도 있었다. 흑백 사진이지만, 단두대로 처형당한 사람들의 사진도 있어서 무서웠다. 단두대 앞에는 사형수들의 감옥이 있는데, 감옥에 갇혀 동료들이 죽는 걸 보는 수감자들의 마음이 어땠을지는 차마 상상이 안 간다. 프랑스 식민 시절 호아로 수용소를 나오니 희생당한 베트남 독립운동가들을 위한 추모비가 보였다. 나도 잠깐이나마 그들을 위해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그다음으로는 호아로 수용소가 베트남 전쟁 때 미군 포로수용소로 사용되던 시절 사진과 전시품이 있는 곳이 나왔다. 나는 이곳을 관람하면서 호아로 수용소는 단순히 역사를 보여주는 장소가 아닌 프로파간다(propaganda. 어떤 것의 존재나 효능 또는 주장 따위를 남에게 설명하여 동의를 구하는 일이나 활동. 주로 사상이나 교의 따위의 선전을 이른다.)적 성격을 지닌 곳이라는 성격이 들었다. 호아로 수용소는 미군들에게 '하노이 힐튼'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 정말 호텔 같아서 그런 게 아니라, 미군들을 수용해서 그런 것이다. 오디오 해설에서도 비슷하게 설명을 했다. 그런데 미군 포로수용소 시절 이야기와 사진에는, 베트남이 얼마나 미군에게 인간적으로 대했는지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다. 거의 죽어가던 포로를 치료해서 살려주고, 취미 생활을 하게 해 준 이야기도 나왔고, 호아로 수감 시절이 아주 나쁘지 않았다는 식의 포로들의 증언도 들려줬다. 사진은 베트남 의사들이 포로들을 치료하는 사진과 포로들이 웃고 있는 사진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과연 자신들의 적이고 전쟁 중에 수많은 베트남인을 사살하다가 잡힌 포로에게 정말 저렇게 인간적으로만 대우했을까? 이런 의문이 들었던 건 미군 포로를 병원에서 치유했다는 설명을 들었을 때였다. 그런데 거의 마지막 전시실에서 프랑스 식민지 시절 몇몇 수감자들이 심각한 정신병에 걸린 척해서 병원으로 이송이 되었고 그 병원에서 탈출하여 수용소의 행태를 밝혀 결국 모든 수감자가 풀려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다면 프랑스 식민지 시절 때도 수감자들을 병원으로 이송해서 치료를 받게 했다는 것인데, 정치범 수용소 시절을 관람할 때는 전혀 나오지 않았던 병원 이야기가 미군 수용소 시절에는 계속 강조가 된 것이다. 나중에 호찌민 시에 있는 전쟁 박물관에 갔을 때도 똑같은 느낌을 받았다. 전쟁 박물관은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에 의한 베트남군의 피해를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 전쟁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비극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그런데 베트남 전쟁 때 북베트남과 베트콩(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미군과 남베트남에 대항한 무장 투쟁 조직)이 저지른 학살도 있었는데(대표적으로 후에 대학살. 후에 지역에서 여성과 아이를 포함한 민간인 6천 명을 대량 학살함) 그런 것은 전혀 다뤄지지 않아서, 이 박물관은 단순히 역사를 보여주는 곳이 아니라 프로파간다적 역할을 하는 곳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베트남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 가서도 전쟁박물관이나 호아로 수용소처럼 역사의 한 상황을 보여주는 박물관은 그 역사적 배경을 먼저 알아보고 방문해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