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살다 보면 날카로운 송곳이 되어 잊을만하면 생각나 마음을 찌르는 기억 하나쯤은 있는 것 같다. 나에게는 2015년 어느 겨울날이 그렇다. 6년이 지난 지금도 매서운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추위가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파가 되면 그날의 기억도 내 몸속을 비집고 들어온다.
당시 나는 몽골에 코이카(KOICA. 한국국제협력단) 한국어 교육 봉사단원으로 파견되어 울란바토르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몽골은 한겨울에 새벽에는 영하 40도, 한낮에도 기본적으로 영하 20도로 내려가는 추운 국가이다. 그날도 숨을 쉬면 한기가 몸속을 훑는 것 같은 추운 날이었고 폭설까지 내리는 날이었다. 나는 학교에서 아침부터 4시간 연속 수업을 해서 완전히 지쳐 있었다. 다행히 오전 수업만 있었기 때문에 점심시간에는 집에 갈 수 있었다.
하지만 4시간 연속 강의를 해서 너무 힘이 없었고 배도 고팠다. 도저히 그 상태로 집까지 갈 수가 없어서 학교 근처에서 점심을 먹고 가기로 했다. 학교 근처에는 간단한 몽골 음식을 파는 식당이 몇 군데 있었다. 그중에서 학교에서 길을 건너면 바로 있는 식당으로 갔다. 평소 학생들이 맛집이라고 추천한 집이기도 했다.
어느 몽골 현지 식당이 그렇듯 그 식당도 테이블이 6개 정도 있는 작은 식당이었는데,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모든 자리에 손님이 앉아 있었다. 다행히도 2인용 테이블에는 아이 한 명만 앉아 있었다. 나는 그 아이의 앞에 앉아서 메뉴판을 봤다. 주인인 아저씨가 그 아이를 보며 툴툴대며 잔소리를 하는 것으로 보아 주인의 아이라고 생각해서 앉아도 되겠거니 한 것이다.
아이는 여자아이였다. 키는 성인 남자의 무릎이나 간신히 넘을까. 눈대중으로 봐서는 겨우 다섯 살 정도 되어 보였다. 사장은 내가 자리에 앉자 아이에게 더 툴툴댔다. 아마도 '손님인 내가 자리에 앉았으니 자리를 비켜주라는 말을 했겠지'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는 사장이 뭐라고 해도 자기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닿지도 않는 발만 이리저리 휘젓고 손가락을 조물거리며 놀고 있었다. 나는 무엇을 시킬지 고민하면서도 아이가 귀엽다고 생각했다. 아이의 순진한 모습과 똘망똘망한 눈빛이 좋았다.
배가 너무 고팠기에 10초 정도만 메뉴판을 구경하고, 지치고 굶주린 내 배를 채워 줄 음식으로 감자 샐러드와 호쇼르(xуушуур) 2개를 선택했다. 샐러드는 2,000 투그릭(Төгрөг. 몽골 화폐 단위), 호쇼르는 두 개에 3,000 투그릭 정도로 합쳐서 우리나라 돈으로 겨우 2,000원 정도였다. 하지만 몽골에서는 현지 식당에 가면 이 돈으로 꽤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다. 나는 자리에 앉아 주인에게 샐러드와 호쇼르를 주문했다.
감자 샐러드와 호쇼르
그런데 주문을 마치자 안그래도 짜증이 가득해 보이던 사장의 얼굴이 더 구겨졌고, 그전까지는 그래도 꽤 평범하게 잔소리를 하던 사장이 갑자기 아이에게 큰 소리를 쳤다. '나는 아이가 앞에 앉아 있어도 상관없는데'라고 생각한 찰나, 사장은 무서운 얼굴로 아이에게 다가와 냅다 뒷덜미를 잡았다. 그리고 화를 내며 그대로 아이를 문 밖으로 집어던지다시피 내쫓았다. 발을 동동 거리며 혼자 손가락 장난질을 치던 아이는 찢어지듯이 울며 그렇게 밖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나는 너무 놀라 그대로 굳어버렸다. 사장은 문을 쿵 닫고 꿍얼거리며 제자리로 돌아왔고, 문 밖에서는 문을 두드리며 엉엉 우는 소리가 들렸다. 가게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문 쪽을 흘깃 바라보며 안됐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하던 식사를 계속했지만, 나는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지?' 하는 생각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이를 훈육하는 건가? 아니, 애가 무슨 잘못을 했는데? 그리고 아무리 훈육이라도 지금 밖은 영하 20도가 넘고 폭설이 오는데 밖으로 내쫓아? 애가 다른 데 가면 어쩌려고!'
시간이 지나도 주인은 아이의 흐느낌에 아랑곳하지 않았고 그제야 나는 상황 파악이 되었다. 아이는 주인의 아이가 아니라 거리의 아이였던 것이다.
울란바토르는 거리에 부랑자들이 많이 있다. 지하도에는 부랑자들이 한쪽 벽에 줄줄이 누워 있고, 거리에서는 아이를 데리고 구걸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들은 추운 겨울에는 따듯하게 쉴 곳이 없어 하수구에 사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래서 몽골은 겨울에 하수구를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거기 사는 사람들 때문에 하수구가 열려 있어서 땅을 안 보고 앞만 보고 가다가 하수구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식당 주변에 있다가 손님이 남기고 간 음식을 마저 먹기도 하고 식당과 카페 손님들에게 껌을 팔기도 한다. 이런 거리의 부랑자들은 어른과 아이 할 것 없이 많이 있었다.
나 또한 몽골에서 숱하게 많이 보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쫓겨난 아이는 너무 어렸고, 밖의 날씨는 너무 혹독했다. 내가 가게에 들어왔을 때 가게 주변에 아이의 보호자로 보이는 사람은 전혀 없었다. 당황해서 멍하니 있는 사이에 내가 주문한 음식이 나왔고, 아이는 문밖에서 여전히 울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불러서 같이 먹게 해 줄까?'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아이를 불러 따뜻한 음식을 먹이면, 그다음은? 아이는 갈 곳이 없고 부모도 없다. 내가 아이를 책임질 건가? 외국인이고 돈도 별로 없는 내가? 나는 아이를 매몰차게 내쫓은 사장을 무정하다고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거리의 부랑자' 때문에 몽골 식당들이 골머리를 앓는 것을 많이 봤기 때문이다. 식당에서는 이런 거리의 부랑자들을 바로 내쫓으려 한다. 식당은 자선 단체가 아니다. 주인에게 나도 책임질 수 없는 선의를 부탁할 수는 없었다. 잠깐의 따뜻한 식사가 과연 아이에게 도움이 될까? 오히려 식당 주인에게는 민폐이고 아이에게는 이루어 줄 수 없는 기대감만 주는 것이 아닌가. 그래도 주인은 아이를 불쌍하게 여겨 식당에서 바로 내쫓지는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돈을 내고 정당하게 음식을 먹는 손님'인 내가 자리에 앉자, 아이가 장사에 방해가 된다고 느껴 그렇게 내보낸 것이겠지. 결국 내가 자리에 앉아서 아이는 추운 한파 속에 내쳐진 것이다.
따뜻한 음식이 모락모락 김을 내며 나를 기다렸지만, 배가 너무 고팠음에도 도저히 숟가락을 들 수가 없었다. 아이의 흐느낌이 멀어진 후에야 한 입을 먹었다. 음식은 맛있었고, 더 먹고 싶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맛있는데 먹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음식을 먹고 있었다. 방금 내쫓긴 그 아이는 엉엉 울며 거리를 헤매고 있을 텐데. 심지어 다른 거리의 아이들보다 너무 어려서 이대로 계속 헤매면 얼어 죽을 수도 있는데.
나는 주문한 음식을 다 먹지 못하고 남겼다. 복잡한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 양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한국 돈으로 겨우 2,000원, 그렇게 주문해도 양이 많아서 남겼는데 누구는 300원도 없어서 따뜻한 우유차 한 잔도 못 마신다. 그런 모순적인 현실이 싫었고, 아이를 내몰고 음식을 배불리 먹은 내가 싫었고, 그런 상황을 눈앞에서 보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가 또 싫었다.
집에 오는 길에 계속 속이 울렁거렸고, 결국 그렇게 많이 먹은 게 아닌데도 내 뱃속에 있는 음식물이 싫어 소화제를 먹었다. 잘못한 것이 없는데 죄책감이 나를 옭아매는 것 같았고, 뱃속의 음식물은 내 죄책감의 부산물 같았다.
최근에 형편이 어려운 배고픈 형제에게 치킨을 무료로 준 철인 7호 치킨 이야기를 보면서 철인 7호 사장님이 부러웠다. 사장님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왔을 때 바로 도와줄 수 있었으니까. 나도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지금도 폭설이 내리는 날이 되면 아이의 찢어지는 듯한 울음소리가 생각이 나서 마음이 아프다. 그날의 기억은 이렇게 날카로운 송곳이 되어 가끔 나를 찌른다.
가난은 죄가 아니라고 하는데, 그 아이는 대체 왜 그렇게 인생의 시작점부터 불행해야 할까.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 것은 알지만, 그 아이가 건강하게 그리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