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모순적인 존재인 것 같다. 때로는 지나지 않았으면 하면서 또 때로는 빨리 지나가 버렸으면 하는, 누군가에게는 더없이 필요한데 누군가에게는 더없이 필요 없는, 그러나 야속하게도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존재.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 나는 종합병원 안에 있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지금은 그 병원 주변이 개발되어 여러 건물들이 생기고 가게도 많이 들어왔지만, 그 당시에는 병원은 큰데 이상하게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종합병원이라서 안 그래도 손님이 많았는데, 주변에 가게와 편의점이 없어서 우리 편의점은 항상 바빴다. 오후 4시까지는 점장님과 부점장님, 아르바이트생 두 명까지 네 명이 일하고 4시 이후에는 나를 포함한 아르바이트생 두 명이 일하는데도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오후 7시 반까지는 병원 진료받으러 온 사람들, 입원한 환자들, 의사와 간호사를 포함한 병원 직원들, 병문안을 온 사람들로 북적였고, 손님들이 줄을 서서 계산하는 게 일상이었다. 손님이 많은 만큼 물건이 빨리 빠져서 물건도 계속 채워 놔야 했다. 게다가 우리 편의점은 본사 직영점이라 단순히 판매를 하는 것 외에도 다른 가맹점 아르바이트생 교육 등 이것저것 신경 써야 하는 일이 많았다.
오후 7시 반 이후에는 손님들이 조금 줄어드는 대신 주문한 편의점 물건들이 왔는데, 아주 큰 트럭의 절반이 우리 편의점에서 주문한 것들이었다. 가뜩이나 짐이 많은데 종합병원 편의점이라 음료 세트가 많아서 그 짐을 낑낑거리며 옮기는 것이 힘들었다. 짐을 옮기고 나면 주문한 것과 실제 온 물건이 수량과 품목이 맞는지 파악해야 했다. 새로 온 물건들은 대충 정리해 놓으면 야간 타임 아르바이트생들이 창고 안에 잘 정리해 놓는데, 그 많은 짐들을 확인하면서 손님들 계산도 계속 받아야 해서 정신이 없었다. 이렇게 바쁜 일이 다 끝나면 11시가 되는데, 그때가 되어야 우리는 조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날도 그렇게 평범하게 바빴던 날이었다. 오후 4시부터 밤 12시까지 근무였던 나는 물건 확인을 다 끝나고 손님도 별로 없어 한가해진 편의점에서 어서 빨리 퇴근 시간이 되기를 기다렸다. 나는 대학교 2학년이었고, 평일 오전부터 수업을 들으면서 오후에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일상이 피곤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었다.
‘야간 알바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 인수인계 마치고 딱 12시에 퇴근할 수 있게.’
그렇게 핸드폰 시계만 쳐다보며 시간이 빨리 가기를 기다릴 때였다. 술 냄새를 약간 풍기는 한 중년 남자가 편의점 안으로 들어왔는데, 나를 보고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아가씨는 시간이 많아서 좋겠어~”
‘무슨 소리일까?’ 싶었지만 술에 취해 그렇겠거니 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하루에 오후 4시~12시 타임에만 거의 5백 명의 손님을 받다 보니, 수만 가지 종류의 사람을 만나 봤다고 자신할 수 있다. 이분도 그 많은 특이한 손님 중 하나겠거니 했다.
"그런데 여기는 술이 없나?"
"네. 여기는 병원 안이라서 술하고 담배는 안 팔아요 손님."
"아 그렇구나. 그런데 아가씨는 시간이 많아서 좋겠어~"
손님은 과자를 고르면서 또 한 번 거의 노래를 부르듯이 나보고 시간이 많아서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저 손님이 계산을 마치고 빨리 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 합쳐서 OOO원입니다. 할인이나 적립되는 카드 있으세요?”
“없어요~. 아가씨는 시간이 많아서 좋겠어~”
“네. 여기 거스름돈 드리겠습니다. 현금영수증 해 드릴까요?”
“......”
손님은 거스름돈을 받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나는 마치 노래를 부르듯이 ‘아가씨는 시간이 많아서 좋겠어~’라고 하던 손님의 갑자기 축 처진 어깨가 왠지 모르게 처연해 보였다. 몇 초의 침묵 끝에 그는 울음을 삼키는 듯한 한마디를 간신히 내뱉었다.
“... 우리 엄마는 시간이 별로 없는데...”
나는 그 순간 내가 있는 곳이 종합병원 안이라는 것과 오후 11시 이후에 병원을 방문하는 외부인은 중환자실 보호자뿐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우리 편의점 바로 위층이 중환자실이었다. 출근하자마자 바쁘게 움직이는, 그리고 빨리 시간이 지나가 퇴근을 하기를 기다리는 내 머리 위에는 움직일 수 없는 사람들, 시간이 조금이라도 느리게 흘러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누워있던 것이다.
나는 그때 느꼈다. 같은 공간, 같은 시간 속에 존재하지만 결코 같이 사용될 수가 없는 모순됨을, 내가 빨리 지나가 버렸으면 하는 시간이 같은 공간 안의 어떤 이에게는 어떻게든 붙잡고 싶어 하는 존재임을, 지금 이 순간을 스쳐 지나가는 ‘시간’이 사실은 다시는 붙잡을 수 없는 너무나 소중하고 아까운 것임을.
손님은 고개를 위로 치켜드며 눈을 지그시 감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흐르는 눈물을 어떻게든 참으려는 듯이, 새어 나오는 흐느낌을 다시 삼키려는 듯이. 눈물을 흘려도 되는데 마음껏 슬퍼해도 되는데, 한 가정의 가장이고 가족들이 마음껏 슬퍼할 때 기둥이 되어 주어야 하는 중년의 남자에게는 눈물 한 줄기조차 허용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 수고해요.”
손님은 처음에 들어왔을 때처럼, 그러나 이번에는 억지로 참은 슬픔이 새겨진 미소를 지으며 힘없이 편의점을 나섰다.
그 이후로 시간이 빨리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아가씨는 시간이 많아서 좋겠어~’가 자동으로 떠올랐다. 매 순간을 항상 소중하다고 느낄 수는 없다. 고통스럽고 힘든 순간을 빨리 보내 버리고 싶은 건 당연한 생각이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내가 보내고 있는 나의 시간을 조금은 더 소중하게 여기게 되었다. 견딜 수 있는 힘든 시간은 ‘빨리 지나갔으면’이 아닌 ‘지나고 나면 이것 또한 선물이겠지’ 하고 생각한다.
지금도 나는 시간이 많다.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많다. 앞으로 어떻게 그려서 채워야 할지 모르는 미래가 펼쳐져 있다. 하지만 나도 언젠가는 10년 전 그 손님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어 지나가는 시간을 잡고 싶어 하겠지. 언젠가는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를 할머니처럼 얼마 안 남은 시간을 보내고 있겠지. 그때 가서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보낸 시간을 돌아보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리고 나의 삶을 돌아보며 또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 글을 쓰는 지금도 10년 전의 그날처럼 생각이 많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