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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국어 교원 Apr 12. 2021

이백 원의 천사

나 방금 천사를 만났어

이백 원. 요즘 시대에 단돈 이백 원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초등학교 때는 이백 원으로 살 수 있는 게 그래도 몇 개는 있었던 것 같은데, 요즘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츄파춥스 사탕밖에 생각이 안 난다. 그런데 몇 년 전, 나는 단돈 이백 원으로 무려 ‘천사’가 되었다.


대학교를 졸업한 2014년 2월의 어느 날, 나는 취업에 필요한 졸업증명서와 성적증명서를 발급하려고 대학교 내 증명서 발급기를 이용하고 있었다. 지금은 무료로 발급할 수 있지만 그때는 인터넷으로 뽑든 학교 안 증명서 발급기에서 뽑든 돈을 내야 했다. 나는 현금을 넣고 필요한 증명서를 뽑았다. 내 옆에서도 한 여학생이 증명서를 뽑으려고 하고 있었는데, 거의 울기 직전인 듯한 말투로 친구와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OO야, 너 지금 여기로 올 수 있어? 내가 졸업증명서를 뽑아서 지금 당장 등기우편을 보내야 하는데, 나 지금 돈이 하나도 없어. 진짜 딱 이백 원만 있으면 되는데 이백 원이 부족해서 뽑지를 못하고 있다 정말. 문구점에서 인쇄하려고 해도 돈을 내야 되고... 네가 기숙사에 살아서 제일 빨리 올 수 있어서 그러는데 좀 와 주면 안 돼?”


그분은 거의 애원하면서 전화를 하고 있었다. 옆에서 증명서를 뽑으며 들어보니 취업 지원 서류이고 오늘까지 빠른 등기로 보내야 제시간에 서류가 도착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카드를 놓고 왔는지 현금만 있는데, 증명서 발급과 등기 부치는 비용이 딱 이백 원이 부족하다고 한다. 때마침 내 지갑에는 그분이 절실하게 필요한 이백 원 동전이 있었고, 나는 눈물이 터지기 직전인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기, 저 이백 원 있는데 이거 쓰세요.”


솔직히 나는 별생각 없이 툭 던진 아주 사소한 선행이었다. 금액도 겨우 이백 원이었고, 나에게는 가지고 다니기 귀찮은 이백 원 동전이 바로 옆 사람에게는 절실히 필요해 보이니 그걸 주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는 사소한 선행이 아니었나 보다.


“어, 어,... 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조금 놀란 표정으로 잠시 나와 내 손에 있는 이백 원을 번갈아 바라보던 그 학생은 곧 떨리는 목소리로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OO야! 나 방금 천사를 만났어!”


나는 순간 멈칫했다. 이게 ‘천사’ 소리를 들을 만한 일인가? 하지만 그 학생은 정말 진심인 듯했다. 마치 나를 정말 천사를 보는 것처럼 바라보며 말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백 원을 주고 금방 자리를 피했다. 베푼 선행에 비해 과도한 감사를 들어서 기분이 묘했는데, 학교를 나서는 발걸음이 점점 가벼워지고 가슴이 뿌듯해졌다. 조금은 황당하긴 하지만 그 순간 그 학생에게 난 확실히 ‘천사’였다.


‘내가 천사라니! 이백 만원도 아니고 겨우 이백 원으로 천사가 되다니. 초등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꿈이 뭐냐고 물어봤을 때 당당하게 나중에 천사가 되고 싶다고 말했었는데, 꿈을 조금이나마 이루긴 이뤘네.’


정말 작은 선행이었는데 나의 작은 선행으로 한 사람이 위기를 모면했고 나는 천사가 되었다. 천사 되기가 이렇게 쉬울 줄이야. 이 일을 다시 회상하면서 나는 나 또한 살면서 일면식도 없는 완전한 타인으로부터 작은 선행을 받은 적이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정말 많이 있었다. 


언젠가는 밤 11시 고속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에 핸드폰을 좌석 밑에 떨어뜨린 적이 있었다. 버스 안에 불도 다 꺼져 있고 밖에서도 불빛 하나 안 들어오는 상황이라 당황스럽게 좌석 밑으로 손만 휘저었는데, 옆자리에 앉은 승객이 조용히 자기 핸드폰 플래시를 내가 핸드폰을 떨어뜨린 방향으로 비추어 주었다. 덕분에 다행히 핸드폰을 찾을 수 있었다. 


어느 한여름 날 길을 걷고 있었는데 어떤 남자가 다급하게 뛰어와서 나를 불렀다. 그 남자는 “저기요, 천 원 빠뜨리셨어요”라고 말하며 내가 흘린 천 원을 줬다. 바지 뒷주머니에 넣어 둔 건데 걷다 보니 빠졌나 보다. 그분은 내게 천 원을 주려고 급하게 뛰어온 듯 땀을 흘리며 헉헉거렸다.


몇 년 전 새해 첫날,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고 있는데 어떤 술이 조금 취한 아저씨가 내 팔을 잡고 “저기요, 새해 첫날도 됐는데 올해 잘 보내자는 의미로 구호 외치면서 같이 뛰어갈까요?”라고 말했다. 나는 당황해서 ‘네? 네?’만 했는데 옆에 계신 아주머니께서 나를 잡고 있는 아저씨의 팔을 잡으며 “저기요, 이 아가씨 당황했잖아요. 팔 놔주세요.”라고 단호하게 말씀해 주셨다. 갑자기 신호가 바뀌었고 아저씨가 내 팔짱을 끼고 앞으로 뛰쳐나가는 바람에 팔을 못 뺐는데, 다행히도 나쁜 사람은 아니었던지 정말 횡단보도만 건너고 혼자 즐겁게 뛰어가셨다. 정말 감사했던 건, 그 아주머니께서 내가 걱정되어 옆에서 같이 뛰어 주신 것이었다. 아저씨가 가자 아주머니는 “이상한 사람이야”라고 혼잣말을 하시고 가셨다.


사실 그분들에게 많이 고마웠는데, 나는 그저 모기만 한 목소리로 ‘고맙습니다’ 한 마디만 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천사를 만났다’까지는 아니더라도 조금 더 감사한 마음을 표현할 걸 그랬다. 이 외에도 완벽한 타인으로부터 ‘작은 선행’을 겪은 경험은 수도 없이 많았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비슷할 것이다. 누군가로부터 작은 친절을 받고 또 누군가에게 베풀었을 것이다. 이런 작은 친절들이 모이고 모여 우리 사회를 따뜻하게 해 주고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게 해 주는 게 아닐까?


나를 ‘천사’라고 불러준 그 사람은 단순히 그 순간 너무 고마워서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말한 것일지 몰라도, 그 사람의 한마디는 나에게 세 가지 선물을 주었다. 내가 베푸는 아주 사소한 선행이 누군가에게는 아주 큰 의미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고 내가 이후로도 사소한 선행을 할 때마다 ‘나 또 누구한테 천사가 된 거 아냐?’ 하는 기분 좋은 생각이 들게 해 주었다. 그리고 어쩌면 살다 보면 쉽게 잊어버릴 수도 있는 나에게 잠시나마 ‘천사’가 되어 준 이름 모를 사람들을 기억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 글이 독자분께도 누군가에게 천사가 되어 준 경험과 자신에게 천사가 되어 준 사람들을 회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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