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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국어 교원 Apr 19. 2021

우리 아빠가 바로 그 민초단이었다

배스킨라빈스 민트 초코 아이스크림아, 고마워.

민초단

‘민트 초콜릿 단’을 줄인 말로 민트 초콜릿(Mint Chocolate)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별명이다. 민트 초콜릿은 싫어하는 사람들은 입도 안 대는데 좋아하는 사람들은 너무 좋아해서 디저트로 그것만 시킨다는, 정말 호불호가 갈리는 대표적인 음식이다.


예전에 대체 무슨 맛인가 궁금해서 카페에서 ‘민트 초코 라떼’를 시킨 적이 있는데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민트 초콜릿 내 의지로 사 본 적이 없었다. 내 주변에도 민트 초코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다. 하나같이 ‘치약을 왜 먹어?’라는 반응이었다. 나에게 민초단은 인터넷으로만 보던 사람들이었는데, 이럴 수가! 우리 아빠가 바로 그 민초단이었다.


작년에 친한 지인을 조금 도와준 일이 있었는데, 지인이 고맙다는 표시로 나에게 31,000원짜리 배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 케이크 쿠폰을 보내 주었다. 계속 아껴 두고 있다가 쿠폰 사용 기한이 지나기 직전인 3월 말에 '나눠 먹는 와츄원' 케이크를 사서 가족들과 같이 먹었다. 사기 직전에 고민을 조금 많이 했는데, 그 이유는 '나눠 먹는 와츄원'에 민트 초콜릿 맛이 있었기 때문이다.


배스킨라빈스 나눠 먹는 와츄원


‘아빠는 아이스크림을 싫어하고, 엄마는 가끔 좋아하긴 하지만 이가 시려서 차가운 걸 잘 못 드시니 맛만 볼 테고, 동생도 민트 초코는 싫어할 것 같은데...’


하지만 진열대에 있는 케이크 중에서 31,000원을 넘는 케이크가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에 결국 민트 초콜릿이 있는 나눠 먹는 와츄원을 골랐다. 저녁을 먹고 가족들과 같이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먹는데, 동생이 말했다.


동생 : 누나, 민트 초코 좋아해?

나: 아니, 그걸 대체 무슨 맛으로 먹는지 모르겠어. 너 좋아해?

동생 : 치약을 왜 먹음?

나 : 그러게. 너 싫어하면 먹지 마. 사기 싫었는데 어쩔 수 없이 사 왔다.


우리 대화를 듣던 엄마가 민트 초콜릿 맛이 궁금하다며 한 숟갈 맛을 보셨다.


엄마 : 응? 진짜 치약 맛이네? 이런 맛도 있구나. 세상에 별별 맛이 다 있네.

동생 : 이거 진짜 이상하다니까. 민트 초코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것만 먹는다는데 난 이해가 안감.

나 : 맞아 맞아. 이거 진짜 호불호 끝판왕이야. 그런데 난 주변에 민트 초코 좋아한다는 사람 한 명도 못 봤어.


아이스크림을 싫어해서 그냥 한 입씩 조금 맛만 보던 아빠는 맛이 궁금하다며 민트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조심스럽게 떠 드셨다. 민트 초콜릿을 맛 본 아빠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나 : (동생에게 웃으며) 야, 아빠 표정 좀 봐! 아빠 화나신 것 같은데?

동생 : 진짜 화가 날 만한 맛이야.

엄마 : 맛 진짜 이상하지?


아빠는 아무 말 없이 여전히 심각한 표정으로 민트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다시 한 입 드셨다.     


나 : 아빠, 억지로 안 드셔도 돼요. 맛없으면 그냥 버리면 돼요.     


아빠는 아무 말씀 없이 가만히 계셨다. 그리고 소심하게 작은 목소리로 한마디를 하셨다.


아빠 : ... 나는 맛있는데...

엄마, 나, 동생 : 응???

아빠 : ... 나는 이게 왜 맛있지? (다시 드시며) 진짜 맛있는데?


아빠는 다시 또 민트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향해 소심한 손을 뻗으셨다. 여전히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아빠의 심각한 표정은 화가 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은 맛없다고 하는데 정작 아이스크림을 싫어하던 본인은 난생처음 먹어 보는 민트 초콜릿이 너무 맛있어서 당황한 표정이었던 것이다.


동생 : 와, 네다섯 명이 있으면 그중 한 명은 민초단이라는데 그게 아빠였네.

나 : 그러게, 우리 아빠가 민초단이었다니. 아빠 이거 다 드세요!

아빠 : 다 먹으면 안 되지. 아껴 놨다가 내일도 먹어야지!


아빠는 정말 나눠 먹는 와츄원 8개 맛 중에서 민트 초콜릿에만 집중하셨다. 다 먹으면 아깝다며 조금씩 조금씩 음미하면서 말이다. 처음에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먹다 보니 특이한 맛이 매력적이라고 하셨다. 세상에 이런 아이스크림이 있었냐면서. 아빠는 결국 그다음 날 오전 민트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혼자 다 드셨다. 너무 맛있다고 극찬을 하시면서 말이다.


어제 결혼한 언니가 집에 와서 같이 저녁을 먹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아빠가 민트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언니 : 아빠가 아이스크림을 좋아한다고? 그것도 민트 초코를? 나는 그거 냄새만 맡아도 싫던데.

아빠 : 아니 그게 처음에는 이상했는데 정말 특이한 맛이 좋더라니까.


민트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먹은 지 3주가 지난 후에도 그게 맛있었다며 극찬을 하는 아빠를 보니 갑자기 아빠에게 아이스크림을 사 주고 싶었다. 아빠에게 ‘제가 민트 초코 사 드릴까요?’ 물어보니 아빠는 눈을 크게 뜨시며 ‘그럼 고맙지.’라고 바로 대답하셨다.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아빠라니. 아이스크림을 사 달라는 아빠라니. 살면서 처음 본다.


나는 바로 옷을 차려 입고 배스킨라빈스로 향했다. 전혀 몰랐는데, 알고 보니 배스킨라빈스 이달 맛이 ‘민트 초코 봉봉’이었다. 민트 초콜릿 아이스크림이 ‘민트 초코 봉봉’과 ‘트리플 민초’ 두 개나 있었다. 나는 세 가지 맛을 고를 수 있는 8,200원짜리 파인트에 민트 초콜릿 맛만 두 개 담아서 왔다. 사람이 조금 많아서 기다리는 시간이 길었는데, 언니가 말하길 아빠가 내가 빨리 아이스크림을 사 오길 기다렸다고 한다. 아빠는 아이스크림에 가득 든 민트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보며 아이처럼 좋아하셨다. 그리고 내가 그릇에 떠 드린 아이스크림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맛있게 드셨다.


나는 민트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맛있게 드시는 아빠를 구경했다. 그러다 보니 불현듯 4년 전 베트남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28살 때였다. 그 당시에 나는 베트남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친한 동료 선생님 두 분과 다낭의 ‘바나 힐(Ba Na Hills)’에 놀러 간 적이 있었다. 바나 힐은 옛날 프랑스인들이 휴양 목적으로 해발 1,500m에 만든 마을인데, 지금은 테마 파크로 사용되고 있다. 바나 힐로 올라가는 케이블카는 듣기로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긴 케이블 카라고 한다. 바나 힐은 깊은 산속에 있는 동화 속 궁전 같았다. 곳곳이 처음 보는 예쁜 꽃들로 장식되어 있었고 건물들은 동화 속 궁전처럼 고풍스럽고 아름다웠다. 중앙 광장에서는 코스프레를 하거나 동화 주인공들처럼 예쁘게 차려입은 공연단이 공연도 하며 관광객들과 같이 춤도 췄다. 나는 끝없이 올라가는 케이블카도 바나 힐의 전경도 흥겨운 축제 분위기도 너무 신기하고 좋았다. 잔뜩 들떠서 끊임없이 동료 선생님들에게 바나 힐이 너무 좋다고 재잘거렸고 광장을 지날 때는 나도 모르게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고 공연단과 하이파이브를 했다.


바나힐로 가는 케이블카와 바나힐 광장


바나 힐 여행을 마치고 선생님들에게 신난 표정으로 ‘오늘 진짜 재미있지 않았어요?’라고 묻자, 선생님들은 나에게 ‘재미있었죠. 그런데 선생님이 특히 좋아한 것 같아요.’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제야 나만 실컷 재미있어하고 두 선생님은 그런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기만 했던 것을 기억했다. 나는 살짝 눈치를 보며 ‘그러게요. 선생님들은 별로 못 즐기신 것 같아요’라고 했는데, 선생님들은 다시 나를 보며 인자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선생님들 : 우리도 재미있었는데, 우리는 나이 들어서 그래요. 선생님은 역시 젊네요.


나는 ‘응? 그래도 12살 차이밖에(?) 안 나는데... 그리고 내가 젊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당시 나는 20대 후반이면 나이 든 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젊은 것과 축제를 실컷 즐기지 못하는 것의 관계를 몰랐다. 하지만 바나 힐이 재미있었고, 선생님들이 축제를 즐기며 이런저런 포즈로 신나게 사진을 찍는 나를 보며 부끄럽지만 진심으로 귀엽다고 해 주셔서 기분이 좋았다.


30대가 넘어가니 그때 선생님들의 심정을 조금은 알게 되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신기한 것도 좋아하는 것도 줄어든다. 아마 어렸을 때 비해 삶에 조금 지치기도 했고 나이만큼 경험도 많아졌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예전에 좋아하던 것들 중에 흥미가 없어진 것들도 많고, 좋아하는 걸 새로 찾았다 해도 어릴 때만큼 신나는 감흥은 느껴지지 않는다. 나에게는 대표적으로 공항과 해외 출국이 그렇다.


21살 처음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이탈리아에 갔을 때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당시 나에게 공항은 코로 들어오는 공기조차도 너무 새로운 세계였고, 해외라는 낯선 사회와 낯선 문화를 경험하는 것은 무섭지만 가슴이 콩닥콩닥 거릴 만큼 설레는 경험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고 몇 번의 해외 여행과 두 번의 해외 파견으로 인해 나에게 공항은 그냥 해외로 오고 가는 출입구가 되었고, 해외는 그냥 한국과 다른 나라가 되었다. 비행기가 하늘로 뜨는 그 순간만 아직까지는 조금 설레는데, 조금 더 나이가 들면 이것마저도 평범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아빠가 민트 초콜릿 아이스크림의 매력을 발견하셨다는 사실이 좋았다. 우리 부모님은 올해 환갑을 맞았다. 부모님은 정년 퇴임을 앞두고 노후 준비를 점점 더 많이 걱정하시고, 나이 들어가는 것도 한탄하신다. 그러던 중에 아빠는 민트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만나게 되었다. 이제 아빠는 식사 후에 내가 덜어 주는 아이스크림을 기다리신다. 아빠는 환갑의 나이에 그전까지 몰랐던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그것을 좋아하게 된 것이다. 그것도 마치 맛있는 음식을 발견한 아이와 같이 말이다. 어떻게 보면 작은 일이지만 그런 작은 기쁨이 삶의 활기가 될 수 있고 삶을 즐겁게 해 주는 원동력 중 하나가 될 수 있는 거 아닐까? 나는 부모님께 이렇게 소소한 즐거움을 점점 더 많이 찾아 드리고 싶다.


아빠는 민트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드시며 행복해하시고, 나는 그런 아빠를 보면서 행복을 느낀다.

아빠의 소중한 민트 초콜릿 아이스크림




표지 사진, 나눠 먹는 와츄원 사진 출처 : 배스킨라빈스 홈페이지

바나 힐 사진 : klook


* 'chocolate'의 정확한 외래어 표기는 '초콜릿'이지만, 배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 이름이 '민트 초코'이고 말할 때도 '민트 초코'라고 많이 말해서, 대화 내용을 쓸 때는 '민트 초코'라고 썼습니다.


* 'baskinrobbins'가 '베스킨라빈스'가 아닌 '배스킨라빈스'라는 것은 이번 글을 쓰면서 처음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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