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오쿠보에서 김치찌개를 먹었을 뿐인데, 밤이 길어졌다 Ep.4
Ep.4
그다음 날도 퇴근하고 신오쿠보로 갔다.
이제는 퇴근길에 다른 선택지를 떠올리지 않게 됐다. 자연스럽게 역에 내렸고, 자연스럽게 그 골목으로 들어섰다. 일상이 바뀌었다고 말하기엔 아직 이르지만, 하루의 끝이 정해진 느낌만은 분명히 있었다.
골목 안은 전날보다 조금 더 한산했다. 불빛은 그대로였는데 사람 소리는 적었다. 김치찌개집 앞에 섰을 때 잠깐 걸음을 늦췄다. 문 안쪽이 잘 보였다. 손님은 몇 명 있었지만, 계산대 근처는 평소보다 조용해 보였다.
문을 열자 종이 울렸다.
주방 쪽에서 중년의 여자가 고개를 내밀었다. 앞치마를 두른 채였다. 잠깐 나를 보더니 웃으며 메뉴판을 들고 다가왔다. 오늘은 주문을 직접 받는 모양이었다.
“어서 오세요. 뭐 드릴까요?”
자리에 앉으며 가게 안을 한 번 더 훑었다.
주방 쪽, 계산대, 테이블 사이.
어제까지 늘 보이던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김치찌개 하나 주세요.”
사장님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마치 아무 일 아니라는 듯 말을 덧붙였다.
“아쉽게도 오늘은 그 직원이 없어요.”
순간 고개를 들었다.
“네?”
생각보다 목소리가 먼저 나왔다.
사장님은 내 반응을 보고 웃음을 삼키는 얼굴이었다.
“쉬는 날이에요. 오늘은 제가 서빙까지 해요.”
그제야 내가 뭘 찾고 있었는지 스스로도 알 것 같았다. 괜히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보러 온 건 아니라는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는데,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아… 그렇군요.”
그 말로 대화는 끝났다. 사장님은 더 묻지 않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가게 안의 공기가 미묘하게 달라진 느낌이 들었다.
김치찌개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숟가락은 자꾸 멈췄다.
같은 맛인데도 집중이 되지 않았다.
계산을 하고 가게를 나왔다.
골목을 빠져나오며 괜히 발걸음이 느려졌다. 오늘은 뒤를 돌아보지 않는 게 맞는 것 같았다. 그래도 마음 한쪽이 계속 걸렸다.
다음 날, 회사에서 하루가 유난히 길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모니터를 보고 있어도 시선이 자꾸 떠다녔다. 오늘은 그녀가 있을까, 그런 생각이 몇 번이나 스쳤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내심 바랐고, 조금 더 솔직히 말하면 간절했다.
퇴근 후 김치찌개집 앞에 섰을 때,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잠깐 서 있었다. 문 안쪽을 들여다봤다. 계산대 근처에서 누군가 고개를 들었다.
“어서 오세요.”
그녀였다.
아주 잠깐, 정말 짧은 순간 멈칫했다.
그녀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나를 봤다.
“오늘도 오시네요.”
“…아, 네. 맛있어서요. 김치찌개로 주세요.”
말이 조금 빨라졌다.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쵸? 제가 한국인인데요, 솔직히 우리 가게가 제일 맛있어요. 자주 오셔야 해요. 금방 드릴게요.”
그 말이 자연스럽게 들렸는데, 이상하게 마음에 오래 남았다. 김치찌개가 나오는 동안에도, 그녀가 테이블을 오가며 웃는 모습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손님이 하나둘 빠지기 시작했다.
가게 안이 조금씩 비었다.
말을 걸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계속 망설였다. 괜히 숟가락을 내려놓았다가 다시 들었다.
손님이 거의 빠졌을 때, 그녀가 계산대 근처에 섰다.
그때였다.
“저….”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네?”
“퇴근 시간… 몇 시쯤이세요.”
말을 하고 나서야 내가 무슨 말을 한 건지 깨달았다. 얼굴이 조금 뜨거워졌다.
그녀는 잠깐 나를 보더니 웃었다.
“왜요? 이거 혹시 같이 밥 먹자는 그런 건가요?”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다.
나는 당황해서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니에요. 절대 그런 건 아니고요.”
말이 너무 빨리 나왔다.
그녀는 잠깐 나를 보더니,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아, 그래요?”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저는 그러고 싶었는데요.”
그 말이 떨어진 순간,
가게 안의 소음이 전부 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김치찌개에서 올라오던 김도, 문에 달린 종소리도, 시간도 함께 멈춘 것 같았다.
입을 열어야 했다. 뭐라도 말해야 했다.
그런데 서서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낯을 가리는 성격이라는 걸, 이런 순간마다 다시 확인하게 된다.
그녀는 그런 나를 잠깐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근데 손님은 이미 밥을 드셨잖아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저도 저녁은 먹었어요.”
그녀는 계산대에 팔꿈치를 가볍게 기대며 웃었다.
마치 이 상황이 특별할 것 없다는 듯, 너무 자연스럽게.
“괜찮으시면 커피나 한 잔 할래요? 저도 이제 곧 퇴근이거든요.”
남자답게, 조금 더 여유 있게 말해야 하는 순간이라는 걸 알았다. 그런데 그러지 못한 나 자신이 잠깐 원망스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말이 이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네… 좋아요.”
생각보다 목소리가 작게 나왔다.
그런데 그녀는 못 들은 척하지 않았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금방 나갈게요.”
나는 먼저 가게 밖으로 나왔다.
골목의 공기가 가게 안보다 차갑게 느껴졌다. 괜히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빼고, 휴대전화를 꺼냈다가 다시 넣었다. 특별히 할 일은 없었는데, 가만히 서 있는 게 쉽지 않았다.
몇 분쯤 지났을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자 그녀가 나와 있었다. 앞치마는 벗었고, 머리는 그대로 묶은 채였다. 가게 안에서 보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밖으로 나오자 조금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아뇨, 방금 나왔어요.”
둘 다 조금 어색한 말을 했다.
그 어색함이 오히려 나쁘지 않았다.
“근처에 카페 많아요.”
그녀가 먼저 걸음을 옮겼다.
나는 한 박자 늦게 그 뒤를 따랐다.
골목을 빠져나와 큰길 쪽으로 걸어가면서도, 말은 많지 않았다. 옆으로 걷고 있었지만, 시선은 자꾸 앞쪽만 봤다. 괜히 손이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주머니 안에서 몇 번이나 움직였다.
신오쿠보의 불빛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조금 전까지 혼자 지나치던 거리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 풍경이 전혀 다르게 보였다.
그녀가 말했다.
“여기 카페 괜찮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김치찌개집을 나와 처음으로 다른 장소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늦게 와서야 실감이 났다.
writer: 추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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