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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전 Jan 18. 2021

영화 <국제시장>실존인물, 28세 청년이 보여준 용기

- 메러디스 빅토리호 기적의 사람들 5

2014년 영화 <국제시장>이 개봉되기 전까지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이야기는 역사의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었다. <국제시장>이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이야기를 인양해 역사의 한 페이지로 각인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격동의 대한민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어내며 치열하게 살아가는 영화 속 주인공 덕수(황정민 분)는 이 시대 모든 '아버지의 초상'이긴 했으나 실존인물은 아니다.     


그런데 영화 초반, 미군 장군에게 더 많은 피난민들을 태워가야 한다고 절규하듯 호소하는 젊은 청년이 나오는데 그는 덕수와 달리 실존인물이다. 한국전쟁 당시 28살의 청년이었던 현봉학(1922년~2007년 11월 25일)이 그 주인공으로, 그가 없었다면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 불리는 '메러디스 빅토리호'도 존재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영화 <국제시장>의 실존 인물 현봉학

1950년 9월 인천 상륙작전으로 한국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은 연합군은 크리스마스까지 전쟁을 끝내겠다는 계획으로 북진하며 공세를 퍼붓는다. 그런데 30만 명에 가까운 중공군이 인해전술을 앞세워 전쟁에 끼어들면서 전세는 급변한다. 압록강까지 진출했던 연합군은 일시 후퇴를 결정하고 대규모 철수작전을 벌인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벌어진 덩케르크 구출작전에 비교될 만큼 대규모였던 흥남철수작전. 그런데 철수작전을 계획한 연합군 앞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가 나타난다. 바로 국군을 따라 남쪽으로 가기 위해 길을 나선 수많은 피난민들이었다.      


'필연'이었던 현봉학의 고향행


그리고 대규모 흥남철수작전이 결정되었을 당시 28살의 청년 현봉학은 하필 함흥에 있었다. 그 '하필'을 현봉학은 자신의 사명이라고 믿었다. 함흥 출신의 현봉학은 1941년 세브란스 의전에 합격하지만 입학금이 없어 공부를 못할 위기에 처한다.     


그러던 중 한 선교사의 도움으로 어렵게 대학을 마친 뒤 평양 기독병원 장기려 박사 밑에서 인턴 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다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서고 기독교인에 대한 압박이 심해지자 다시 서울로 돌아오게 된다. 이후 1947년 선교사 애리스 윌리엄스 부인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미국 버지니아 리치먼드 주립의대를 졸업하고 우리나라에 혈액은행을 설립할 꿈에 부풀어 돌아온 것이 1950년 2월 28일, 그리고 불과 4개월 만에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피난 간 대구 한 병원에서 일하던 그는 지인의 소개로 통역일을 하기 위해 해병대로 가게 된다. 그는 뛰어난 영어실력 때문에 미군에 발탁되고 미 10군단 민사부 고문이 된다. 이후 10군단은 함흥으로 향한다.     


멀고 먼 길을 돌아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 그는 옛 친구들도 만나고 고향 사람들도 만나 감회에 젖는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갑자기 철수가 결정되고 고향 사람들은 현봉학을 찾아와 피난 갈 방도가 없냐고 부탁한다. 그는 평소 자신을 신뢰하던 10군단 최고 책임자인 알몬드 중장을 찾아가 사정을 이야기하고 피난민을 남쪽으로 데려갈 방도를 마련해 줄 것을 부탁한다.        


그러나 사실 10군단 최고 책임자인 알몬드는 피난민 수송에 부정적이었다. 무려 10만에 달하는 10군단 병력을 철수시키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인데 피난민을 실어 나를 배까지 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설령 배가 있다고 해도 피난민 중에 적군이 섞여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선박으로 피난민을 이송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현봉학은 자신의 자서전 <나에게 은퇴는 없다>(1996)를 통해 당시 고향 사람들이 당할 고초를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다행히 당시 철수 통제관 에드워드 포니 대령은 배를 구해 피난민을 데리고 가야 한다는 현봉학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었다. 그리고 여러 차례 간구하는 현봉학의 진심에 알몬드 중장도 마음을 열고 피난민을 싣고 갈 배를 구한다면 어느 정도의 피난민 철수를 계획하겠다고 한다. 그 후 에드워드 포니 대령과 현봉학은 피난민을 싣고 갈 배를 모으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취재 중 입수한 흥남철수 작전에 관한 최종보고서 < ACTION REPORT >(1973년까지 국가기밀문서로 묶여 있던 서류)에는 12월 9일부터 24일까지 흥남철수 작전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상세히 기록돼 있다.     

흥남철수작전 최종 보고서

그동안 흥남철수작전에서 몇 명의 피난민을 실어날랐는지에 대한 통계는 차이가 좀 있었는데 이 보고서에서는 정확히 10만 5천 명의 미군과 한국군인들, 그리고 9만 1천 명의 피난민들을 수송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보고서에는 동원된 배들이 전차 상륙용 전함인 LST를 비롯해 화물선, 일본 소속 선박까지 다양했다고 전한다.     


"그들의 이별이 길어질 줄 몰랐어요"     


10만 명에 달하는 군인들과 수많은 무기를 어떤 배에 어떻게 실어야 하는지를 총괄하는 철수통제관 에드워드 포니는 작전 계획을 짜는 틈틈이 피난민들의 수송 작전도 치밀하게 계획했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지속적으로 도움을 준 현봉학이 있었다.     


그러던 중 현봉학은 12월 20일 군명을 받고 남한으로 오는 군함 매킨리호에 탑승한다. 한창 진행 중인 흥남부두 철수작전을 끝까지 보지 못하고 배에 오른 것이다. 그는 남한으로 오는 배안에서 자신에게 도움을 준 에드워드 포니에게 편지를 쓴다.  

개인적으로 나는 작전이 끝날 때까지 이곳에 있고 싶지만 명령이 떨어져 어쩔 수 없이 떠납니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피난민과 함께 있습니다.... 피난민들을 구하는 데 있어 에드워드 당신이 보여준 확신은 나의 무거운 짐을 훨씬 덜어 주었습니다. 우리 모두 정말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현봉학이 에드워드 포니에게 보낸 편지.                                                        1950년 12월 20일           
현봉학이 철수하는 과정에서 에드워드 포나에게 쓴 편지

이 편지는 에드워드 포니의 손자 네드 포니가 가지고 있던 것으로 네드 포니에 따르면, 1997년 역사 연수 프로그램을 위해 한국을 방문했을 당시 현봉학에게 직접 연락이 와 만났다고 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현봉학은 네드 포니에게 흥남 철수작전 당시 자신의 마음을 이해해주었던 에드워드 포니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달했다.     

전쟁이 끝난 후 본업인 의사의 자리로 돌아간 현봉학은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의학계에서도 큰 족적을 남긴다. 그러나 한국전쟁에서 자신이 한 일을 앞세워 자랑하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생전 방송사에서 그에게 흥남철수에 관해 인터뷰 하자고 하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한국전쟁으로 생긴 천만 이산가족 중에 백만 정도를 만든 책임감은 저에게 있지요. 저도 그들의 이별이 이렇게 길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만약 그때 현봉학이 불철주야로 뛰어 피난민을 위한 배를 마련하지 않았다면 상황은 어땠을까? 그랬다면 남쪽으로 내려와 이산가족의 아픔으로 평생 눈물지으며 산 이산가족 상당수는 피난을 오지 않고 북에서 행복했을까? 누구도 쉽게 말할 수 없는 일이다.      


지내놓고 돌아보면 보이지만 막상 어떤 일을 맞닥뜨려 있을 때는 최선의 선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럴 때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다. 최선을 다한 뒤 결과는 그렇지 않은 결과보다 긍정하고 받아들이기 쉬우므로...     


1950년 12월, 하필 그때 미국에서 돌아와 우여곡절 끝에 흥남에 있게 된 현봉학은 자신이 그곳에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훗날 고백한다. 그래서 피난민을 구하는 일에 전념을 다했다고.  

    

그렇게 피난민을 살리기 위해 흥남부두로 불러 모은 배들 가운데 마지막 배가 ‘메러디스 빅토리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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