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러디스 빅토리호, 기적의 사람들 4
하루 사이로 어제는 작년이 된다. <한국전쟁 70주년 기념> 다큐는 '코로나'라는 전 세계적 재앙을 만나 이제 <한국전쟁 71주년> 다큐가 될 예정이다. 지금으로서는 올해 6월에 방송을 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인데, 들려오는 코로나 소식들은 여전히 무거운 소식들뿐이라 암담하긴 하다.
22살에 ‘레너드 라루’ 선장 곁에서 선장의 결단을 지켜봤고 마리너스로 변신한 선장이 돌아가실 때까지 곁을 지킨 2등 항해사 ‘로버트 러니’는 작년 12월 주고받은 메일에서 내년 봄쯤 미국을 방문할 계획이니 우리를 만나 달라는 요청에 이렇게 답변해 왔다.
하나님께서 그때까지 나를 이 땅에 두신다면 내가 본 모든 것을 이야기하겠다고.
그랬던 '로버트 러니'도 이제 95살이 됐을 것이다. 물론 미국 나이론 다행히 한두 살 정도 적긴 하겠지만...'로버트 러니'가 평생 존경했다는 '레너드 라루', 국가보훈처는 2020년 12월 ‘이 달의 전쟁 영웅’으로 '레너드 라루' 선장을 선정했다. 한국인도 아니고, 군인도 아니고, 평범한 화물선의 선장인 그가 한국전쟁이 70주년을 맞아 '이 달의 전쟁 영웅'이 된 까닭은 무엇일까?
'레너드 라루' 선장은 바로 1950년 12월, 14,000명의 피난민을 싣고 흥남부두를 탈출했던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선장이었다.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이 항해는 선장 '레너드 라루'의 결단이 없었다면 결코 이위대한 항해는 이뤄질 수 없는 일이었다.
한국전쟁 참전용사이자 작가인 '빌 길버트'가 20년 전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2등 항해사 '로버트 러니'를 인터뷰하고 쓴 내용을 보면 당시 ‘레너드 라루’의 결단이 잘 나타나 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흥남부두에 닿자 미 10군단 소속 존 차일스 대령이 배에 올랐다. 대령은 '레너드 라루'선장을 비롯해 '로버트 러니' 2등 항해사를 불러 피난민 수송을 부탁했다.
우리는 당신에게 피난민들을 태우라고 명령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당신이 자원해서 태워 줄 수는 있다. 그러니 상급 사관들과 상의하여 결정해 주기를 바란다.
그러자 '레너 드 라루' 선장이 주저 없이 대답했던 모습을 ‘로버트 러니’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선장은 좌나 우로 머리를 돌린다거나 누구와 상의하는 일 없이 즉석에서 대답을 했어요. 태울 수 있는 한 많이 태우고 가겠다고.
당시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무어 맥코멕 회사 소속 화물선으로 군 해양 수송부와 용역 계약을 맺고 있는 정원 60명의 선박이었다. 그리고 배에는 이미 48명의 선원이 타고 있었다. 무엇보다 화물 대신 피난민을 배에 태우기 위해서는 회사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닌 전시에서 모든 것은 선장 '레너드 라루'의 결단에 달려 있었다.
그때 '레너드 라루' 선장의 나이는 37세, 2등 항해사 '로버트 러니'의 나이는 22세, 배에 타고 있던 선원 대부분이 20대였다. 그렇게 젊은, 아니 어쩌면 어릴 수도 있는 나이의 그들은 어쩌면 자신들에게 불리할 수도 있는 그런 결단을 어떻게 내릴 수 있었을까?
그때 '레너드 라루' 선장은 2등 항해사 '로버트 러니'에게 명령했다고 한다.
태울 수 있는 한 많이 태우고 만 명을 넘으면 내게 보고 하시오.
그때부터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피난민을 태우기 시작한다. 물론 사람이 정상적으로 탈 수 있는 공간은 배에 없었다. 화물선 본연의 임무를 버리고 화물칸에 사람을 싣기 시작한 것이다.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항해에 관한 모든 것을 기록한 <항해일지>에 보면 당시의 상황이 잘 나타나 있다.
1950년 12월 22일 21:30분 승선 개시, 화물 발판 사용, 제5 선창으로 승선
23:15분 평 갑판 사용, 2,3 선창 피난민 승선
1950년 12월 23일 00:00 갑판의 승강구 모두 열어 피난민 승선
03:30 2와 5 선창 완료
05:00 4 선창 완료
07:00 1 선창 완료
11:10 피난민 승선 완료
1950년 12월 22일 밤 9시에 시작한 피난민 승선은 다음날인 23일 오전 11시에 비로소 완료됐다. 무려 14시간에 걸쳐 14,000명의 피난민이 승선한 것이다.
그러나 피난민을 싣는 작업은 시작에 불과했다. 더 큰 난관은 전쟁의 바다를 헤쳐 남쪽으로 가는 일이었다. 당시 흥남 앞바다는 해전 사상 가장 많은 기뢰가 깔려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기뢰 탐지기’ 하나 없이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전쟁의 바다로 나선다. 기뢰 한 방이면 배는 바다에서 언제든지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14,000명의 피난민을 태우는 결단을 하기에 메러디스 호에는 부족한 것이 너무 많았다. 그들을 먹일 식량도 없었고, 난방도 없었고, 화장실도 없었다. 무엇보다 승무원들은 한국말을 전혀 할 줄 몰랐고 피난민은 영어를 전혀 할 줄 몰랐는데, 통역관도 한 명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레너드 라루’는 왜 위험하기 이를 데 없는 선택을 한 것일까?
7600톤급 '빅토리'호는 크기가 작아 비교적 얕은 바다에서도 운항이 가능하며 속도도 빠른 것이 특징이다. 배는 23일 오전 11시 흥남항을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밤새 달려 24일 낮 12시 30분 오륙도에 도착했다고 항해일지에 기록돼 있다. 그러나, 미군은 부산항 입항을 허락하지 않는다. 부산은 이미 피난민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배는 하루 동안 부산항에서 대기를 한다. 그동안 피난민들에게 비상식량을 제공하고 통역관을 태운 뒤 12월 25일 배는 다시 거제도를 향한다.
거제도에 도착한 것은 12월 25일, 성탄절 정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사흘의 항해 동안 승선 인원이 오히려 늘어나 있었다. 5명의 새 생명이 배에서 탄생한 것이다. 말이 통하지 않던 승무원들은 이들에게 한국인을 상징하는 ‘김치’라는 닉네임을 붙였다. 김치 1호, 2호, 3호, 4호, 5호가 메러디스 빅토리호 안에서 태어났다. 한국 전쟁이 끝난 뒤 이 이야기가 세계에 알려지면서 ‘크리스마스에 일어난 기적의 항해’라고 불리게 된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뒤 이 위대한 항해를 이끈 '레너드 라루' 선장은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는 ‘성 베네딕도 수도회’ 수사가 돼 있었다. 오대양 육대주 바다를 누비던 그는 왜 수사가 된 것일까? 처음 이 다큐를 기획할 때 가장 나의 호기심을 가장 끈 부분은 이 부분이었다. 그리고 그는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수도원 밖 외출도 스스로 삼간다. 오로지 수도원 울타리 안에서만 살았다. 왜 그랬을까? 마리너스 수사가 평생을 머물렀고 그의 묘지가 있는 성 베네딕도 뉴튼 수도원을 올 봄에는 꼭 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나 위험 가득한 전쟁의 바다를 헤쳐 왔던 '위험한 항해'가 14,000명을 구출한 '위대한 항해'로 기록되기까지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극적인 이야기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자신의 생명조차 담보할 수 없는 무자비한 전장의 한가운데서 피난민들이 배에 탈 수 있도록 뒤에서 치열하게 움직였던 '쉰들러 리스트'들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