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전 Dec 17. 2020

내 이름은 김치 1호입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 기적의 사람들

1950년 12월 25일, 함포사격이 빗발치는 흥남부두를 한 척의 배가 필사적으로 빠져나오고 있었다. 60인승 미국 화물선인 그 배에는 정원의 200배가 훨씬 넘는 14,000명의 피난민이 타고 있었다. 이들의 항해는 훗날 ‘가장 작은 배로 가장 많은 생명을 구한 배’로 기네스북에 오른다. 역사의 회오리를 온몸으로 맞으며 치열하게 살아낸 메러디스 빅토리호 사람들, 이들을 추적해 한 편의 방송으로 만드는 기획안은 올해 <한국 콘텐츠 진흥원 방송 제작 지원 프로그램>으로 선정됐다. 일여 년에 걸쳐 방송 제작을 하면서 만나게 되는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이야기를 싣고자 한다. 

              

그는 대한민국 1세대 종합 상사맨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종합상사에 들어가 대한민국 최고의 생산품인 철을 세계에 팔아왔다. 같은 업종으로 자영업을 시작한 후에는 <오백만 불 수출의 탑>을 수상할 정도로 열정적으로 살았다.   

        

일흔의 나이지만 변함없이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손양영씨(70), 그의 생일은 지금으로부터 70년 전인 1950년 12월 25일이다. 그러나 만약 그의 부모님이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메러디스 빅토리 호’를 타지 않았다면 그의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 배의 탑승은 그의 인생을 결정적으로 바꿔놓는 계기가 되었다.


70년 전, 손양영씨의 부모를 비롯해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몸을 실었던 14,000명의 사람들, 그들은 전쟁의 회오리에 휘말려 거세게 굴러가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피하고 싶었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잠시 안전한 곳을 찾아 남쪽으로 피난 가는 방법을 택했던 그들은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그들이 탄 배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피하는 길이 아니었다. 그 배 역시 역사의 정중앙을 거세게 굴러가는 수레바퀴 가운데 하나였다. 


손양영(70)씨의 고향은 함경남도 북청, 아버지는 흥남에서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전쟁이 발발했을 때 아버지에게는 9살 난 아들과 5살 난 딸이 있었다. 셋째를 임신하고 있는 아내는 만삭이라 처음에는 피난을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10만이 넘는 중공군이 밀어닥치고 유엔군의 퇴각이 급박하게 이뤄지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한 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전쟁의 한가운데서 모두들 젊은 사람이 남아 있으면 안 된다고, 잠시 몸을 피했다 오라고 재촉들을 했다. 부모님과 의논 끝에 아버지는 큰 아들과 딸을 부모님께 맡기고 아내와 단 둘이 배에 올랐다. 그 배가 피난민을 싣고 흥남부두를 떠난 마지막 배 < 메러디스 빅토리호 >였다. 그 배에 오를 때까지만 해도 누구도 그 이별이 이렇게 길어질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배에도 거의 마지막으로 오른 젊은 부부는 자리가 없어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갑판 한 편에 겨우 자리 잡았다. 밤새 함포 사격으로 불덩이가 날아다니고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갑판에서 이틀을 보내자 아직 산일이 남은 아내가 갑자기 진통을 하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갑자기 산기를 느껴서 진통을 시작했대요,
그런데 배에 의사가 있습니까?
주변에 계시던 피난민 아주머니들이 어머니를 감싸고 아기를 받아낸 거죠,
그게 접니다.          


미국의 화물선인 < 메러디스 빅토리호 >에는 48명의 미국인 승무원들이 타고 있었다. 미국 승무원들은 의사도 없이, 평범한 여인들이 능숙하게 아이를 받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뒷날 회고했다. 그리고 태어난 아기를 급히 의무실로 옮겼는데 그 아이가 바로 손양영씨다.     


그러나 60인승의 화물선에 14,000명의 피난민을 태우고 기적의 항해를 한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이야기는 그동안 우리 역사에서는 그다지 관심을 받지 못했다. 영화 < 국제시장 >이 흥행을 하면서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비로소 주목을 받자 당시 승무원들 가운데 생존해 있는 사람들이 초청을 받아 한국엘 왔다.          


그때 손양영씨가 메러디스 빅토리호 2등 항해사 ‘로버트 러니’씨를 만나 자신이 배에서 태어난 아기라고 말하자 로버트 러니는 아주 반가워하며 그를 끌어안았다.         

 

당신이 김치 1 호군요.    


그는 그때까지 자신이 ‘김치 1호’로 불렸던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때 배에서는 5명의 아기가 태어났어요,
통역이 없어 말도 통하지 않던 우리들은 그들을 김치 1호, 2호
이런 닉네임으로 불렀죠. 의무실에 옮겨졌던 아이가 김치 1호였어요.           


60인승의 화물선이었던 메러디스 빅토리호, 유엔군에게 물자를 전달하기 위해 흥남부두로 들어갔던 그 배는 화물칸 가득히 피난민을 싣고 남쪽으로 향한다. 물도, 식량도, 난방도 없이 정원의 200배에 달하는 피난민을 싣고 전쟁의 바다를 헤쳐 왔던 배는 1950년 12월 25일 거제도에 닿는다.     

        

남한으로 올 때 32살이었던 젊은 엄마는 북에 두고 온 어린 자식들을 잊지 못해 평생이 눈물바람이었다.     

어머니가 새벽마다 북쪽을 향해 정화수를 떠놓고 간절히 비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자랐다. 북쪽의 아이들을 생각하며 남쪽에서 더 이상 아이를 낳지도 않았다. 거제도를 떠나 서울로 이사를 간 이유도 언제든 통일이 되면 고향으로 가장 먼저 달려가기 위해서였다.           

새벽마다 북쪽을 향해 정화수룰 떠 놓고 기도를 하던 손양영씨의 어머니

손양영씨가 결혼을 해 가정을 이룬 어느 날, 아버지가 자신을 의정부의 한 산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는 당신이 세상을 떠나면 꼭 이 자리에 묻어달라는 말을 하며 직접 찾은 묘자리를 보여주었다. 보통 산소들이 남쪽을 향하는 것과 달리 그 산소는 북향이었다. 산소 앞 골짜기를 따라 멀리 내다보면 그대로 북한 고향 땅으로 닿는 방향이었다.          


내가 살아서는 북쪽의 아이들을 지켜주지 못했지만 죽어서라도 아이들을 지켜보고 싶다. 꼭 나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면 이 곳에 합장을 해라.        


남북한 화해무드가 조성될 때마다 희망을 가지고 뉴스를 지켜보던 두 분은 결국 고향땅을 다시 밟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가 남긴 유품 가운데 하나를 손양영씨는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아무것도 없이 도착해 먹고살기가 힘들었던 거제도에서 찍은 손양영씨의 백일사진이다. 아버지가 난리통에서도 백일 사진을 찍은 것은 이유가 있었다.

       

니가 북에 있는 형님, 누나 얼굴을 모르니 이 사진을 잘 간직해라. 니 어릴 적 모습이 형님을 닮았으니 형님을 만나면 이 사진을 보여줘라.         


사진 뒤에는 아버지가 직접 형님과 누나의 이름을 적은 메모도 있었다. 얼굴도 모르는 형제를 만났을 때 징표가 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그 간절한 바람과 달리 사진은 아직도 주인을 찾지 못한 채 해마다 빛이 바래져 가고 있다.          

아버지가 백일 사진 뒷면에 친필로 남긴 메모, 소중하게 간직했다가 형님을 만나면 보려주라는 메모

 올해도 어김없이 그의 생일이 다가온다. 12월 25일 성탄절, 포탄과 기뢰를 뚫고 거제도에 도착한 배 위에서 태어난 기적의 상징 ‘김치 1호’, 그가 아버지의 간절한 유언을 비로소 지킬 수 있는 날은 언제일지, 그의 기다림이 한없이 길어지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 어디에도 없는, 어디에나 있는 그들의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